(원피스/스압) 원피스의 정의관

(원피스/스압) 원피스의 정의관

G ㅇㅇ 1 87 09.30 09:12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현대에 개인들은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간다. 공동체 생활은 상호 작용하는 개인들로 하여금 문화, 정치, 종교, 이념, 규범 등의 여러 사회 현상을 파생시킨다. 이 중에서 규범은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에게 올바른 가치 판단을 내리도록 제도로써 강제하여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기능을 하는데, 이 규범의 근간이 되는 가치가 바로 정의다.

공동체의 규범은 개인의 도덕이 모여 만들어지므로 정의의 뿌리는 기본적으로 도덕이라고 할 수 있다. 규범은 가치관과 달리 공동체를 구성하는 모든 개인에게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하므로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아닌 특정 개인들만이 납득하는 정의는 정의롭다고 말할 수 없다. 이렇듯 정의의 핵심 요소는 공정성이다. 
 
개인이 사회를 벗어날 수 없는 시대에서 정의는 사회적인 개념이며, 정의의 주체는 공동체이므로 그 어떤 개인도 공동체를 대변하여 정의를 단호히 정리할 수 없다. 해군의 대장급 해병들이 저마다 각자의 정의관을 가지고 있는 이유 또한 다양한 개인의 역사와 철학 그리고 성격에 따라 정의에 대해 접근하는 방식과 정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어떠한 상황에서 정의는 필연적으로 희생을 동반한다. 정의를 관철하는 과정에서 희생이 없다면 정의는 논쟁거리가 되지 않는다. 정의를 논할 때 문제로 인식되는 것은 올바른 가치 판단을 내리는 과정에서 정의 이외에 다른 가치의 희생이 발생하는 상황, 이른바 딜레마 속에서 정의를 위해 희생할 대상을 정하는 근거의 합리성에 관한 부분이다. 
 
따라서 정의란, 정의의 주체와 희생할 대상을 올바르게 정하는 것이며,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누구를 위하고 누가 희생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 제기이다. 이러한 문제 인식 속에서 정의는 정의롭다는 정체성을 잃는다. 
 
이때부터 정의는 옳고 그름을 다루는 정의로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무엇이 공동체의 규범과 개인의 이익에 반하지 않고 사회의 질서를 이상적으로 유지시키는 결정인가에 대한 가치 판단의 형태로써 다뤄진다.

우선 각각의 대장급 해병들의 정의관을 살펴보기 전에 그들이 외치는 정의관이라는 개념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구호가 맥락없이 토막난 까닭에 오해하기 쉬운데, 정의관은 각자가 생각하는 정의의 개념에 관한 것이 아니다. 
 
정의의 개념은 그저 올바른 것, 즉 정의로 고정되어 있다. 따라서 정의관이란 정의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각자의 해석, 즉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견해가 아니라, 해병으로서 주어진 정의를 관철하기 위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에 대한 태도를 의미할 뿐이다. 
 
가령 철저한 정의라면 정의의 의미가 철저하게 행동하는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정의를 관철하고자 할 때 정의의 주체자는 그 태도가 빈틈없이 철저해야 한다는 뜻으로써, 정의를 실현하는 주체자의 태도와 방식에 관한 시각이 바로 정의관이다. 비약하자면 정의관이란 해당 해병의 성격 혹은 태도 정도로만 생각해도 좋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세계를 구성하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만큼 세계에는 다양한 입장을 가진 다양한 주체들이 있으므로 비단 정의 뿐만 아니라 그 어떠한 규범과 원칙도 세상의 모든 입장과 주체를 대변하거나 만족시킬 수는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럼 대체 정의란 무엇일까?

앞서 말했듯이 정의의 개념은 불변한다. 가변적인 것은 정의의 개념이 아니라 정의의 주체다. 정의의 주체가 누구인가에 따라 정의의 원칙도 달라진다. 도플라밍고가 말한 대로 주어진 입장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 하는 것이 정의다. 
 
따라서 해군의 주요 인물들이 어떠한 정의관을 가지고 있는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구호보다 그들이 각자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어떤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지, 다시 말해 정의의 주체를 무엇으로 보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핵심이다.

“만에 하나 저 배에 학자가 한 명이라도 숨어 있다면,

이번 희생은 전부 물거품이 된다...!”

정의라는 대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면 그로 인해 발생하는 희생은 타당하다고 믿는 아카이누의 ‘철저한 정의’는 개인의 가치보다 집단의 가치를 앞세우는 전체주의를 표방한다. 
 
원피스 내 해병들의 정의관을 실제 정의 이론에 대입하려다 보니 아카이누가 공리주의를 표방한 것으로 오해하는 이들이 많은데, 집단 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는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긍정하지 않는다. 
 
다수를 위해 소수의 희생을 용인하는 것은 공리주의가 아니라 전체주의적 관점인데 이 또한 다수가 집단을 대변하는 민주주의 체제에서만 정확한 말이며,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봉건주의나 독재 국가 같은 경우, 소수를 위한 다수의 희생까지 용인하는 것이 바로 전체주의다.

공리주의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의미는 구성원을 다수와 소수로 양분하여 다수만의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입장이 아니라 구성원 내 최대한 많은 사람 즉 주류가 되는 다수의 행복뿐만이 아닌 비주류인 소수의 행복까지도 고려해야 한다는 정의 이론이다. 
 
그저 다수가 아닌 최대 다수란 바로 그런 의미다. 결과적으로 공리주의는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적극적으로 반대한다. 만약 아카이누가 공리주의자였다면, 역사의 진실을 감추고자 수많은 이들의 희생을 일삼는 세계정부의 정의에 결코 동의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아카이누가 독단적이고 극단적인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그의 전체주의적인 시각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오하라 사건 당시 단 한 명의 학자도 놓치지 않기 위해 민간인 피난선을 격침시키던 모습, 정상결전 당시 겁을 먹고 전장에서 이탈한 병사를 즉결 처분하는 모습, 에이스 처형이라는 목적을 달성한 해군이 전쟁을 수습하기보다 아군의 사상자를 더욱 늘려가면서까지 달아나는 흰 수염 해적단을 섬멸하려던 모습 등에서 그의 철저한 면모와 극단성을 엿볼 수 있다. 
 
그밖에도 도플라밍고의 칠무해 탈퇴 오보 사건 당시 상부인 오로성을 찾아가 왜 세계가 도플라밍고 같은 녀석에게 휘둘리지 않으면 안 되냐며 따지고 들던 모습, 그리고 본부에 보고도 없이 세계정부를 대신해 드레스로자 시민들에 복배 사죄한 후지토라에게 책임을 묻고 일갈한 장면 등도 본인이 따르는 집단의 체면과 위신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모습으로써 아카이누의 전체주의적 관점을 잘 나타낸다.

이렇듯 집단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개인의 희생을 묵과하는 철저한 정의는 도덕적으로 뚜렷한 한계를 드러내기 때문에 독자들로부터 정의의 주류로써 크게 지지받지는 못한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공리주의와 전체주의를 혼동하듯, 어쩌면 아카이누 스스로도 집단과 다수를 혼동하여 세계정부의 정의를 따르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카이누의 정의관은 너무나도 많은 불합리를 야기하므로 이상적인 정의관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정의란 입장에 따라 형상을 달리하지.

그러니 너의 정의도 탓하지는 않겠어.”


해병 시절의 아오키지는 늘 느긋하고 밍기적대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의 성격대로 해이하다는 것은 규범에 얽매이려 하지 않고 느슨하다는 의미로, 집단의 규범으로 철저하게 무장한 아카이누의 정의관과 정확히 대칭되는 정의관을 갖고 있다.

규범으로부터 해이해지겠다는 선언은 규범으로부터 자유롭게 행동하겠다는 의미다. 게다가 한껏이라는 부사로 강조하고 있는 점은 심지어 공동체의 규범에 반할 수도 있다는 의지까지 내포하고 있다. 
 
주목할 점은 그의 정의관이 한껏 해이한 정의가 아니라 한껏 해이해진 정의, 즉 수동태 문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오키지의 젊을 적 정의관이 ‘불타오르는 정의’였다는 점을 상기하면, 한껏 해이해진 정의란, 오하라 사건 때 느낀 것처럼 아오키지가 생각하는 정의와 세계가 들이미는 정의 사이의 괴리감, 그리고 세계정부의 규범만을 따라서는 올바른 정의를 세울 수 없다는 정의의 한계에 직면한 결과임을 짐작해볼 수 있다. 
 
해병으로서 기본적인 정의의 가치는 수호하지만, 어떤 진실을 숨기기 위해 희생을 요하는 세계정부의 규범이 정의라면 한껏 해이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아오키지 정의관의 핵심이다.

아오키지는 집단의 규범보다 개인의 자율성을 더 중시한다. 세계정부가 규범으로 정한 정의를 떠나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정의에 대하여 자유롭게 판단할 자유, 나아가 상황에 따라서는 세계정부의 규범이 아닌 개인의 가치관을 따라 행동할 자유와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한껏 해이해졌다는 아오키지의 진단과는 달리 개인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몸 담고 있는 한 개인은 공동체의 규범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아오키지가 아카이누와 해군의 원수 자리를 놓고 결투를 벌였던 이유는 아카이누의 정의관이 채택됨으로써 해군이라는 공동체의 규범이 극단성을 띄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공동체의 규범이 ‘철저한’ 정의 실현이라는 감투를 쓰고 개인의 권리와 가치를 짓밟는 극단적인 사회에서는 어떠한 정의도 바로 설 수 없기 때문에 아카이누와의 결투에서 패배한 아오키지는 아카이누의 해군으로부터 은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공백의 100년 연구는...

다 감싸줄 수 없어, 센토마루 군.

나는 사축이거든.”


정의에 대한 주체 의식이 뚜렷한 위의 두 인물들과 달리 키자루는 해군본부의 최강 전력이라 불리는 대장임에도 불구하고 군의 지시만을 따르며 해병으로서 주체 의식이 떨어지는 모습을 종종 보여준다. 우리는 아오키지와 아카이누의 결투로부터 정의를 가로막는 것이 때로는 악이 아니라 또다른 정의임을 깨달을 수 있다. 
 
이처럼 정의에 대해 다양한 견해들이 혼재한 세계에서 개인은 뚜렷한 주체 의식을 갖고 정의에 대한 가치 판단을 스스로 할 수 있어야 한다. 
 
전체주의를 표방한 철저한 정의든 자유주의를 표방한 한껏 해이해진 정의든 두 견해 모두 입장에 따라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한 양면성을 띄기 때문에 스스로 정의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는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정의관에 대해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고 정의에 대한 가치 판단을 보류하게 되는데, 이는 결국 공동체의 불공정한 규범에 대해서도 저항하지 못하고 주체적인 개인으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하는 결과를 야기하게 된다.

키자루의 ‘애매하게 가는 정의’란, 말이 좋아 정의관이지 실은 정의에 대하여 어떠한 주관도 가지지 못한, 볼사리노라는 개인의 정의관이 부재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보통의 시민 즉 대중의 모습과 꼭 닮아있다. 
 
애매하게 가는 정의는 곧 대중의 정의다. 대중은 주관을 따르지 않고 주류를 따른다. 그것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생존하기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언급한 ‘키자루의 정의관은 아카이누와 아오키지를 바라다보며 정한 가장 유리한 입장’이란 바로 이러한 의미다.

대중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판단하지 않는다. 정의가 무엇인지는 규범과 관습이 분명히 일러주기 때문에 대중은 거스르지 않고 따르기만 하면 된다. 규범에 반했으니 규범에 따라 처벌한다. 이것이 키자루의 정의의 원칙이다. 
 
규범이 정의로운지에 대해서는 사회와 대중이 이미 합의한 사항이므로 개인은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견해다. 베가펑크와 센토마루에 대한 우정과 인의보다도 세계정부가 정한 규범을 따르는 것이 키자루에게는 더 생존에 유리한 가치다. 
 
정의에 대한 무관심은 정의가 아니라 불의다. 인격이 없는 인간병기 파시피스타가 해군 대장의 지위를 보전하기 위해 주관과 감정을 스스로 거세한 키자루의 능력을 이식받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우선 헤아려야 하는 것은 적의 숫자보다…

지켜야 할 사람의 수가 아닙니까……?”


인의는 인(어짊)과 의(의로움)를 합친 말로써 유교 사상가인 맹자가 주장한 개념이다. 인간다움을 바탕으로 권력자는 백성을 위해야 하고(인), 인간답지 못한 권력자라면 백성은 저항해야 한다(의)는 것이 인의의 핵심 사상이다. 
 
작중 후지토라가 드레스로자에서 언제나 시민들의 안전을 우선시했던 모습과 도플라밍고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에 공감하고 세계정부를 일갈했던 모습 등에서 그의 인의 있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인의의 미덕 중 또 한 가지는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다. 이는 후지토라가 칠무해라는 이유로 도플라밍고의 폭정을 방임한 것에 대해 드레스로자 국민들에게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반대로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을 맹자는 악으로 보았는데 드레스로자 국민들에 복배 사죄한 본인을 꾸짖던 아카이누에게 대들었던 이유도 아카이누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해군의 체면이 떨어진다며 이익의 관점으로만 사태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인의란 곧 인간다움이다. 인간다움이란 인간의 의미를 아는 것이고 인간을 위하는 것이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권리를 짓밟는 케케묵은 원칙보다 고귀한 인간 한 명 한 명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후지토라의 인의 있는 정의다.

“인류는 '아래'를 만들며 살아왔다!!

너희 비가맹국을 깔보는 것으로!!

다들 살아갈 수 있는 거라고!!!

'차별'이란 안도감이다!!!”


해군 대장 중 가장 마지막으로 등장한 료쿠규의 정의관은 ‘필사적인 정의’다. 죽을 힘을 다하는 것 즉 최선을 다하는 것이 그가 정의를 대하는 태도라는 뜻인데 그가 필사적인 이유는 과연 무엇 때문일까.

천룡인을 신이라 부르고 차별을 안도감이라 표현하며 사람 간의 위계를 나누는 점, 그리고 세계정부의 비가맹국엔 인권이 없다며 법의 제도권 밖에 놓인 와노쿠니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자비했던 점을 미루어, 료쿠규의 정의관은 신분 사회를 인정하고 제도적 차원의 도덕을 강조했던 순자의 사상을 본딴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로 료쿠규 정의관의 모티브로 추정되는 순자는 후지토라 정의관의 모티브인 맹자와 각각 성악설과 성선설을 믿었던 사상가로 자주 비교된다.

명백히 악으로 그려지는 천룡인을 료쿠규가 신으로 인정하는 모습과 해적이지만 카이도의 사황으로서의 억지력을 인정했던 모습을 통해서도 일단 군주의 지위와 영향력을 인정하고 군주를 성군으로 만들어야 국가와 규범이 바로 설 수 있다고 믿었던 순자의 사상을 떠올려볼 수 있으며, 아카이누의 철저한 스타일을 좋아하는 점도 때에 따라서는 힘에 의한 패도 정치를 인정한 순자의 가치관을 쏙 빼닮았다.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믿었던 순자는 군주든 백성이든 각자 신분에 맞는 예의를 갖추고 선해지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인간의 악한 본성을 교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순자는 악한 인간도 갱생될 수 있다 믿고 개인의 노력을 특히 강조하는 인물이었는데, 료쿠규 또한 정의로운 인간이 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하여야 한다는 가치관을 가진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주어진 신분에 따라 그에 맞는 질서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순자는 료쿠규와 후지토라가 실력으로 해군 대장에 오른 것처럼 실력에 의한 신분 상승을 긍정한다. 
 
료쿠규의 정의관이 ‘필사적‘이고 그의 모티브인 순자가 성악설을 믿었던 점을 생각하면 료쿠규 또한 과거에 노예 또는 그에 준하는 불우한 배경을 가졌거나 혹은 잔혹한 악인이었을 것으로 예상되며, 필사적인 노력을 통해 신분 혹은 본성을 극복하고 지금의 해군 대장의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닐까 하는 짐작도 해볼 수 있다.

“정의는 가치관….

세대를 넘지는 못하지요.”


센고쿠는 원수 시절 ‘군림하는 정의’를 정의관으로 내세웠다. 그는 기본적으로 정의를 관철하려면 절대적인 세력을 바탕으로 세계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센고쿠는 그의 능력인 부처님처럼 그릇이 넓은 성인의 면모를 가지고 있다. 다른 장성들처럼 어느 한 가지의 정의관만을 고집하지 않으며, 심지어 그들의 모든 정의관을 적절히 수용하고 있어 가장 이상적인 정의관을 가진 것으로 비추어진다.

수동적 정의관인 키자루의 애매하게 가는 정의는 논외로 하고, 절대적 정의를 외치는 모습에서 아카이누의 철저한 정의를, 세계정부가 임펠 다운 레벨 6 수인들의 탈옥 사실을 은폐하려 할 때 격분했던 모습에서 아오키지의 한껏 해이해진 정의를, 정의를 인의라는 단어로 수식하는 모습에서는 후지토라의 인의 있는 정의를, 해군본부라는 거대 조직의 정점까지 올라선 모습에서 료쿠규의 필사적인 정의를, 로에게 ‘너는 자유롭게 살면 된다’고 말한 모습에서 자유를 추구하고 미래지향적인 삶을 목적으로 삼을 것을 강조하는 가프의 가치관을 발견할 수 있다.

여타 장성들이 어떤 정의가 가장 정의로운가를 고민할 때 센고쿠는 정의란 세대를 따르고 그 본질은 개인의 가치관의 영역으로써 주관적인 것임을 주장한다. 한편, 센고쿠가 자신의 후임 해군 원수로 아오키지를 추천한 이유는 센고쿠도 아오키지처럼 세계정부의 정의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인물이 아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자유를 추구하고 세계정부의 정의를 경계하는 아오키지가 직접 해군을 통솔하여 세계정부의 독재를 견제하고 차단한다면, 세계정부가 지금처럼 해군력을 함부로 행사할 수는 없을 것을 기대해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센고쿠의 기대와 달리 아오키지는 원수가 되기는 커녕 해군에서 은퇴를 해버리는 것도 모자라 세계 최악의 해적단에 들어가 세계를 위협하지만 말이다.

“난 나야... 스모커.”

쿠잔 정도 되는 대장급 해병이 직업인 인간에게 정의란 곧 정체성이다. 사명, 신념, 도덕, 가치, 의지, 격률 등 개인의 모든 사상이 정의를 향한다. 최소 20년이 넘는 세월을 정의로움에 대해 고뇌한 대장급 해병이 저마다의 정의관을 내세우는 건 그런 까닭이다.

쿠잔은 해적이 됨으로써 정의라는 그간 본인의 정체성을 버렸다. 이제 그는 그를 속박하던 정의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다. 더이상 그에겐 한껏 해이해질 정의가 없다. 
 
그가 일평생 켜켜이 쌓아왔던 지위와 사명을 모두 내려놓는다는 것은 사회적 사망 선고나 마찬가지다. 정의를 내려놓자 자유가 찾아왔지만,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세상에 혼란을 야기하는 해적의 편에 서서 동경하던 스승을 제압한 그에게서 정의로움을 찾아볼 수 있는가 하면 그 대답은 쉽게 긍정되지 않는다.

비로소 자유로워진 듯한 쿠잔에게서 우리가 찝찝함을 느끼는 이유는 그의 행동 이념이 자유가 아니라 방임이기 때문이다. 방임은 분명 자유와 궤를 같이하는 측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자유와 혼동되어선 안 된다. 
 
자유와 방임 모두 개인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관점은 공유하지만 자유란 나의 자유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자유까지 포괄하는 관념인 반면, 방임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자유까지 침해할 수 있는 관념으로써 자유보단 지배에 더 가까운 개념이다.

쿠잔이 망설였던 이유 또한 옛 스승에 대한 인정 때문만은 아니다. 이제는 지켜야 할 올바름이란 가치가 없는 상태에서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한때 자신이 동경했던 올바름을 꺾어야만 하는 상황으로부터 한껏 해이해짐을 느꼈기 때문이다.

세계의 비밀을 파헤치던 오하라 유일의 생존자를 방생한 장본인이 세계의 비밀에 무관심할 리 없다. 전우였던 사우로와 같은 D의 일족이자, 원피스에 가장 빠른 속도로 접근하고 있는 검은 수염과 손을 잡은 쿠잔은 이미 세계의 비밀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세계정부가 숨기려 하는 역사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정의보다 우선시 다뤄지는 것인지 그 진실을 확인할 필요성이 쿠잔에게는 분명히 있다.

“'지금을 살아라'라고 가르쳤을 텐데!!!”

도플라밍고는 기록된 역사만이 살아남는다며 정의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승자만이 정의라고 말했지만, 가프는 '정의는 이긴다'고 분명히 못박았다. 물론 여기서 가프가 지칭하는 정의란 세계정부나 해군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가프에게 정의는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은 결국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게 된다.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해적들이 활개치는 대해적시대에도, 세계정부의 흑막이 사실은 지옥이더라도, 도플라밍고처럼 세계의 파멸만을 바라는 절대악이 분명히 존재하더라도 대부분의 인간이 정의를 좇는다는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세계정부의 정의에 반감을 느끼는 이유는 그들의 정의가 시민들의 자유를 억압하기 때문이다. 정의의 부재는 곧 자유의 부재다. 정의에 기초하여 세워질 공동체의 규범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물론, 나아가 개인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 기능해야 한다.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에게 정의란 필수불가결한 가치다. 인간이 행하는 모든 의지는 자유를 위한 발걸음이다. 즉 인간이 살아가는 한 자유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자유의 주체를 개인에서 공동체로 확장하면 자유는 결국 세계에 공정성을 요구하게 된다. 
 
정의는 자유를 뒤따라다니는 그림자다. 공동체의 규범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다면 그 규범조차도 불의다. 정의란 불의에 맞서싸우는 것이므로 인간은 자유를 위한 싸움을 계속하여야 한다. 고로 정의의 주요한 속성은 자유를 위한 투쟁인 셈이다.

원피스에서 꿈을 꾸는 해적은 정의를 좇지 않는다. 해적은 오직 자유를 좇는다. 루피에게 인간의 목적은 정의가 아니라 자유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는 정의를 좇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루피의 여정에서 쭉 봐왔듯이 루피처럼 자유를 좇다 보면 그 결과가 정의와 맞물리는 경우도 있다. 자유와 정의는 해적과 해군처럼 서로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관계인 것이다.

작중 루피의 모든 모험은 자유해방의 역사다. 지금까지 루피가 모험했던 모든 섬에서 자유로운 세계를 꿈꿨지만, 그 누구도 입에 정의를 담지 않았다. 아무리봐도 정의로운 루피가 정의의 군대와 대립하는 해적인 이유와 루피가 영웅이라 불리는 것을 극도로 거부하는 이유 또한 자명하다. 
 
작가는 원피스를 통해 정의에 대한 고찰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는 아마도 모든 사람이 자유로운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작가는 원피스를 통해 끊임없이 ‘자유롭게 살아가라’고 이야기한다. 정의를 좇는 것 이상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인간으로서 추구해야 할 중요한 목표라고 외치고 있다.

자유란 선택할 수 있는 권리다. 물론 자유롭게 산다고 해서 선택의 결과를 보장받을 순 없다. 그러나 삶이란 선택의 연속이지 결과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삶의 끝은 성공과 실패로 나눌 수 있겠지만, 삶 그 자체는 성공이나 실패보다 훨씬 가치있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실수와 잘못을 저지르는가. 중요한 것은 내 삶이 남아있는 한 그 실수들을 딛고 더 나은 선택을 하며 나아가는 것이다. 루피의 적으로 등장했던 인물들이 시간이 흘러 삶의 의미를 깨닫고 루피의 조력자로 재등장하는 것은 이러한 작가의 사상이 고스란히 반영된 장치다.

공정이나 평등과 같은 정의의 가치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지 내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원피스 세계를 볼 것도 없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불공정과 불평등과 불합리는 어디에나 만연해있다. 
 
대중이 말하는 옳고 그름이라는 것도 삶의 어느 부분만을 잘라 단면을 보고서 그 삶의 전부를 제단하려는 습성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세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올바른 결정'에만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토록 자유를 추구하는 가프가 자유만큼 강조하던 것이 바로 삶이다. '시대가 그렇다, 상황이 그렇다'는 이유로 싸움을 포기하고 변화를 거부하며 스스로 선택하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된 삶이라면, 그것은 사실 삶보다 죽음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 인간이 자유를 좇는 한 정의를 위한 투쟁은 정의를 쟁취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므로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 그리고 그 투쟁은 모두 자유롭게 살아가는 인간이 스스로 선택한 길이다. 
 
패배하고 패배하고 또 패배하더라도 인간은 정의를 택한다. 패배의 역사는 투쟁의 흔적이며, 투쟁은 자유로운 삶을 위해서라면 죽음을 각오할 만큼 인간이 자유를 갈망한다는 증거다. 
 
반대로 정의가 패배할 때는 인간이 자유롭게 살기를 포기할 때이다. 탐욕스러운 권력자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승자만이 정의’라는 말은 오싹하게 들리지만, 인간은 자유를 위해 승리할 때까지 멈추지 않고 투쟁하므로 언젠가 반드시 정의는 세워진다.

세대를 거듭할수록 인간은 더욱 자유로운 시대에서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원피스는 이토록 자유로운 시대에서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롭게 살고 있는가? 당신은 당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한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이므로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 할 수 있겠다. 
 
그런데 현실을 둘러보면 꿈을 꾸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혹시 나도 그들처첨 꿈을 꾸지 않고 상황을 살펴가며 기회만 노리지는 않는가? 분수에 맞는 삶이라며 위안을 삼고 스스로의 인생을 선택할 권리를 거세하진 않았는가? 혹시 꿈과 정의를 혼동하고 있지는 않는가? 
 
누군가의 기대들이 모여 체계화된 올바름만을 좇으며 사는 것이 정녕 내가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보다 중요한가? 내가 자유로운 인생을 사는 것만으로도 정의에 한 발자국 다가갈 수 있다는 진실을 알게 되더라도 지금처럼 살 텐가? 이제는 당신이 대답할 차례다. 당신은 올곧은 정의의 노예인가 아니면 자유로운 내 삶의 주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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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원피스+철학+문학이 만나니 이런 예술작품이 탄생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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