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년간 중국에 끌려가 성노리개가 되었던 조선 처녀들

수백년간 중국에 끌려가 성노리개가 되었던 조선 처녀들

G 까꿍 0 3,011 2021.04.27 17:13

● 위안부는 아무것도 아니였다! 강대국에 헌납된 약소국의 여인들 : 공녀


동아시아의 조공무역에 있어 진상된 공물에는 

간혹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거세한 환관, 처녀들이 

대표적인 공물로 취급되었던 사람들이다.

 

img.jpg

 

▲ 공녀들은 가마를 타거나 말을 타고 갔었다.


특히 공납된 처녀들을 

'공녀'라고 했는데

 

최초의 공녀에 대한 기록은 기원전 200년경 

중국 한나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초나라의 항우를 무너트리고 

중원 대륙을 통일한 한나라의 유방(한고조)

 

북방의 흉노족만큼은 

감당해낼 수가 없었으니,


img.jpg

 

▲ 흉노족 기병


흉노족과의 전쟁에서 패한 한나라는 

굴욕적인 강화를 하게되는데

 

매년 술과 비단과 함께 

공주를 보내기로 약속한 것이다.


이때 한나라에서 

흉노로 보내지는 공주는

 

'평화의 화신'쯤으로 여겨

중국에서는 화번공주(和番公主)라 불렀다.


이때 흉노로 바쳐졌던 인물 중에는 

중국 역사상 4대 미녀(왕소군, 서시, 초선, 양귀비) 중 하나이자

 

한나라 원제의 후궁이었던 

'왕소군'도 있었다.


그녀는 이역만리로 떠난 

슬픈 심정을 시로 남겼는데

img.jpg

 

▲ 흉노왕의 첩이 된 왕소군


img.jpg

 

"오랑캐 땅에는 꽃이 없으니 

봄이 왔으나 봄 같지가 않구나" 

 

라는 문구는 

아직도 길이 회고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공녀의 역사는 길다.

 

최초의 기록은 5세기 초, 

고구려 장수왕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선비족이 세운 나라 북위로 공녀를 보내게 되는데

이때 신라도 북위에 공녀를 보낸다.


그러다가 공녀를 본격적으로 보내게되는 시기는

원나라의 간섭을 받던 '고려 후기'부터다.

 

img.jpg

 

▲ 드라마에서는 공녀를 흔히 이렇게 표현하는데,

공녀(스스로 바치는 것)의 모습은 사실 이렇지 않았다.


이후 조선시대 들어와서는 

명나라, 청나라의 요구가 있을 때마다, 번번히 공녀를 바치곤 했다.



●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공녀 기록 : 어느 정도로 공녀를 보냈나?


고려시대 : 80년동안 약 2천여명이 공녀로 보내져


1274년 원나라에서는 

귀순한 남송 군사들을 장가 보내준다는 구실로,

 

고려에 140여명의 부녀자를 요구했다.

img.jpg

▲ 드라마에서는 자꾸 이런 모습으로 나오는데

이것은 공녀가 아닌 포로의 모습이다. 병자호란 때 이미지가 컸던 탓일까?


이에 고려에서는 '결혼도감'이라는 

임시 기구를 설치하고

 

민가를 샅샅이 뒤져 

그 숫자를 채웠다.

 

이때 잡혀온 여인들은 과부, 역적의 처, 승려의 딸 등

대부분 천대받는 여인들이 많았다.

 

당시 어찌나 완강히 거부하며 울었던지

하늘이 흔들릴 정도였다고 한다. 

img.jpg

 

그 뒤로 고려는 원나라의 요청이 있을 때마다 

공녀를 헌납하게 된다.

 

이때 여자들의 나이는 

대게 11~18세의 어린 처녀들이었고

 

여기에는 기황후와 같은 

권문세족의 규수들도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img.jpg

 

 

고려사에 보면 1275년부터 1354년까지 

근 80년 동안 44차례 있었다.

 

한번에 50명을 보낸 적도 있었으나

보통은 1회에 3~4명씩 보내졌으며 총 170명이 보내졌다.

img.jpg

 

하지만 이것은 공식적인 기록일 뿐,

원나라 고관들은 사적으로도 고려 여자들을 데려갔으니,

 

그 숫자를 모두 합하면 

실제 수는 2천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서울대 이숙인 교수 논문)

img.jpg

▲ 고려의 여인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드라마에서는 마치 노예로 팔려가듯 

수십명, 수백명 무리지어 끌려가는 모습이 보이는데


사실 공녀는 한번에 

3~4명 정도가 보내는게 관례였고

 

걸어가는게 아니라 

가마나 수레를 태워서 보냈다. 



조선시대 : 총 9차례 수백명이 공녀로 보내져


조선시대 때는 태종~세종 시기에 

공녀의 요구가 집중된다.


이는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명나라와 요동 영토 문제로 마찰을 일으켰던 터라

 

이후 명나라는 조선에 

무력을 과시한다는 생각으로

 

무리한 요구들을 

자주 해왔기 때문이다. 


그러기도 했지만, 당시 황제였던 영락제와 선덕제가

조선 여인들을 좋아했던 개인적 취향도 한몫했다.

img.jpg

 


때문에 태종과 세종 때에만 20여년 동안 

총 7차례 걸쳐 114명의 공녀를 보내야만 했으니,

 

이때 중국이 요구하는 

여자들의 용도는 다양하여

 

처녀 16명, 무수리 48명, 집찬녀(음식 만드는 여자) 42명, 

무녀(무용수) 8명 등이 있었다.


여기서 처녀들은 궁녀와 황실 가족의 

처첩이 될 몸이었으므로

 

기본적으로 미모가 출중해야만 했다.

(반면에 명나라 출신 궁녀는 선발시 미인은 뽑지 않은 것이 관례였다.)

img.jpg

 


하지만 1433년 이후 약 80년간 

명나라는 공녀를 요구하는 일이 없다가,

 

img.png

 

"아마도 이 시기 황제들이 

외국 출신 후궁을 싫어했기 때문인듯."


1521년(중종 16년)에 

다시 공녀를 진상하라는 통보가 왔다.


하지만 이때 조선은 

중국이 요구하는 숫자만큼 준비해 두었지만

 

명나라 황제 정덕제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공녀를 보지 않아도 됐다.

 

img.jpg

 정덕제 

"내가 그만 뱃놀이 하다가

물에 빠져 익사해버린다능."


이후 200여년 동안 

공녀에 대한 요구는 쭈~욱 없다가

 

1638년 청나라로 정권이 바뀐 후 

갑작스레 공녀를 요구하게 되고,

 

또 1650년(효종 원년)에도 

공녀 송출이 있어서


청나라의 건국 초기인 이 당시에만

2차례에 걸쳐 총 32명의 공녀가 청나라로 떠나게 된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공식적으로 공녀로 보내진 수는 

총 146여명 정도였다.

 

img.jpg

 

하지만 조선시대에도 역시 

사적으로 챙겨가던 공녀들이 있었으니,

 

중국 사신들은 

황제에게 바치는 공녀라고 속여

 

수십 명씩의 공녀를 챙겨가서 

상관들에게 바치기도 했던 것이다.



● 조선을 공포로 몰아넣은 '공녀 사냥'


공녀를 구하는 사신이 

압록강을 건너면 

 

나라에서는 재빨리 공녀를 선발할 임시기구를 설치하고

각 도에 할당량을 배정했다.

 

고려 때의 기구로는 '결혼도감', 

조선시대에는 '진헌색' 등이 있었다.

img.jpg



또 전국에 혼인금지령을 내리고

공녀 선발을 담당할 관직을 개설했다.

 

하지만 백성들은 공녀를 

자식을 사지로 내모는 것이라 생각했다.

 

때문에 중국 사신이 올 때마다 백성들은

공녀 사냥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 떨어야만 했으니,

 

사람들은 딸을 숨기거나 

머리를 깎아 중이 되게 하거나

 

혹은 10살도 안된 어린 딸을 혼인시키는 편법으로

공녀사냥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이중 1408년에 실시된 공녀 선발은 

온 나라를 두 달 간이나 

 

공포와 불안의 도가니로 만들었으니,

당시의 상황은 이러했다.

 

전국적으로 한바탕 

소란을 치르고 

 

각 도에서 총 30여명의 처녀를 뽑아 

한양으로 이송시켰는데,

img.jpg



이때 뽑힌 공녀 후보자들은 

의정부에서 재심을 거쳐,

 

부모 3년상을 당하거나 무남독녀인 경우 등은 제외하여 

최종 7명으로 압축시켰다.


그렇게 선발된 7명은 

경복궁에서 최종심사를 봤는데

 

이게 웬걸! 7명의 처녀들은 모두 

몸에 이상이라도 있는양 행동하면서

 

서로 뽑히지 않으려고 

저마다 애를 쓰고 있었다.


더욱이 명나라 사신은

이렇게 불평하면서 퇴짜를 놓고 말았다.


img.jpg

 명나라 사신

"왜 다들 이리도 못생겼냐해."


이에 태종은 화가나서, 처녀들의 아버지들을 

전부 파직시키거나 귀양을 보내 버렸다.

 

img.jpg

 태종

"자식 교육을 어떻게들 했길래 

이 모양이냐!"


이런 말을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다시 전국을 대상으로 

처녀를 뽑았는데

 

이번에는 철철히 찾아냈기 때문에

수령, 향리들의 자식이라도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모든 백성의 집을 이 잡듯이 수색하여

미모가 출중한 모든 처녀들을 가려내게 했는데,

img.jpg


만약 처녀를 숨기거나 

침을 뜨고 약을 붙이는 등 

 

흉하게 보이도록 꾀를 쓰는 자가 있다면 

엄벌에 처하고 가산을 몰수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그걸 빌미로 

당시 국왕의 명을 받은 관리들은

 

양민들의 재산을 빼앗는 일까지

일삼고 있었다.

img.jpg



그리고 그 피해는 임금에게까지 보고되었는데

상소된 내용은 이러했다. (태종실록)


img.jpg

"지금 나라에서는 처녀를 숨긴 자를 찾아내어 

재산을 몰수 하고 있습니다."

 

img.jpg

"특히 해당 관리들이 부녀자들을 잡아가두고 매질을 하니

마을 사람들의 원통이 크옵니다." 



● '공녀 사냥'과 사회적 폐단


국가가 강력하게 나오면 나올수록 

딸을 빼앗가지 않으려는 

 

백성들의 잔꾀는 진화되어 갔는데

세종 때는 이에 맞서 '신고제'를 개발하게 된다.


딸을 가진 전현직 관리들에게 

모두 자진 신고하도록 했으며,

 

또 숨기거나 알리지 않는 자가 있으면 

다른 사람이 신고하도록 하여

 

적발 시 재산을 몰수하여, 

신고한 자에게 주도록 했다.

 

때문에 이러한 법령은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간 불신을 만들게 하여 공포 사회를 조성하게 했다.

img.jpg


 

이 가운데는 평소 원한관계에 있던 사람이 

복수할 기회로 삼아 

 

딸이 없음에도 

딸이 있다고 신고하는 일도 벌어졌던 것이다.


우리는 흔히 성군의 치세요, 

태평성대로만 기억하고 있는

 

세종대왕 시기에 이렇듯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img.jpg



또 혼인금지령을 어기고 혼인하는 자들, 

딸을 숨기는 자들이 있을 경우

 

그들이 속한 지역의 수령까지 

처벌을 면치 못하도록 했다.

 

한편 세종 때로부터 

200년이 지난 효종 때는 

 

공녀로 뽑혀 서울로 호송되던 한 처녀가 

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른 일이 있었는데,

 

이때 나라에서는  

처녀의 고을 현감과 

 

호송 관원들 모두를 

엄한 형벌로 다스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반 사례들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경상도의 정황이라는 자는 

딸이 공녀 후보자로 뽑혀 한양으로 올라가게 되자

 

가는 도중에 딸의 얼굴에 약을 발라 

얼굴을 상하게 하였으니,

img.jpg


 

이때 정황은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딸을 호송해 갔던 최응벽이라는 관리가 

 

자기 딸을 강간하려다가 

상처를 입힌 것이라고 거짓을 꾸몄다.

 

이에 조정에서는 

최응벽에게 사형을 내렸으니,

 

그러자 최응벽의 아들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정황을 칼로 찔러 살해하게 된다.

img.jpg



공녀 착출이 얼마나 국가적으로 폐단과 피해가

많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다만 공녀로 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누구보다 임금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중종은 이렇게도 말했었다.


img.jpg

 중종

"부득이하게 뽑고는 있으나, 

당사자들은 이 얼마나 원통스러울꼬.."


img.jpg

 중종

"혹시 선발된 처녀들 중에 

자살하는 일이나 생기지나 않을까 걱정된다."

 


● 통곡의 이별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선발된 공녀들은

곧 떠날 채비를 했다.


이들은 떠나기 전, 

왕과 왕비가 차린 전송식에 불려가 위로도 받았는데..


이때 여인들은 차린 음식에는 입도 대지 않았고

죄다 슬피 울기만 할 뿐이었다고 전한다.


또 함께 자리를 한 

처녀들의 부모들도 덩달아 울었으니

 

그 통곡의 소리가 

궁궐을 가득히 매웠다고 한다.

img.jpg



이후 처녀들은 근정전에 비치된 가마에 올라탔는데

각 가마에는 2명씩 들어갔고, 

 

사신이 직접 자물쇠로 채웠다.

그외의 나머지 공녀(무수리 등)들은 모두 말을 탔다.


그리고 공녀들이 출발할 때에는

왕과 왕비까지 직접 모화관까지 나와서 전송을 하였는데,

img.jpg


▲ 모화관


이때도 공녀들의 부모와 친척들, 그리고 구경꾼들의 울음소리로

온통 울음 바다가가 되었다고 한다.

img.jpg


 

이렇듯 눈물의 환송식을 뒤로 한채 

공녀들은 한양을 출발해서,

 

개성→평양→안주→의주→요동→북경까지 

꼬박 두 달이 걸리는 머나먼 여정을 떠나게 되는데,

img.jpg


 

이들은 임시로 지은 

각 참의 숙소에서 잠을 이뤘고

 

가는 도중에 호송하는 환관들의 희롱에 

수모를 당하는 것은 예사였고

 

겨울이라면 매서운 만주 벌판의 추위 속에서 

여름이라면 무더위로 병을 얻기도 일쑤였다.


 

● 이역만리에서의 삶


1408년 최종 선발된 5명의 처녀들은 

북경에서 황제를 직접 알현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영락제의 후궁이 되었다.

 

이 중 권씨는 뛰어난 미모와 

훌륭한 옥퉁소 실력으로 

 

영락제의 총애를 한몸에 받아 

현인비에 봉해졌고

 

나머니 4명의 처녀도 

각각 순비, 소의 등에 봉해졌다.

img.jpg


▲ 옥퉁소

 

한편 조선 여인의 맛에 흠뻑 빠진 영락제는 

또 다른 조선 여인을 원했고

(당시 명나라 궁녀들은 미모가 형편 없었다. 미인을 애써 뽑지 않았기 때문에)

img.jpg


이런 까닭에 1410년에는 명나라 사신이 

정윤후의 딸 정 씨를 데리고 북경에 도착했는데,

 

이때 부친인 정윤후와 

공녀로 바쳐질 무수리 4명도 동행했다.


그리고 정씨는 

곧 영락제의 총애를 받았다.

 

때문에 1419년 정윤후가 세상을 떠날 때

부친 정씨의 영전에 황제와 황비가 직접 제문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황제의 총애를 받으며 

그럭저럭 잘 살 것만 같았던, 

 

조선 후궁들에게

뜻하지 않았던 변고가 닥치게 된다.


바로 옥퉁소를 잘 불어 

명나라 미인들 사이에 퉁소 바람을 일으켰던

 

현인비 권씨가 

1410년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img.jpg



사망의 원인은 독살이었다. 

황제의 총애를 받던 권씨를 누군가 시샘을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엉뚱하게도 사건은 

함께 공녀로 간 조선 출신 후궁의 소행으로 꾸며지게 되었으니,


여씨는 불에 달군 쇠젓가락으로 생살을 지지는 모진 고문을 

무려 한달 동안이나 받으면서 결국 죽게 된다.

img.jpg


 

하지만 여씨의 독살설은 무고임이 밝혀졌는데

이번에는 다른 조선 출신 후궁들에게 

 

죄가 있을 것이라는 모함 때문에

다른 두명도 처형 되기에 이른다.


결국 1408년 공녀로 간 후궁 5명 중 

4명이나 사망한 것이었다.

 

이때 이들의 여종이었던 

조선 출신 공녀들도 거의 몰살 당하고 만다.

(중국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어려의 난'이라고 부른다.)


다만 공녀 한씨만은 

독살 사건과는 무관하다고 하여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이후 영락제의 여비로 봉해지게 된다.


하지만 한씨 역시 1428년 영락제가 사망하자 

함께 순장되고 만다.

img.jpg




● 순장 당했던, 조선 출신 후궁


황제의 눈에 들어 비빈에 봉해졌을 경우

조선에 사는 그 가족들과 왕래가 가능했지만 


그렇지 않은 대다수의 공녀들은

평생 부모를 만날 수가 없었다.

 

어쩌다 인편이 닿아 

조선의 부모와 형제들에게 서신을 보내게 되면

 

대략 구구절절한 사연과 함께

깎은 머리털이 동봉되어 있었으니,

img.jpg



가족들은 이를 보고 눈물 흘리니

당시 기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평생토록 만나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머리털뿐이다' (세종실록)


특히 명나라 초기까지만 해도 

황제가 죽을 때면

 

황제의 자식을 낳지 못한 후궁들을 모두 

황제와 함께 순장을 시켰는데

(원래 몽골의 풍습인데, 15세기 중엽 정통제가 순장을 폐지시킨 것이다)


이때 순장을 하게 되는 후궁들은 

스스로 목을 매야했다.

img.jpg



영락제의 여비에 봉해진 한씨의 경우

황제의 자식을 낳지 못했기 때문에 

 

역시 목을 매야했는데,

죽기 전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img.jpg

 여비 한씨

"제발 저를 조선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가서 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싶습니다"


img.jpg

 

"그건 아니된다."


img.jpg

 여비 한씨

"그렇다면 저와 함께 온 조선 출신 시종들을 

조선 땅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img.jpg

 

"불쌍하니, 그건 해주마."


그래서 여비 한씨는 

목을 매어 순장을 당하고

 

그녀와 명나라로 온 무수리 + 집찬녀 + 무녀 등 총 53명은 

1435년 다시 조선으로 돌려보내지게 된다.


한편 죽은 여비 한씨의 친 여동생도 

곧 선덕제의 후궁으로 명나라로 오게 되는데


여기에는 오빠 한확의 야심이 있었다.

(한확은 인수대비의 아버지이자, 수양대군 세조의 사돈이다.)

img.jpg

 한확


그는 여동생 여비 한씨 때문에 

명나라에서 관직도 받게됐고

 

그에 따라 조선에서 

나름 권세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여동생이 죽자 이번에는

또 다른 여동생을 이용해 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 때문인지 

이런 일화도 있다.


어느날 여동생이 병이 나자 한확은 약을 주었는데

여동생은 이러면서 울부짖었다 한다.


img.jpg

 공신부인 한씨

"동생 한 명 팔아 

부귀영화를 누렸으면 됐지.."

 

img.jpg

 공신부인 한씨

"남아있는 동생마저 팔려고 

지금 이렇게 약을 주는건가요?"


하지만 동생 한씨는 

선덕제 사후에도 순장되지 않았고,

(아마도 이미 언니가 순장되었기 때문에 배려한 듯 함)


이후 3명의 황제를 더 맞이하면서 

7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죽었을 때 

명나라 황제는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


그녀를 공신부인 한씨라고도 하는데,

그녀는 고려시대 기황후 이후로 

 

나름 성공적인 

공녀 인생을 살았던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 공녀의 희생을 통해, 공녀의 가족들은 호의호식


사실 조선 초기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딸이나 누이가 공녀로 끌려가는 것을 

완강히 반대했지만


일부에서는 딸이나 누이를 통해 

출세를 꿈꾸는 자들도 있었다.


비록 의도했던 것은 아닐지라도

딸이나 누이가 공녀가 되면 

 

나라에서는 나머지 가족에게 

관직과 재물을 주며 위로했다.

img.jpg


 

그러다 공녀가 황제의 후궁이 되어 

황제 권력 내에 있을 경우라면

 

고려나 조선의 조정에서는 

그들의 아버지, 오빠, 친족들은 

 

황친이라고 하여

매우 극진하게 예우해야만 했던 것이다.


고려 기황후 시절, 기철 형제가 그랬고

조선 공신부인 시절, 한확이 그러했다.

img.jpg



재차 말해보지만 조선시대에서는

1417년, 1428년 두 차례에 걸쳐 

 

누이 동생 둘을 공녀로 보낸

'한확'이야말로 누이 팔아서 출세한 대표적 사례라 하겠다.

img.jpg

 한확

 

img.png

 

"그렇다고 한확이 나쁜 사람만은 아니다." 

 

img.png

"도량이 넓고 온순한 성품으로 

당대 선망이 높았던 인물이었다."


한확은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에도 

직접 가담하여,

 

이후 우의정과 좌의정 등 

요직을 두루 거치게 되고

 

그의 딸들은 왕자들과 혼인하는 등 

최고의 권세를 누리게 된다.


한확과 한명회 등 청주 한씨 가문이 

조선 전기 최고 명문으로 자리를 굳힐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한씨 자매의 희생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img.jpg



그런가 하면 한확의 딸 인수대비와 공신부인 한씨는

서로 자주 편지 연락을 하며

 

각종 문물을 교환하는 등 

서로의 권력 유지에 힘을 보태는 사이였다.

 


● 조선을 삥뜯어 먹기도 했던, 공녀 출신 후궁들

 

한편 공녀 출신 후궁들은 

그녀들을 버린 조국을 여러모로 활용하였다.


고려시대 기황후도 그랬지만

조국은 그녀들의 정치적 버팀목이자, 만만한 후원자였던 것이다.

img.jpg



먼저 조선 출신 후궁들은 

그녀들의 가족에게 진귀한 재물 등을 나눠줬고


이를 통해서 공녀의 가족은 

조선에서 정치 세력을 다져나갈 수 있었다.


예를 들면 한확은 그

녀의 누이에게서 받은 

 

금, 은, 고급 비단, 말 등을 궁중에 바쳐 

자신의 입지를 높여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img.jpg

 한확

"에헴.."

 

한편 조정에서도 공녀들의 가족을 

외교에 적극 활용하였으니,

 

세종은 한확 등을 북경에 보내 

금, 은의 공물을 면제해줄 것을 요청하곤 했었다.

 

물론 공녀 출신 후궁들도 

바라는게 있었으니,

 

종종 무리한 공물을 요구해서 

조선 조정을 당황시키기도 했었는데

 

이는 후궁 본인들도 중국 내에서의 입지 강화를 위해

공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특히 공신부인 한씨가 그러했는데

성종 시기 조정에서는 

 

한씨에게 보낼 물목에 대한 논의가 

유독 많이 나온다.

 

img.jpg

 공신부인 한씨

 

한씨가 구하는 물건을 

넉넉히 마련해야 한다던지

 

중국에서 돌아온 사신에게, 물건을 받은 한씨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묻는 등 여러모로 신경을 썼던 것이다.


하지만 한씨에게 

보내는 공물이 점점 과해지고

 

요구하는 물품이 점점 많아진다는 불만이 

조정 대신들 사이에 터져나오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황제의 후궁이 된 공녀들의 가족들은 

조선의 국왕도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권력을 누렸다.


예컨데 조선의 국법에서 볼 때 

명백한 범죄 행위였음에도

 

그가 만일 후궁이 된 공녀의 가족이었다면 

논죄의 대상에서 제외되곤 했다.

img.jpg

 


황제와 은밀한 만남을 가지는 

공녀의 가족들에게서

 

조선의 국왕은 

제국의 권력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공녀로 끌려간 것을 두고

마냥 서글퍼하고, 피해의식만 가지고 볼 수도 없지 않는가?

 

라고 되묻게 되지만..

 

이런 케이스는 

황제의 후궁이 되었을 때만 그렇다는 얘기고

 

대부분의 공녀들은 혈육과 생이별을 하고 

이역만리에서 산송장 같이 갇혀 지내고, 

 

성노리개로 살다가 한평생을 마감하니

기구하지 않다 할 수 없는 일이다.

Comments

유머 베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추천 비추
1875 30대 일본인이 아르바이트 구하는데 걸린 시간 댓글+1 G 덕카 2021.04.26 3459 0 0
1874 한국 군대 생일 케이크 대신 천원짜리 빵 지급 ㅋㅋㅋ 댓글+2 G 오우거돈 2021.04.26 1457 0 0
1873 미국vs소련 세기의 자강두천 대결 댓글+1 G 엔젤두환 2021.04.26 1076 0 0
1872 어느 변호사가 인생에서 가장 변호하기 힘들었던 사건 이야기 댓글+1 G 아리아 2021.04.26 1450 0 0
1871 70년 전통 중국집의 위엄 댓글+3 G 법사 2021.04.27 3115 0 0
1870 배민 진상 끝판대장 등장 댓글+2 G 깜찍 2021.04.27 2096 0 0
1869 명부에 이름 적으라는데...얻어맞는 식당 종업원들 댓글+3 G 유하 2021.04.27 1752 0 0
1868 (성형수술) 눈, 코 이마지방 이식한 여자 변화 G 고백 2021.04.27 1240 0 0
1867 배민 리뷰 100점 만점 받은 더 프리미엄 청담피자 봉명점 댓글+2 G 현실 2021.04.27 2617 0 0
1866 한국에서 신입 공무원이 정직하면 벌어지는 일 G 소환사 2021.04.27 1234 0 0
1865 예전 30대와 요즘 30대 얼굴 차이가 심하게 나는 이유 댓글+1 G 프리더빔 2022.05.01 1357 2 0
1864 일본 소금 안넣고도 짠맛을 느끼게 해주는 젓가락 댓글+1 G 썬더람쥐 2022.05.01 2311 0 0
1863 페미 때문에 군대 입대하게 생긴 10대 여자들. JPG 댓글+2 G 운수좋은날 2021.04.27 3106 0 0
1862 이제 런천미트를 스팸이라 못속인다! 스팸 인증마크 부착 정식으로 등장 G 쪼렙 2021.04.27 1535 0 0
열람중 수백년간 중국에 끌려가 성노리개가 되었던 조선 처녀들 G 까꿍 2021.04.27 3012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