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때 계란볶음밥 만들어 먹다 뒤진 마오쩌둥 아들 마오안잉

6.25때 계란볶음밥 만들어 먹다 뒤진 마오쩌둥 아들 마오안잉

G 한니발 1 2,052 2021.06.25 01:41


마오쩌둥 아들 마오안잉은 6.25 전쟁이 발발하고서 1950년 8월에는 베이징기기총창(北京机器总厂)의 당 총지부 부서기를 맡았다. 그러다가 중국 인민지원군의 파병이 결정되자 마오쩌둥은 마오안잉을 입대시키기로 한다.


이는 후계자 수업의 일환으로 참전 경력을 쌓게 하려는 의도였다.


1950년 10월 7일 밤에 마오쩌둥은 바로 다음날 선양으로 출정을 앞둔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를 초대했다.

단순한 환송회로 생각한 이 자리에서 마오쩌둥은 불쑥 마오안잉을 데려가라는 말을 꺼낸다.


펑더화이는 처음에 이를 농담인 줄 알았다.

그래서 "나는 주석의 집에 지원병을 모집하러 온 게 아니다. 주석을 모병관으로 임명한 적도 없다"며 웃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던 마오안잉이 자신이 뛰어난 인재라고 허세를 부리며 지원병 1호로 나가겠다고 진지하게 나서는 바람에 이내 대경실색했다.


행여 자신이 마오쩌둥이 가장 아끼는 맏아들을 데리고 나갔다가 사고라도 터지면 난리가 날 것을 직감하고서는 "통역이라면 몰라도 전투원으로는 절대 안 된다"고 못을 박아 사령부 통역장교로 데려가기로 한다.



그러고도 펑더화이는 불안한 마음에 밤새 잠을 못 이뤘다고 한다.

다른 공산당 고위 간부들도 마오안잉이 위험한 전선에 나가는 것을 우려하고, 마오쩌둥에게 이를 철회해달라고 했으나, 그는 "내 아들을 참전시키지 않으면 누가 전쟁터에 간단 말인가?", "그는 어쨌든 마오쩌둥의 아들이다"라고 하며 참전을 반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마오안잉은 사령관 비서 겸 러시아어 통역관 신분으로 참전하게 되었다. 마오안잉의 러시아어 실력은 확실히 뛰어나서, 그가 활동할 당시 인민지원군 각급 지휘부와 소련 군사고문단과의 의사 소통은 매우 원활했다고 한다. 


그러나 6.25 전쟁에 참전한지 약 한 달 만인 1950년 11월 25일, 북한 평안북도 동창군(현 삭주군) 대유동에서 미 공군 B-26 폭격기의 네이팜탄 폭격을 맞아 전사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만 28세였다.

중국 인민지원군은 참전 초기부터 미군의 압도적인 제공권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한반도에 진입한 이후, 미군의 정찰기와 폭격기에게 포착되지 않으려고 많은 대책을 세우고 있었다.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부도 부사령관 홍쉐즈(洪学智)가 방공 책임을 맡아 엄격한 대피규정을 마련했다. 

경험 많은 홍쉐즈는 사령부 요원 전체에게 동 트기 전에 일어나 아침식사를 다 마치고, 이후 날이 밝으면 절대 난방이나 요리를 위해 연기를 피우지 말고, 공습경보가 울리면 방공호로 신속히 대피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중국 최고 지도자의 아들로 이전부터 기고만장해 있던 마오안잉은 이런 명령을 잘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 


종종 늦잠을 자고 방공호로 대피하는 것도 설렁설렁했다. 괄괄한 성격으로 아랫사람들이 어려워하던 펑더화이 사령관을 사석에서 '라오터우(老头)'라고 거리낌없이 불러댈 정도였다.


마오안잉은 게다가 초공작전, 중일전쟁, 국공내전을 치르며 압도적인 화력을 갖춘 적들을 상대해온 고위장교들과 달리, 독소전쟁 말기에 이미 소련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해진 뒤에나 약간의 전쟁 경험을 가져본게 다였기 때문에 미군의 위력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었다.

이러던 차에 폭격 전날인 1950년 11월 24일 늦은 오후, 미 공군의 P-61 정찰기 2대가 대유동 사령부 상공에 출몰한 것이 목격되었다. 


이들이 사령부 위치를 포착했는지는 불분명했으나, 홍쉐즈는 다음날 날이 밝으면 폭격이 감행될 수 있다고 예견하고 비상 경계령을 내렸다. 


지시에 따라 사령부 요원들은 모두 새벽부터 일어나 아침밥을 챙겨 먹고 방공호로 피신했다. 

홍쉐지는 마오안잉도 이때 분명히 방공호에 들어와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오전 10시가 넘도록 폭격이 이뤄지지 않자, 전날 미군 정찰기들이 허탕을 친게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나오며 경계가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으로는 이때 마오안잉과 다른 간부들이 사령부 건물로 돌아가 기밀서류를 챙겼다고 한다. 그 사이 오전 11시 경에 미군 폭격기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네이팜탄을 투하하는 바람에 제때 대피하지 못하고 폭사했다는 이야기이다. 


이때 사령부 건물에는 마오안잉 이외에도 가오뤼신(高瑞欣), 청푸(成普)가 함께 있었는데, 청푸만 간신히 빠져나오고 마오안잉과 가오뤼신이 화염에 휩싸여 사망한다. 중국 정부는 이를 근거로 마오안잉을 최고 지도자의 아들이지만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은 전쟁 영웅이라고 대대적으로 교육하고 있다.

그날 아침 마오안잉은 침대에서 늦게 일어났고, 아침 식사도 하지 않았다. 


방공동 안에 숨어있던 마오안잉은 고개를 빼서 하늘을 보았는데 비행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때는 이미 배가 고팠다. 10시가 지난 후, 마오안잉은 가오뤼신(高瑞欣)에게 작전실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가오뤼신은 말했다. "기다려봐라. 경보가 아직 해제되지 않았지 않느냐."


마오안잉이 말한다. "겁낼 것없다. 내가 보기에 비행기는 한동안 오지 않을 것이다. 온다고 하더라도, 어디 꼭 이 곳을 명중시킬 것인가. 엣날에 국민당의 비행기가 자주 연안을 공습했지만, 부친(마오쩌둥)은 일에 바빠서 방공동에 들어가지도 못했지만 아무 일도 없지 않았는가. 부친이 보인 모범을 아들이 배우지 않으면 누가 배우겠는가?"(공공연히 규율을 어기면서 '부친'의 기치를 내걸었다. 이런 도련님은 정말 지원군 사령부 사령관의 골칫거리였을 것이다)는 말을 하면서, 마오안잉은 이미 방공동을 빠져나갔다.



마오안잉은 가오뤼신을 작전실로 데려 가서 황금볶음밥을 만들었다.

그러나 아들은 부친처럼 운이 좋지 못했다.

11시가 지나서, 미군의 B-26 폭격기 4대가 대유동 상공을 지나갔다가 바로 되돌아온다.


마오안잉이 요리하는 연기를 보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에 수십 개의 기유탄(汽油彈)을 떨어뜨리는데, 정확하게 작전실에 명중한다.


생존자인 청푸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당시 마오안잉은 난로 옆에서 먹고 있었다. 우리는 문 밖에서 비행기가 폭탄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는 빨리 도망치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마오안잉과 가오뤼신은 모두 탁자 아래로 숨어들어 폭탄을 피했다. 일찌감치 도망쳐 나왔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마오쩌둥은 아들 마오안잉의 죽음에 분노해 6.25 전쟁에서 끝까지 북한을 지원했다.


마오안잉이 이때 죽지 않았으면 마오쩌둥은 아들 마오안잉에게 권력 세습을 했을 것이고 중국의 모습은 지금과는 다소 달랐을 것이다.

Comments

G ㅇㅇ 2021.06.25 04:29
착짱죽짱 잘 뒤졌다 오늘 점심은 계란볶음밥이다
유머 베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