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등감과 피해의식에 대한 글

열등감과 피해의식에 대한 글

G 계란부자 1 692 2023.02.17 00:23

회사 후배와 대화를 나누었다.

머리가 비상한 친구다. 이 친구 업무능력은 누구나 인정한다. 그런데 이 친구 아직 집이 없다. 그간 모든 관심이 주식에 가 있던 탓이다. 업무능력과 별개로 주식투자 결과는 신통치 않다라는 것이 주변의 중론이다.

‘그 때 내 주변에서 단 한명이라도 나한테 집을 사라고 말해주었더라면’

‘내가 좋은 동네 출신이었더라면’

‘여자얘기, 스포츠 얘기만 하는 친구말고 투자 얘기하는 친구가 있었더라면’

하고 이 친구의 성토가 이어졌다. 젊은 날은 저만치 물러가고 있고 어느덧 아이 딸린 가장이 되었기에 이 친구에게 있어 집 문제는 더이상 남 이야기가 아니었다. 많은 회한이 느껴졌다.

이 친구의 성토를 듣고 있다보니 문득 내 나이 스무살의 봄, 그날의 대학 강의실이 떠올랐다.

그날 나는 수업이 끝나고 혼자 강의실에 앉아 있었다. 손에는 학회 선배가 건네준 백년도 더 전에 쓰여진 사회과학 서적이 들려있었다. 읽고 있던 내용은 대략 그런 것이었다.

‘당신이 가난한 것은 당신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의 구조적 문제 탓이다’

이런 내용이 복잡하고, 정교하며 또한 논리적으로 적혀 있었다. 그순간 나는 알지 못할 편안함을 느꼈다. 어렵게 살아온 지난 날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부끄러웠던 성장환경이 떠올랐다. 책 내용에 의하면 내가 부끄러워할 이유는 없었다. 우리가족이 가난했던 건 아버지의 게으름과 무지 때문이 아니고 이 사회가 구조적으로 우리가족을 가난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직도 내 나이 스물의 그 봄날, 그 강의실에 앉아 있던 나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몸이 하늘로 떠오르는듯한 전율을 느꼈다. 그간 내 어깨에 무겁에 올려져 있던 짐이 어느새 사라져버린 기분이었다. 당장 아버지께 전화라도 하고 싶었다.

‘아버지. 아버지가 가난한 건 아버지의 잘못이 아닙니다. 이 사회가 만들어 낸 구조적 문제 때문입니다’

라고 말씀드리고 싶었다. 물론 전화는 드리지 않았다. 지나고 생각해보건데 그때 그런 내용으로 전화를 드렸다면 아버지는 대노하셨을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공부 잘해 서울로 유학가던 막내아들에게 항상 말씀하셨다.

‘대학 가면 데모 같은거 하지 말고 착실히 공부만 해’

돌이켜보면 그 때 내 인생은 큰 기로에 서 있었다. 인생자체가 달라질 아주 큰 변곡점에 서 있었다. 당시의 내 모습을, 가난에 찌들린 내 모습을 있는 비참하지만 있는 그대로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사회의 구조적 문제점을 찾아 기나긴 여정을 떠날 것인가. 그 기로에 서 있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만큼 중요한 의식의 전환 기로에 서 있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당시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았다. 심적으로 매우 불편했지만 가난하고 초라한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몸이 하늘로 뜨는 듯한 전율을 느끼고도 왜 다시 초라한 나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을까?

그건 순전히 우였이었던 것 같다. 이성보다는 감정과 감성에 이끌리던 시절이었다. 책을 건네준 학회 선배가 인물이 아주 좋았다. 동기 여자 아이들이 그 선배를 많이 따랐다. 같은 남자로 질투가 났다.

‘흥 기생 오라비마냥 갸름하게 생기면 다야’

뭐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그리고 또 학회에 마음 끌리는 여자 선배가 딱히 없었다. 심장이 쿵하고 내려 앉을만큼 예쁜 여자 선배가 하나 있었는데 나 말고도 주변 남자들이 다 그 선배를 같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유치하지만 나는 그런 이유로 ‘몸이 뜨는듯한’ 전율을 느끼고도 그 학회와 그 사회과학 서적과 멀어졌다. 우리 사는 세상은 참으로 우연의 연속이다.

자석에 이끌리듯 나는 다시 예전 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가난하고,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나로 돌아갔다. 대출로 겨우 마련한 첫학기 등록금을 갚기 위해 여름방학에 대형마트 물류센터에서 새벽 다섯시부터 저녁 여덟시까지 중노동을 했다. 그렇게 마련한 돈으로 대출을 갚고 이학기 등록금을 다시 대출 받았다. 학기 중에는 겨우 학교 다니는 시늉만 하고 방학이면 중노동으로 내몰렸다.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대가였다. 그러다 도망가듯 군대에 갔다.

현실에 대한 하소연을 늘어놓는 회사 후배 앞에서 나는 왜 문득 이십년 전 나를 떠올렸을까. 후배에게서 이십년 전 그 강의실에 혼자 앉아 있던 나를 보았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었더라면’

‘내가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자랐더라면’

‘나의 부모님이 이랬더라면’

이라는 말들의 공통점은 해답을 밖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다. 이십년 전 내가 고요한 마음의 안정을 찾았던 그 순간처럼.

결과를 인정할 수 있는가?

이것에 대한 대답 하나로 나는 그 사람 인생의 절반은 이미 승패가 판가름난다고 생각한다. 과정이 아무리 불합리해도 결과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자연스레 미래를 보게된다. 과거는 뒤로 미뤄두고 앞으로 뭘 할까, 어떻게 할까에 집중하게 된다. 사실상 그것 밖에 할게 없다. 결과를 이미 받아들였는데 그것말고 다른 무엇을 하겠는가.

결과를 인정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면 인생은 매우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지나온 과정이 왜 불공정했는지 요목조목 따지게 되고 불합리와 모순에 눈을 뜨게 된다. 자연히 과거에 계속 얽매이게 된다. 세상에 불합리와 부정과 모순이 어디 한두가지인가. 파고들려하면 한도 끝도 없다.

이 세상이 정의와 공정한 경쟁으로 구성된 곳이라고 말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완벽하게 공정한 세상은 없다. 그런 세상은 이승에서의 삶을 마치고 가는 저 세상 유토피아에만 존재하지 않을까. 사회는 항상 부조리와 불의로 가득하다. 가난하고 헐벗은 우리에게 선택지는 많지 않다. 불공정한 과거를 개선하기 위해 계속 과거로 침잠하던가, 과거는 내려놓고 앞날을 걱정하던가 둘중 하나다. 가족거느린 가장이라면 나는 감히 후자를 택하라 하고 싶다. 그것이 나에게 이롭고 나만 바라보고 사는 내 가족에 이롭다. ‘사회정의’, ‘평등’, ‘옳은가치’ 그래 다 좋다. 누군가는 오늘도 그걸 외칠 것이다. 그런데 굳이 내가 아니어도 된다.

결과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자는 말 한마디가 하고 싶어 길게 이야기를 늘어 놓았다. 더 나은 내일을 살고 싶다면 오늘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남탓’과 거기에서 오는 심리적 편안함에 젖지 말자. 기회의 불평등과 과정의 불합리는 나중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 오늘은 ‘나’와 ‘나의 가족’에만 집중하자.

Comments

G 2023.02.17 07:46
현실직시...
모든건,자연지사 필연지사 당연지사인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