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과 수치심에 관한 글

부끄러움과 수치심에 관한 글

G 마린 1 639 2023.02.09 10:27

부끄럽다고 느껴본 적이 있는가? 수치심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가난보다 힘든게 부끄러움이요 수치심이다.

나는 임대아파트 사는데 친구들은 일반아파트에 살면 수치심을 느낀다. 우리집은 24평인데 친구들 집은 32평이면 웬지 모르게 부끄럽다.

나를 키워온 8할은 부끄러움과 수치심이었다.

친구들 아버지들은 멋진 승용차 타고 오는데 우리 아버지는 덜덜이 트럭타고 오는게 부끄러웠다. 고등학교 때 야자끝나고 비가오거나 하면 아버지가 데리러 오셨다. 아버지 덜덜이 트럭이 부끄러웠다. 제일 꼴찌로 나갔다. 친구들 눈에 띌까 두려워 후다닥 아버지 차에 탔다. 비야 많이 와라. 아무도 나를 안보게.

초등학교 저학년 때 시골 집에서 학교까지 2키로가 넘는 거리를 혼자 걸어다녔다. 여름날이면 어머니가 오십원인가 백원을 주셨다. 날이 너무 더우니 집에 올때는 쭈쭈바를 사서 먹으며 오라고 했다. 아직도 기억난다. 꼭지바라는 쭈쭈바를 사먹었다. 빨리 녹을까 최대한 천천히 먹으며 집에 왔다. 그래봐야 한시간 걸어오는길에 삼십분이면 다 녹았다. 나머지 삼십분은 울면서 집에 걸어왔다. 나는 꼭지바 먹은 기억밖에 안나는데 어머니는 매일 울면서 집에 들어오는 내가 안쓰러우셨다한다. 어머니는 이 아이가 고단한 현실이 슬퍼 울며 다녔다고 생각했나보다. 어렴풋한 기억에 나는 말 그대로 더워서 울었다. 너무 더워서 울었다.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 망하기 일쑤였다. 팔랑귀로 시작하는 일의 결말이 대부분 그러하다. 그럴때마다 우리가족은 산으로 쫓겨갔다. 내 주민등록초본을 띄어보면 일단 이사 이력이 아주 많다. 또 그 이사다닌 곳들 중 ‘산’이 붙은 주소지가 많다. 빨치산도 아닌데 왜 산에 살까. 화전민도 아닌데 왜 산에 살까. 남들이 안쓰는 버려진 집에 들어가서 살았다. 남의 별장을 관리하는 별장지기로도 살기도 했다.

주소지에 산이 찍혀 있는 것이 여간 부끄럽지 않았다. 뭐 별걸 다 부끄러워 하냐고? 산에 살면 공기 좋고 좋지 않냐고? 겪어보라. 수치심과 부끄러움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별장지기의 삶은 중세시대 영주와 농노의 관계와 비슷하다. 영주의 화려한 저택과 농노의 허름한 집은 좋은 대조를 이룬다. 가끔 영주라도 오는 날은 그 부끄러움과 수치심이 극에 달한다.

군대 가기전 고향집에 몇달 내려가 있었다. 아버지가 별장지기로 살던 시절이다. 별장 잔디밭 한켠에 붙은 조립식 집에 살았다. 아버지는 별장관리등 이것저것 허드렛일을 하셨다.

어느날 영주가 나타났다. 아이들도 데리고 나타났다. 잔디밭에 한가하게 앉아 영주가족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아이들이 보아하니 나랑 비슷한 연배다. 수치심이 극에 달하는 순간이 다가온다. 아버지가 나가서 인사 드리자고 한다. 인사 드려야 한다고 한다. 누가 대한민국을 자유 민주주의 사회라 했던가. 우리는 여전히 신분제 사회에 살고 있다.

등 떠밀려 무거운 발걸음을 영주가족으로 향했다. 꾸벅 인사를 드렸다. 주변머리 없는 우리 아버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신다.

‘제 아들입니다. xx대학교에 다니지요. 미8군에 군입대를 앞두고 지금 잠깐 내려와 있습니다’

그때까지 나를 보는둥 마는둥 ‘아휴 뭐 아들까지 데려와서 인사를 시키고 그래. 뭐 그래도 내가 영주니 인사를 하긴 해야지 허허’ 이런 표정으로 있던 영주의 표정이 바뀌었다.

‘어 흠흠. xx대학교에 다닌다고요? 흠흠 똘똘한 친구네요’ 하며 나를 쓱 쳐다보신다. 뭐 그런데 존중의 눈빛이라기 보다는 뭔가 탐탁치 않은 그런 눈빛이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알았다. 그 집 아이들이 나보다 훨씬 공부를 못했다. 어떻게 알았냐고? 그 영주께서 그 후 몇번의 정권교체 기간 중에 어느 한 정권에서 아주 높은 자리까지 갔다.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줄 몰랐다. 워낙 유명해지니 그 자식들도 조회가 되더라. 자식들은 영주가 이룬것에 비해 변변치 않은 삶을 살더라.

그리고 놀라웠던건 그로부터 십수년이 지나고나서 내 대학친구와 이야기를 하다가 그 친구가 알고 있던 다른 친구가 그 영주의 딸과 결혼한 것도 알았다. 결혼식 갔다가 신부네 집이 그렇게 대단한 집인걸 알고 놀랐다고 한다. 정원에서 차마시며 나의 인사를 받던 그 영주의 딸이 훗날 내 대학 친구의 친구와 결혼을 한 것이다.

아버지 주변머리에도 불구하고 그 별장지기자리에서 쫓겨나지 않고 그뒤로 몇년을 살았다. 그 뒤 부모님은 시골의 작은 민감임대 아파트를 구해서 이사가셨다. 내가 이것저것 찾아보고 알려드려 이사를 했다. 그때까지 어머니는 우리형편에 아파트에 사는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셨다 한다.

중학교 때 호구조사 하는 시간이 제일 싫었다.

‘아버지 대학원 졸업 손들어’ 한두명 정도 손을 든다. 대부분 교사 자녀들이다. 시골이라 고학력자 찾기 어렵다.

‘아버지 대졸 손들어’ 몇명이 든다. 아 부럽다. 아버지가 대학도 나오시고.

‘아버지 고졸 손들어’ 여기서 많은 아이들이 손을 든다. 나도 은근슬쩍 따라 든다. 거짓말이다. 우리 아버지는 중학교까지만 다니셨다. 부끄러워 다른 친구들 많이 손들 때 나도 따라 든거다.

아버지 끝나고 어머니 차례. 중졸에서 손들었다. 차마 두계단을 뛰어넘어 거짓말 하기에는 양심이 나를 불렀다. 어머니는 초등학교만 다니셨다. 그것도 절반은 집에서 아궁이 불때고 소 여물먹이고 하느라 못 다니셨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집에서 외할머니를 도와 이일 저일 하시다가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셨다. 친구들 학교갈 시간이면 동산에 올라 학교가는 친구들을 몰래 바라보셨다 한다. 부끄러워 인사는 못하셨다 한다.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한껏 느낄때면 다짐했다. 내 노력으로 이 현실을 꼭 한번 바꿔 보겠다고. 부끄러운 과거가 있었다고 당당하게 세상에 얘기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랐다. 잘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잘 살아서 현실이 좀 바뀌어야 아무렇지 않게 옛날 얘기를 할 수 있겠지 생각했다.

항상 그런 장면을 머릿속으로 꿈꾸었다.

‘아버지 뭐하시노?’

‘백숩니더’

‘이 자슥이 머라꼬? 그럼 니 어무이 뭐하시노?’

‘접시 닦습니더’

이런 대답을 아무렇지 않게 덤덤하게 하는 날이 오기를 바랐다. 그러려면 현실을 바꾸어야 했다.

살면서 이런 날이 오기를 바랐다. 항상 준비를 했다. 그리고 기다렸다. 초졸인 어머니를 중졸이라 속이는대신 아주 담담하게 옛 이야기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얘기할 날이 오기를 바랐다. 초졸인 어머니를 초졸이라 당당하게 말하고 반백수인 아버지를 백수라 당당하게 얘기할 날이 오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날이 왔다. 영국사업장에 발령받고 첫 출근을 했다. 앞으로 모실 상사분과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 같이 일하는거 처음이지? 앞으로 잘해 보자고. 시차 적응 하느라 힘들지? 한 이주는 걸릴거야. 마음 편히 먹어. 부모님께 잘 도착했다고 전화는 드렸고? 그런데 x대리 아버지 뭐하셔?’

드디어 그 날이 왔다. 나는 준비된 차분함으로 대답했다.

‘아버지 공장에서 청소하십니다’

‘아 그래? 흠흠 그럼 어머니는?’

‘어머니 식당에서 일하십니다’

‘아 그렇구나 흠흠..... 아 그런데 점심은 뭐 먹을까?’

황급히 주제를 돌리셨다. 당황한건 내가 아니고 상사였다. 내가 너무 아무렇지 않게 담담하게 이야기를 했나보다.

그 뒤로도 직장 동료들과 차를 타고 가다가, 밥먹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던진다. 동료들이 흠칫 놀라는 모습이 보인다.

‘헐 뭐지. 얘는 이런 얘기를 어떻게 한치 감정의 동요도 없이 하는거지’ 뭐 그런 표정.

영국에서 대학원 졸업하는 날 집에 돌아와 아버지께 전화를 드렸다.

‘아버지 저 오늘 대학원 졸업했어요’

아버지는 말이 없으셨다. 전화 저편에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떨리는 목소리였다.

‘해준 것도 하나 없는데.... 이렇게 잘 커줘서 너무 고맙다...’

아버지는 울고 계셨다. 아버지 우는 모습을 처음 봤다.

몇해전 어머니가 미국에 오셨다. 관광지로 유명한 다른 대도시로 여행 계획을 세웠다. 아내는 예전에 학교 다닐때 이미 다녀왔다고 어머니와 나만 다녀오라 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어머니와 단둘이 여행을 했다. 밤 비행기를 탔다. 착륙할 즈음 도시의 화려한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공항에서 차를 빌려 시내 호텔로 향했다. 관광지라 그런지 늦은 밤이었지만 시내 불빛이 참 화려했다. 어머니가 갑자기 말씀이 없으셨다. 한참을 그렇게 창밖만 바라보시더니 본인 자라온 산골마을 지명을 언급하시며 담담하게 얘기 하셨다.

‘xx촌년이 이런데도 다 와보고....’

그걸로 끝이었다.

생각지 못한 아버지의 울음, 담담한 어머니의 한마디에 나는 나의 과거와 결별했다. 부끄러움과 수치심은 그길로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럼 지금 당장 부끄러움과 수치심에 떨고 있는 당신은 어떻게 해야할까. 나는 몇가지 제안을 해보고 싶다.

- 당신이 느끼는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직시하라. 현실을 직시하라. 몸으로 마음으로 그 느낌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라. 나중에 꺼내볼 수 있도록 그 부끄러운 마음을 잘 간직하라. ‘흥 비록 내가 초라하긴 하지만 뭐 돈과 지위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아’하는 자위는 오래가지 못한다. 종교로 귀의한 스님조차도 경제적 문제에 관심을 가진다.

- 고만고만한 친구들을 만나 수다떨며 관심을 돌리거나 술한잔 먹고 현실을 망각하는 일은 하지 않기 바란다. 나는 마음이 불편하거나 기분이 별로일때는 절대 술을 마시지 않는다. 주사가 있거나 그래서 그런건 아니다. 마음이 불편하거나 뭔가 힘든 일이 있다는건 그 어느때보다 이성적이어야 할 시기라는거다. 현실과 맞닥뜨려야할 시간이다. 술한잔 먹고 잊으려 하지 않는다. 술깨고 일어나면 달라진건 없다. 술은 기분 좋을때만 마신다. 그리고 절대 술 마시고 중요하거나 진지한 얘기는 하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 듣는 사람 모두 술깨면 후회한다. 술마실 때의 대화는 실없는 농담으로 족하다. 잊어도 그만, 기억해도 그만인 그런 실없는 이야기들 있지 않은가.

- 분명히 기억하라. 당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수치심과 부끄러움은 추후 당신에게 큰 행복을 가져다줄 원천이다. 단 당신의 노력으로 변화를 꾀했을 때만 그 행복은 모습을 보인다. 대치동 아이가 공부잘한 이야기보다 시골 흙수저가 공부 잘한 이야기가 더 감동적이다. 영어 잘하는 사람의 ‘저 외국 한번 가본적 없는 순수 토종이에요’ 한마디면 그 아우라가 더욱 빛이난다. 그렇다. 당신의 부끄러움과 수치심은 훗날 당신을 더욱 돋보이게 할 좋은 재료이다. 가난은 성공한 사람이 달고 다니는 가장 자랑스러운 훈장이다.

- 그래도 현실이 힘들면 잠깐 잊는 것도 방법이다. 나는 힘들 때면 김광석의 ‘너무 깊이 생각하지마’를 듣곤했다. 김광석은 힘들면 ‘벌거벗은 여인의 사진을 보며.... 아주 쉽게 잊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 노래가 사랑에 대한 노래인지 아니면 다른 내용인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그냥 나는 담담하게 읊조리며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라는 김광석의 목소리가 너무 좋다. 그래 힘들면 가끔은 그냥 잊어버려라. 너무 깊이 생각하지마라. 중요한건 현실을 바꾸기 위한 행동이다. 현실에 너무 침잠할 필요 없다.



날씨가 참 좋습니다. 아름다운 모습을 볼 때면 가끔 옛날 생각이 납니다. 그 시절 생각하며 몇자 적어 보았습니다. 즐거운 금요일 되세요.

Comments

G 2023.02.10 0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