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는 애초에 왕조 관료제 사회에서 만들어진 시스템임. 그래서 사주가 보는 건 부귀·가문·관직·상속 이 네 가지밖에 없음. 이 네 가지가 인생의 전부였던 시대에 맞춰 설계된 학문이라 다른 영역은 분석도 못 하고 가치를 평가할 기준도 없음.
그러니까 지금처럼 직업, 정체성, 정치활동, 예술, 철학, 종교, 라이프스타일이 다층화된 시대에는 틀 자체가 안 맞는 거임. 사주가 빻아서가 아니라 사주가 살아있는 시대가 끝났다는 말에 가까움.
사주 프레임이 단 하나인 이유가 이거임. 부귀를 얻으면 길격, 권력을 잡으면 귀격, 돈 버는 데 성공하면 재성 강해서 좋음. 반대로 사회운동, 창작, 철학 탐구, 종교적 수행 같은 현대적 의미의 좋은 삶은 전통 사주에서 해석 자체가 불가능함.
형태가 없어서 못 보는 거지 분석력이 떨어져서가 아님. 그러니까 사회운동가는 상관견관 흉명이라고 찍히고, 관직에 충성하지 않는 인간은 파격으로 판정되고, 종교인이나 수행자는 도대체 무슨 격으로 넣어야 할지 감도 못 잡아서 결국 현실적 성취 부족으로 결론 내림. 사주가 그런 사람을 이해 못 하는 게 아니라 아예 관찰할 좌표가 없는 거임.
반대로 돈은 잘 벌었는데 방식이 더러워도 재성 강하면 귀하게 봄. 권력 비리고 뭐고 관성 튼튼하면 귀격이라고 떠받듦. 사주는 도덕성 평가 기능이 없기 때문에 이런 왜곡이 발생하는 거임. 사주가 부귀 중심 세계관의 잔재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님.
그리고 제일 큰 문제는 이거임. 사주는 인간에게 운명에 대한 태도라는 개념이 없음. 길운이면 시너지 나서 좋다, 흉운이면 조심해라, 피하라, 버텨라. 이게 끝임. 인간이 불행을 재해석해서 의미를 만든다거나, 원국이 빻아도 자기 방식으로 길을 찾는다거나, 전혀 다른 가치 체계에서 삶을 꾸린다거나 하는 건 사주 안에서 설명할 방법 자체가 없음.
그러니까 원국이 구리면 인생도 구릴 거라고 단정하는 태도로 굳어지고, 사람 입장에서는 운명 앞에서 좌절하는 서사만 남게 됨. 사주는 그걸 바꿀 철학이 없고, 없기 때문에 매번 같은 말만 반복하는 거임.
문제의 본질은 사주가 틀렸다가 아니라 사주가 설명 가능한 인생 모델이 너무 좁다는 데 있음. 옛날엔 부귀, 관직, 가문밖에 인생 경로가 없었으니 그 좁은 프레임도 충분했겠지.
근데 지금은 삶의 경로가 기하급수적으로 다양해졌는데 사주는 여전히 부귀-관직-상속 네 칸짜리 틀로 모든 인간을 재단하려고 함. 이 불일치는 시간의 흐름 자체가 만든 문제임. 사주는 그냥 오래된 틀이고, 그 틀은 지금 인간이 사는 현실을 따라오지 못함.
사주는 부귀 중심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만큼 특정한 종류의 인간만 길로 판정하고 나머지는 흉으로 몰아넣는 경향이 필연적으로 생김. 그리고 이 한계 때문에 원국이나 대운이 빻아도 다른 길을 택하며 괜찮게 사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함.
사주는 인간의 도덕성, 철학성, 창조성, 저항성 같은 현대적 가치들을 평가하거나 해석할 능력이 애초에 없는 학문임. 이런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면 사주는 현실을 해석하는 도구가 아니라 현실을 왜곡하는 프레임이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