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다는 자기 자신을 감정적으로 감금해놓고선 왜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멀쩡하게 사냐고 묻는다.
그 감옥이 본인의 시야를 가린다는 걸 모른 채 세상이 틀렸다고만 외친다.
관다들 마음 속엔 깊게 뿌리내린 수치심이 있다.
단순히 부끄러움을 느끼는 차원이 아니다.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살아온 흔적이다.
그걸 넘어설 수 있어야 비로소 세상도 보이고, 사람도 보인다.
타인을 억제하거나 통제하는 관성(官性)에 눌리는 게 아니라, 인성(印性)으로 그 기운을 중화할 수 있게 되는 건 결국 자기 인정에서 시작된다.
왜 관이 비겁(比劫)을 친다고 하겠나.
타인을 때리는 건 자기 자신을 이미 더 세게 때려봤다는 증거다.
스스로를 얼마나 몰아세워왔으면 남에게도 그런 방식밖에 못 쓰는가.
표면적인 태도만 보고 왜 저렇게 날카롭지?라고 해석하면 답이 안 나와.
흐름을 봐야 한다.
수치심이 어느 지점에서 병적으로 과도해졌는지, 그때부터 세상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비틀어졌는지.
이걸 놓치면 원인을 자기 바깥에서 찾게 되고, 결과는 늘 타인에 대한 분노로 튀어나온다.
자기 책임을 끝까지 회피하려는 사람일수록 사실은 자신 안의 벌판에서 자해 중이다.
자기 탓 안 하려는 태도 = 이미 자기 탓 과잉으로 조져진 상태
그걸 못 보면 겉으론 자기합리화지만, 속은 자기학대다.
제대로 자리를 잡은 관성의 사람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걔넨 통제하려 들지 않는다. 억누르지도 않고, 회피하지도 않는다.
자기 기준을 가지고 있지만, 그 기준이 타인에게 칼이 되진 않는다.
요즘은 애착 유형이니 뭐니 해서 이런 걸 조금씩 언어화하려는 흐름이 있는데,
그런 심리학적 틀도 같이 들여다보면 이해에 도움 된다.
하지만 핵심은 늘 같다.
네가 너 자신을 감당할 수 있어야, 남을 제대로 볼 수 있다.
타인 억제하려고 이러쿵 저러쿵 하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