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부처만이 선악을 이분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금강경의 핵심입니다.
중생의 단계를 넘어 궁극의 경지에서는 선악은 이분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동체로서 한몸인 것입니다.
강도살인으로 먹고사는 못된 사람이 효심만은 지극하여 그 돈으로 부모에게 땅을 사줍니다.
부모는 열심히 밭을 일구어 곡식을 키웁니다. 주변 토굴에서 홀로이 수행 정진하는 스님이 있습니다.
먹을 게 없어 뼈만 앙상하니 곧 쓰러질 것 같습니다. 부모는 그 땅에서 일군 곡식으로 수행자를 봉양합니다.
후일 수행자가 도를 이루어 만인을 지도하여 중생을 구제합니다.
이것이 상생의 이치입니다.
살인자가 없다면 부모의 땅도 없고, 그 땅에서 나는 곡식이 없었다면 도인도 없었을 것입니다.
도인이 없었던들 중생 구제도 불가했을 것입니다.
부처께서 이르시길
"종래에는 그 선하다는 마음도 버려야 하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금강경에 이르길
"저기 높다란 수미산도 허공의 드넓은 공간도 높거나 넓다 할 수 있겠느냐?" 하며 수보리에게 반문합니다.
사람들은 높으면 높다고 표현하고, 넓으면 넓다고 표현합니다. 못되면 못됐다고 말하고, 좋으면 좋다고 말합니다.
저기 저 높은 산도, 푸르른 나무도 애초에 높거나 푸른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보기에 높거나 푸른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산은 산이고, 그저 물은 물일 뿐인 것을 인간은 거기에 象을 부여합니다.
"높은 산이다, 웅장하다, 물이 맑다, 깊다, 청하다" 등등.
이것이 분별입니다.
또한 인간의 모든 고통의 시작은 이 분별, 즉 번뇌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길거리에 큰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두 사람이 칼을 들고 서로 죽이기 일보 직전입니다.
길을 지나던 지극히 착한 사람이 이 둘을 가까스로 말립니다. 참 착한 일이겠지요?
허나 그때 싸우던 두 사람 중 하나가 악명 높은 살인자가 되어 수많은 사람을 해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더 큰 범죄를 야기한 꼴이 됐으니, 과연 선과 악을 이분할 수 있겠는지요?
세상 모든 철학과 종교는 선악을 극명하게 대립시킵니다.
허나 오직 주역과 불도만은 선악을 음양으로 이분하지 않습니다. 다른 듯 일맥하는 부분입니다.
하여 탄생한 불교의 핵심사상, 그것이 바로 "空" 입니다. "色과 空이 둘이 아니다" 라는 것이지요.
중생이란 존재는 어차피 色으로 가득한 이 염부제(지구)에 속해 있기에 구분하고 분별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여 부처는 色 속에 있으면서도 그것의 실체가 없는 허망한 것임을 아시고(오온이 공한 것), "色空이 둘 아님을 설하신 것" 입니다.
쉽게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중생이 섹스를 하면
"아 좋았다, 또 생각난다, 보고 싶다, 너를 갖고 싶다" 이런 象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더욱 빠져듭니다.
도인이 섹스를 하면
"행위는 있었으나 했다 안 했다 좋다 나쁘다" 마음으로 붙잡고 있는 게 없습니다. 하여 자유롭습니다.
무더위에 시원한 바람 한 점이 소중하고 간절합니다.
중생은 "저 바람을 잡고 싶다" 합니다. 欲, 욕구입니다. 바람을 잡고 싶은 욕구이지요.
욕을 내니 "나라는 사람, 너라는 사람, 내 것이다, 네 것이다, 내 남자다, 네 남자다, 내 승진이다, 네 승진이다, 내 돈이다, 네 돈이다" 등등.
온갖 번뇌망상 속으로, 고통 속으로 스스로를 끌고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금강경에서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이라 하였고, 그런 象들이 우리를 괴롭힌다 하였습니다.
즉, 상에서 탈피하면 부처와 살인자가 둘 아니요, 하늘과 땅이 다르지 아니하며, 나와 네가 이분되지 아니할 것입니다.
"自他不二"
삶은 한 조각 구름의 나타남이요,
죽음은 한 조각 구름의 스러짐이네.
그냥 순리인지도.. 인간이 의미를 부여할뿐이지요.
좋은 깨달음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