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 자살한 시체를 목격했습니다

(실화) 자살한 시체를 목격했습니다

G 만두야놀자 0 5,110 2020.08.26 17:55

 


살면서 직접 시체를 볼 수 있는 광경이 몇 번이나 될까.


그다지 적지 않은 시간을 살아오면서, 나와 같은 시간을 살아온 지인들에게,


시체를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들의 대답은 대부분 ‘아니오’였다.


그 수많은 ‘아니오’의 대답들에 속하지 못하고,


나에게는 세 번의 시체 목격 경험이 있다. 그것도 세 번 전부 유쾌하지 못한 그런.


그중 하나를 나는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국민학교 때의 일이었다.


당시의 나는, 다른 아이들과 다를 것이 없던 보통의 4학년에 갓 올라온 꼬마였다.


반에서 크게 두드러지지도 않은, 그렇다고 심하게 뒤떨어지지도 않은 그런.


그리고 그런 나의 반에 크게 두드러지는 한 친구가 있었다.


‘이재복’ 그 친구의 이름이었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도저히 잊히지 않는 이름.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만큼을 더 살아간다고 해도, 그 이름만큼은 잊어버리지 못할 것 같다.



녀석의 행색은 굉장히 심각했다.


당시 우리 학교의 동복 체육복이었던 곤색 체육복을 매일같이 입고 다녔다.


머리는 감지 않은 듯 늘 기름져 있었고, 얼굴과 손은 씻지 않은 노숙자처럼 검은빛의 때가 타 있었다.


체육복 또한 멀쩡할 리가 있겠나.


여름이 가까워져도 반팔이 아닌 긴팔 동복을 매일같이 입고 다녔던 그 체육복 또한 얼룩덜룩했고,


그런 녀석의 행색에 반 아이들 모두 녀석을 가까이하지 않으려 했었다.


 


행색은 그런 주제에 연필이나 샤프, 볼펜, 지우개 같은 학용품들은 늘 새것과 같았다.


아니, 새것이었다.


녀석은 도벽이 있었고, 그 학용품들은 학교 근처 문구점에서 훔쳐온 것들이었다.


어떤 친구는 재복이가 훔쳐온 학용품을 하나 얻기 위해 괜히 친한 척을 하기도 했었다.


재복이가 친하게 지내고 싶은 친구들에겐 반대로 재복이가 학용품을 선심 쓰듯 ‘너 가져’라며 나누어 주기도 했지만,


그 친구들은 그 물건들의 출처를 대부분 알고 있었고, 대부분 대답도 않은 채 고개를 돌려 무시했다.


때문에, 반 아이들은 자신의 소지품이나 돈 같은 것이 없어졌을 때, 재복이를 제일 먼저 의심했다. 아니 확신했다.


재복이가 교실에서 힘이 센 아이에게 맞고 있던 때면,


누군가 자신의 물건을 잃어버렸구나 싶었다.


 


지금이야 대부분 학교에서 점심시간에 급식을 먹지만,


나의 시간에 학교급식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생겼다.


그 전까진 어머니께서 싸주신 도시락을 도시락 가방에 챙겨 학교에 들고 다녔다.


다른 친구들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재복이만 제외하고.


 


재복이는 점심시간이 되면 늘 어디론가 사라졌다.


반 아이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모두가 싫어하는 친구였고, 그가 점심시간에 밥을 먹든, 그렇지 않든, 아이들은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물론 주택가 한가운데에 있던 학교였기에, 집이 가까웠던 친구들은 점심시간에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오는 경우가 없지 않았지만,


재복이가 집에서 밥을 먹고 올 거라고는 당시에도 생각 들지 않았다.


 


어느 날은 그가 여자 담임선생에게 교실에서 심하게 뺨을 수차례 맞았다.


당시에도 얼마 하지 않던 육성회비를 내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성인 어른 여성의 아이에 대한 일방적인 폭행이 이루어졌던 그 시간에,


반 아이들 그 누구도 안타까워하거나 그 분위기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재복이는 늘 혼나거나 얻어맞는 아이였으니까.


우리가 싫어하는 아이였으니까.


그가 맞는 것이 마치 즐거운 쇼를 보는 것처럼 몇 명의 아이들은 킥킥거리기까지 했다.


 


나는 어머니에게 할 말이 많은 나이였다.


하교해서 집에 돌아온 나는 어머니에게 재복이가 육성회비 때문에 선생에게 맞은 이야기를


사건 사고 소식을 전해주는 기자처럼 어머님께 떠들어댔다.


어머님은 나의 이야기를 경청하시곤, 재복이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하셨다.


 


다음날, 학교에 갈 준비를 하던 내 앞에 늘 챙겨가던 도시락 가방이 있었고, 그 옆에 예전에 썼던 도시락 가방이 하나 더 있었다.


이게 뭐지 하는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나에게, 어머니는 재복이라는 친구를 가져다주라고 하셨고,


오늘 학교에 가면 그 친구가 내지 못한 육성회비가 얼마나 되는지 물어보라고 하셨다.


다른 아이들처럼 나 또한 재복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에, ‘싫다’라며 어머님께 짜증을 부렸지만,


어머니는 크게 노하신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셨고,


그런 어머님의 표정에 주눅이 들어 더 이상 어찌하지 못하고 도시락 가방 두 개를 챙겨 들고 학교에 갔다.


학교에 가서 재복이에게 도시락 가방을 바로 주진 못했다. 아이들이 놀릴 것 같았거든.


점심시간이 되고 아이들이 도시락을 꺼내는 일에 혈안이 되어있을 때,


‘우리 엄마가 너 갖다 주래’라고 내가 한 일이 아닌 양 재복이에게 던지듯 건네주었다.


하지만 재복이의 태도는 내 예상과 달랐다.


내가 건네준 도시락을 바닥에 던지듯 내팽겨치고 그는 교실 밖을 나가버렸다.


점심시간 시작되자마자 일어난 소란에 아이들의 이목이 집중되었고,


난 그 순간이 무척이나 창피해서 서둘러 바닥에 던져진 도시락 가방을 주워 담고 있었다.


육성회비 같은 건 묻지도 못하고, 그 순간의 창피함과 우리 어머님이 싸주신 아까운 도시락을 함부로 했다는 것에 더욱 화가 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어머님께 재복이가 도시락을 던졌다고 일러바치듯 말을 했다.


조그만 나는 어머님 또한 나와 같이 화를 내주길 바랐던 것 같다.


하지만 어머님은 조금의 동요도 않은 채 나에게 말씀하시길,


아이들이 그 친구를 전부 싫어하고 피해도, 너만큼은 그 아이에게 친구가 되어주라고 하셨다.


나는 벌레라도 몸에 닿은 것처럼 몸서리를 쳤지만,


어머님은 당부하듯, 그리고 타이르듯 나에게 말씀하셨다.


다음날도 역시 도시락 가방이 두 개가 있었다.


나는 전날의 기억이 떠올라, 어차피 또 던질 거라며 거절했지만, 어머님은 나에게 그것을 또다시 가져가기를 권하셨다.


우리 집은 가난했다.


어린 나이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새마을 주택이라고 불리우는 2층짜리 단독주택 한 켠 단칸방에 세 식구가 살고 있었기에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어린 나이의 나는 그런 어머님의 모습이 조금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거역할 수도 없어 다시 도시락 가방 두 개를 챙겨 들고 학교에 갔다.


 


이번에는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재복이에게 도시락을 던지듯 건넸다.


그 모습을 본 친구들이 ‘와! 저 새끼 재복이한테 도시락 줬어.’라고 소리치며,


‘재복이랑 친구래요. 친구래요.’하고 가락을 붙여 놀려대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어머님과의 신경전에 잔뜩 짜증과 화가 나 있던 나는, 그중 한 녀석 얼굴에 주먹을 날렸고,


예상치 못한 내 공격에 쓰러진 그 친구의 가슴팍 위로 올라타서 아침에 있던 울분을 터뜨리듯 계속해서 얼굴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렇게 더 이상 날 놀리는 친구는 없었고,


당연히 선생님께 걸려서 1교시 내내 교실 바닥에 머리 박기를 하고 있었어야 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재복이는 언제나처럼 교실 밖으로 나섰다.


하지만 오늘은 내가 준 도시락을 들고 나갔고, 점심시간이 끝날 때쯤,


운동장에서 돌아와 보니 재복이에게 줬던 도시락 가방이 가벼워진 채로 내 책상 위에 있었다.


나는 그 뒤로 계속 어머니에 의해서 두 개의 도시락 가방을 챙겨갔다.


담임선생도 그 무렵엔 내가 재복이의 점심을 챙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 임에도,


별다른 이야기나 칭찬은 없었다. 그냥 무관심했다.


재복이는 자신이 문구점에서 훔친 것 같은 샤프나 볼펜 등을 종종 나에게 주었다.


아마도 본인 나름대로 고마움의 성의 표시였을 것이라.


그 물건들의 출처가 어디였는지 너무나도 잘 알 것 같던 나는, 차가운 표정과 태도로 그의 호의를 거절했다.


 


재복이가 건네준 물건들을 언제나 거절해오던 어느 날.


그는 여느 때 와는 다른 물건을 나에게 내밀었다. 은색으로 빛나는 무게감 느껴지는 작은 쇳덩이.


지포 라이터였다.


역시나 물건의 출처 따위는 궁금하지 않았다. 당연히 어디선가 훔쳤겠지.


하지만 처음 보는 비싼 장난감과 같은 모습은 나의 관심을 온통 끌어당겼고, 이것이 훔친 물건이든 뭐든,


어린아이로서는 거절하기 힘든 욕심이 생겨났다.


국민학생에게 라이터 같은 건 폭죽놀이 할 때 말고는 전혀 쓸 데가 없었을지라도,


남자의 본능 같은 것인가. 난 그 라이터가 무척이나 가지고 싶었다.


그렇게 그가 준 호의를 처음으로 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처음은 어렵고 두 번은 쉬웠다.


그 뒤로 재복이는 자신이 먹은 도시락 값을 하려는 듯, 나에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주었고,


어린 마음의 죄책감 같은 건 처음 라이터 이후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웃긴 건, 내가 재복이에게 받은 물건 중 하나 정도 자신에게 콩고물로 떨어지지 않을까, 나에게 친한 척을 하며 아첨하는 아이도 생겨났다.


재복이에게 아첨하는 것보단 나에게 하는 것이 나았다고 생각이 들었던 것인지,


아니면 재복이에게 직접 받은 것이 아니라, 내 손을 한번 거쳐 나에게 받은 것이니 나름 세탁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인지.


반에서 거지라고 불리는 아이에게 도시락을 가져다주던 놀림감이 아닌, 알 수 없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갔던 때, 일이 일어났다.


 


‘우리 집에 놀러 가자. 맛있는 거 줄게’


재복이의 입에서 나온 권유였다. 나는 어린 나이에도 만감에 휩싸였다.


옷도 없어서 매일 더러운 체육복만 입고 다니는 그가. 육성회비도 내지 못해서 선생에게 얻어맞는 그가.


도시락도 싸 올 처지가 못 돼서 나에게 얻어먹는 그가. 도대체 집에 무슨 맛있는 것이 있을까 하며 미심쩍었다.


거절하고 싶었다. 겉으로 보여지는 재복이의 행색에 그의 집을 방문하고 싶은 생각이 도저히 나질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동안 나에게 줬던 것들 다시 달라고 하면 어쩌지?’, ‘나에게 준 수많은 학용품처럼 먹을 것도 잔뜩 훔쳐놓지 않았을까?’


싫은 마음 반, 궁금한 마음 반. 이렇게 내 머릿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입에서 집에 안 갈 거면 라이터 내놔 라는 말이 나왔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반강제적으로 그와 같이 하교를 했다.


 


익숙하지 못했던 주택가 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가끔 동네 형들과 올챙이를 잡으러 간다며 갔던, 논과 밭이 곳곳에 있는 황무지를 만났다.


신도시를 만들기 위해 파 해쳐놓은 넓직한 황무지를 또 한참을 걷다 보니, 플레이트.


혹은 합판으로 만든 지붕의 판자집들이 가득한 판자촌이 나왔다.


그곳이 그가 사는 동네였다. 어른의 키보다 조금 더 높거나 비슷한 높이의 작은 집들.


그리고 나무와 비닐로 만들어진 집 현관문까지. 그 낯선 풍경과 생각 이상의 먼 거리에 당장이라도 집에 돌아가고 싶었지만,


라이터에 대한 나의 욕심은 그보다 더 깊었나 보다.


 


그의 집에 들어서니 집안은 더욱 가관이었다.


한낮임에도 어둑한 실내에 가장 먼저 나의 눈에 들어온 것은 노란 장판 가득히 널부러져 있는 잡다한 쓰레기들과, 무수한 소주병들.


저 빈 병들만 슈퍼에 가져다 팔아도 과자를 몇봉지나 살 수 있을 것 같은 많은 양이었다.


그런 정돈되지 않은 방안 가운데 그의 어머니가 소주를 안주도 없이 마시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수많은 빈 병들의 출처가 그의 어머니였을 것이라 짐작되었다.


당황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안녕하세요 라고 그의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였지만,


그의 어머니는 반응은커녕, 나에게 그 어떠한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술을 마시는 데 열중했다.


 


재복이는 자기 방으로 가자며 나를 이끌었다.


단칸방에 살던 우리 집과는 다르게, 이런 집에도 본인 방이 있어? 라는 생각을 했지만, 내색않고 그가 안내한 그의 방으로 갔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벽면에 발린 것이 도배지가 아닌 신문지라는 것.


그리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이런 집에 도대체 그가 말한 맛있는 것이라는 게 정말 있는 걸까 하는 생각.


이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방을 다시 나섰다. 그리고 금방 전 지나쳐온 그의 어머니에게로 가서 그가 어머니에게 말했다.


‘나 친구랑 라면 사 먹게 오백원 만’.


맛있는 것이라는 게 고작 라면이었어? 라는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퍼억 소리가 나며 그의 어머니가 그의 얼굴을 후려치는 장면이 들어왔고,


얼마나 세게 때린 것인지 균형을 잃은 그의 몸이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그 충격적인 장면에 당연히 긴장하여 그의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며 못 본 척하고 시야 밖으로 숨었다.


바닥에 쓰러진 그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태연하게 일어나 내가 있는 자신의 방으로 다시 들어왔다.


그리곤 그가 말했다. ‘맛있는 거 다음에 줄게’. 나는 괜찮다고 배 안 고프다며 그에게 이야기했다.


배가 고프다고 한들 거기서 뭔가를 먹을 수도 없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닫혀진 그의 방에 앉아 별말 없이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지금 당장 일어나기도 애매했다.


라이터 때문에도 그렇지만, 남의 집에 가서 바로 나온다면 상대가 불쾌할 수도 있겠다. 라는 어린 나이에도 들었던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게 30여분 정도의 불편한 시간을 버텨내고, 학원에 갈 시간이라며 다니지도 않던 학원을 핑계로 집에 가겠다고 재복이에게 말했다.


그는 알겠다고 했고 나는 서둘러 그의 방을 나와, 그의 어머니를 빠르게 지나쳐,


신발을 신는 둥 마는 둥 하며 허겁지겁 그의 집을 나섰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재복이가 학교에 나오지 않기 시작했다.


담임선생은 약 삼일 동안은 별말 없다가,


기간이 더 길어지자 반 아이들에게 재복이가 학교에 왜 안 나오는지 아는 사람? 이라며 아이들에게 물었다.


아이들 아무도 대답이 없자, ‘걔 네 집에는 왜 전화도 없는 거야’ 하고 혼자 중얼거리듯 짜증을 냈다. 그땐 그랬다.


선생 같지도 않은 선생이 너무나도 많던.


그가 학교에 나오지 않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좀 넘었을까.


담임선생은 종례시간에 갑자기 나를 지목하며 ‘너 재복이랑 친하지? 걔 네 집에 가서 왜 학교에 안 나오는지 알아보고 와’ 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도 않을 소리지만, 그때 선생의 권위는 지금과는 다르게 미쳐 날뛰던 시절이라,


거역해도 된다는 생각은 전혀 할 수 없었고, 불만이 있어도 당연히 따라야 할 명령 같이 느껴졌다.


 


그렇게 불만을 가득 안은 채, 기억을 되짚어 그가 살던 동네를 다시 찾아갔다.


뙤약볕 속에 그늘 하나 없는 황무지 길을 지나 한참을 걸었고, 어디선가 매미 울음소리가 들릴 때쯤 그때 봤던 판자촌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도 그랬지만, 엄청나게 고요한 곳이었다. 재복이네 외에도 사람이 사는 건가 싶을 정도로.


이곳을 처음 찾아왔을 때도, 떠날 때도, 지금 다시 찾아왔을 때도 사람을 이곳에서 본 적이 없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의 집 앞에 섰을 때 그때와 다른 이상한 악취가 풍겼다.


나는 그의 집 문 앞에 서서 ‘재복아’ 하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무런 반응이 없다.


10여 초간의 간격으로 그의 이름을 네댓 번을 더 불렀지만,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 시절엔 지금과는 다르게, 굉장히 예의 없지만, 친구를 부를 때 친구 집 문을 열고


‘누구누구야 놀자’ 하며 머리를 들이미는 일이 흔했다. 하지만 그의 집 문을 무작정 열기가 겁났다.


처음 봤던 그의 어머니가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그대로 돌아갈까 하다가,


괜히 아무 소득 없이 돌아가면 왠지 선생이 이 먼 길을 또다시 가보라며 나를 보낼 것 같았기에,


문이 닫혀있는지부터 확인하려고 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그 순간.


사람 몸통만 한 문틈 사이로 엄청난 숫자의 파리 때가 쏟아져나왔다.


영화에서 본 것 같은, 동굴에서 박쥐들이 쏟아져나오듯 그렇게.


파리 때들이 내 얼굴과 내 몸에 쉴 새 없이 부딪혀왔고, 나는 파리들을 쫓아내느라 허공에 온몸과 팔을 휘저었다.


혹시라도 입에 들어갔을까 봐 계속 침을 뱉었다.


그리고 문밖에서 맡았던 이상한 악취가 더욱 강하게 풍겨왔다.


여름내 열어본 적 없던 연탄 광을 가득 메운, 죽어있던 쥐의 사체에서 풍겨 나온 불쾌하고 삭은 냄새의 시취.


그것과 유사한 냄새가 몇백 배는 더 강하게 내 코를 찔러왔다.


그 냄새에 헛구역질이 올라올 뻔했다.


여전히 눈앞에서 날아다니는 파리들 속 내 시야에 보인 것은,


그 후로 십수 년의 시간이 흘렀어도 도무지 지워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아마 그때 본 것은 평생이 지나도 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의 목에 밧줄이 걸려 죽어있는 채 벽에 기대어져 있었다.


아이의 키보다 높은 곳에 매달려있었던 목매달아 죽은 어머니를 억지로 끌어내려,


목뼈가 다 부러져 기괴한 모습으로 목을 늘어뜨린 그의 어머니 시체와,


그 옆에 재복이가 정신이 나간듯한 모습으로. 그의 어머니에게 쉴새 없이 물에 개어놓은 밥을


죽어있는 그의 어머니에게 먹이려고 애쓰고 있었다.


음식물이 시체를 타고 흘러내려 썩어있었고, 파리들이 여기저기 붙어있거나 날아다녔다.


언젠가 봤던 길가에 죽어있던 비둘기시체의 그것과 같이, 푸른빛의 죽은 피부는


쉴새 없이 피부 속 구더기들 때문에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재복이는 그의 어머니가 살아있다고 여긴 것일까. 그래서 계속 음식을 먹이려고 든 것일까.


그 토악질 나는(지금 생각하면 안타까운) 광경에 나는 문을 닫고 전속력으로 달려 그 자리를 벗어났다.


영화는커녕, 그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광경이었다. 생소하고, 생각조차 않고, 얘기조차 들어본 적 없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게 달리다 지쳐 멈춰섰고, 그 자리에서 구토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집까지 달리고 멈추기를 반복했다.


 


나 역시 그 뒤로 이틀 정도 앓아눕게 되었다.


그 집에서 본 풍경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내가 본 것을 묘사하고 싶지도, 입에 담고 싶지도 않았기에 입을 다물었다.


내 기억으론, 불행인지 다행인지 담임도 재복이에 대한 것을 그 뒤로 나에게 묻지 않았다.


4학년을 끝마치고 봄방학을 지나 5학년이 될 때까지도 재복이를 볼 수 없었고, 들을 수도 없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두루넷과 ADSL을 지나, 초고속 인터넷 광랜이라는 것이 생기고,


지난 신문들의 기사를 검색해볼 수 있는 사이트도 생겨났다.


잊고 있었던 그 날의 기억이 떠올라, 그 시절 즈음의 기사를 찾아봤지만, 도무지 찾지 못했다.


불행한 그와 그의 어머니는 그 뒤로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그 뒤로 어떻게 살아갔을까.


궁금한 것이 산더미였지만, 나는 알아낼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그 날의 생생한 장면만 필름처럼 선명하게 남아있다.


조금도 지워지거나 흐려지지 않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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