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팔자 지지론(寅卯辰) 4

사주팔자 지지론(寅卯辰) 4

G 설화 1 264 01.13 17:09



해는 돼지다.

돼지는 잡식성이다.
이것도 저것도 다 먹는다.

술에서 봉인이 되면 냉장고로 들어간다.
칼부림의 계절이 끝났으니 남은 건 죽음 혹은 휴식 혹은 캄캄한 어둠의 시간이다.

냉장고에는 포장된 이것저것이 다 들어 있다.
돼지 자체도 마치 냉장고 속 비상식량처럼 사람에게 훌륭한 식량이 되고 있다.

그럼 자는 뭔가? 해가 냉장실이면, 자는 냉동실.

해는 인오술을 겁탈하면서 밤을 부르지만, 동시에 밤의 운동이라 할 수 있는 신자진을 망신시키면서 해묘미의 목 운동으로 따라간다.

 

해는 어둡고 밤이지만, 갑목을 생한다.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드는데 사람이 바로 잠에 들지는 않는다.

해시가 되면 다음날 뭘 할까를 생각하며 이리뒤척 저리뒤척 한다.

해가 냉장실이 되는 까닭은 들어가면서 동시에 꺼내 쓸 것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때문에 완전한 저장이 안된다.

냉장고를 보면 어지간히 깔끔한 집이 아닌 다음에야 너저분하다.
돼지는 너저분한 동물이다.

그러나 너저분한 까닭은 너저분하기 위한 너저분함이라기보다는 때가 되면 꺼내써야 함을 예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가 정리의 글자가 되나 해는 항상 정리하면서도 이건 다음에 꺼내 써야 하는데 망설이면서 똑바로 정리를 하지 못한다.

밤이 되고, 겨울이 되면, 활동은 접고 휴식하면서 다음 날 혹은 다음 꽃 피는 봄을 준비한다.
밤이 되면 하루를 반성하는 도 닦는 시간이 되지만, 한편으로 밤이 되면 애정이 발생하기도 한다.

도를 닦는다는 것과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같은 일이 된다는 건가?
생각해보면 도를 닦는 거나 남녀가 사랑하여 생명을 잉태하는 거나 생명을 고민한다는 관점에서는 동일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와 해는 차이가 있다.
자는 도 닦는 거나 애정을 섞는 거 자체에 몰두하지만, 해는 갑목을 품고 있다.

해는 좀더 미래지향적이며 생산적이다.
해는 언젠가 갑목의 스프링으로 세상을 깜짝 놀래킬 포부를 품고 있다.

모든 인신사해의 생지가 미래지향적이며 생산적이지만, 해라는 글자 자체는 겨울을 열면서 어둠의 글자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좀 덜 활발한 느낌이다.

물론 신이라는 글자도 마찬가지이다.
신은 가을의 진지함과 겨울의 우울함을 동시게 갖췄다.

해는 어둠 자체이긴 하지만 갑목을 품고 있기에 우울한 가운데도 활기를 품고 있다.
어찌 보면, 생지의 미래지향적이며 생산적인 활발함의 느낌에서 가장 동떨어진 느낌은 신금이 갖고 있다.  

사오미가 여름이 되고 확산의 인자가 되며, 대낮의 활발성을 대표한다면 해자축은 어둠이 된다.
어둠 속에서 사람들은 기도하며, 미래를 꿈꾸고, 성을 나누고 새생명을 잉태한다.   

수의 글자는 음흉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는 어딘가 좀 엉성하다.
어두우면서도 활기를 갖고 있고, 정리하면서도 정리가 잘 안돼고, 차분한가 싶으면 돌출행동을 하고, 비밀스러우면서도 이따금 폭탄 발언을 한다.

잠이 들긴 들었는데 완전히 잠에 빠져들지도 않아서 뒤척이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쥐는 어두운 곳에서 활동하고 바글바글한다.
좀 징글징글 하다.

옛날에는 단순히 쥐를 자라고 불렀다기보다 한 무더기로 바글바글하는 모습을 자라고 불렀다고 한다.

자에서 일양이 생한다.
가장 춥고 어두운 곳에서 움트는 한 줄기 빛.

어찌 보면 생명의 본 모습이란 아름답고 귀엽기보다 지독하고 뜨악한 형태를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자를 냉동실이라고 생각한다.
인묘진에서 혁신한 활동이 사오미에서 알려지고 신유술에서 가치가 매겨진 다음 해자축에서 다시 인묘진을 준비하며 정보가 저장 되는데, 해는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정보로 저장된다.

종자를 보관한다는 느낌.
자를 보통 난자나 정자의 물상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 또한 마찬가지로 가장 고급한 정보가 응축되어 있는 형태로 볼 수 있다.

자가 일양 오음이었고, 해수는 육음이었다.
온통 음으로 가득찬 것과 일양을 품고 있는 정보는 다르다.

자가 일양 오음으로 꽁꽁 응축되는 것은 어찌 보면 그 속에 품고 있는 일양을 보호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따라서 오히려 육음으로 가득찬 것은 정보가 넘치기는 하는데 길이 남길 만한 정보에 대해서는 자에 비하여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해는 갑을 품고 있으므로 보다 실용적이며, 자는 당장 실용성을 따지지는 않더라도 언젠가 위급할 때는 없어서는 안될 긴요한 정보의 축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목일간이 같은 인성을 쓰더라도 해를 통해 공부를 하는 것과 자를 통해 공부를 하는 것에는 심대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자는 해에 비하면 음흉함의 정도가 깊고, 음흉함의 정도가 깊기에 깊은 밤을 사랑하고 깊은 밤을 사랑하기에 애정사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글자가 된다.

 

애정사와 관련하여 핵심이 되는 정보를 교환해야 하니 자손번식의 인자가 되고 촉촉한 눈빛과 윤활유의 샘을 만들어준다.

그러나 해는 갑을 품고 있었기에 후세를 생각한다면, 자는 보다 은밀한 사랑의 나눔 그 자체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자가 사랑의 나눔 그 자체에 몰두하는 까닭은 굳이 후세를 고민하지 않더라도 자손이 잘 생기기 때문일 것이다.

해를 생각하면 아쉬운 놈이 우물 판다는 말이 떠오른다.

게다가 자에서는 辛이 생하는데 辛은 보석이 된다.
혹은 비수가 되기도 하는데, 원초적 본능에서 샤론 스톤이 휘두르던 아이스 픽이 생각나기도 한다.

혹은 하룻밤을 보내고 보석을 요구하는 꽃뱀, 꽃제비가 생각나기도 한다.
해가 같은 밤의 글자이면서도 엉성하다면 자는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치명적인 밤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축은 소다.
소는 묵묵하다.

소를 보면 맘이 참 편하다.
소하면 여러가지가 떠오르지만 그 선한 눈망울을 빼놓을 수 없다.

한편으로 소는 좀 답답하다.

 

워낭 소리라는 영화가 감동적이었던 것은 코뚜레에 꿰어 헌신으로 일관하던 소의 삶이 노인의 저물어가는 삶과 겹치면서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사람이란 것 역시도 생로병사의 삶이라는 코뚜레에 꿰여 일평생 무거운 짐을 등에 얹고 살아가는 존재는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내내 울적한 기분이었다.

축에는 경금이 입묘한다.
살성을 띤 기운을 입묘시키니 소는 그리도 선한 눈망울을 하고 있는 모양인가보다.

그리고 경금을 단련시키는 정화도 입묘한다.
난강망에서는 금을 논하면서 축이라는 글자를 보면 금의 가치가 훼손된다고 했다.

축에서는 기토도 입묘한다.
아직 농토는 얼음이 얼어 붙어 있고 추울 때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소는 밭을 간다.
밭을 가는 이유는 씨를 뿌리기 전에 딱딱한 땅을 풀어주기 위함이다.

아직 寅이라는 글자는 오지 않았다.
소는 곧 어흥하면서 뛰쳐나올 호랑이를 예비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소라는 글자 자체는 아직 답답한 모습이다.
적어도 호랑이의 관점, 그리고 봄의 활동성의 관점에서 봤을 땐 그러하다.

소는 사유축 클럽에 속하므로, 해묘미와는 반대 방향으로 간다.
봄을 열어주기 위하여 살성을 숨기고 묵묵히 밭을 갈지만, 해묘미의 활기 자체는 용납하지 않는 모양새다.

해자축이라는 글자 모두는 정보를 저장하고 연구하는 역할을 한다.
겨울은 원래 그러한 계절이니까.

사오미에서 실컷 방방 뛰었다면 정리하고 휴식하는 시간도 가져야 한다.

 

화의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들은 보기에는 명랑 쾌활하여 즐겁지만, 그들과 시간을 보내고 나면 어딘가 가볍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때로는 어둠 속에 은폐됨을 즐기며 고독을 사랑하며 세상을 자신 안에 품어 보려는 기운도 필요하다.

해는 술에서 넘어온 정보들을 모은다.
하늘의 임수가 지상으로 내려오면 해라는 글자가 된다.

해는 일단 넘어온 정보들을 바다처럼 받아들여 모으기에 바쁘다.
그래서 정리가 잘 안된다.

하여 해는 잡학에 해당한다.
자에서 정보의 정수들을 꽁꽁 얼려 저장한다면, 자는 보다 깊이와 전문성을 보장한다.

하여 해든 자든 조용하고 내성적이라면 그 포인트는 다른 셈이다.
해는 받아들이고 흡수하려 하기에 나서지 않는다면 자는 자신 안에 정보의 정수를 응축하여 핵심을 빚어내느라 조용한 셈이다.

해와 자를 모두 가지고 있다면? 이들 만한 박사들이 없다.
예를 들어, 화 일간이 관을 해로 쓴다면 그가 다니는 직장은 이것도 저것도 다 다룬다.

반면 자를 쓴다면?
하나만 깊이 다룬다.

축은? 금목화수에 관여하므로 이것도 저것도 다 다루기는 하는데 살성과는 상관 없다.

물론 축에서 辛이 양지가 된다.
양간은 스케일과 포스가 되고 음간은 실생활이 된다.

축이 금의 살기를 다룬다면 생활과 연관해서는 가능하나 경금이라는 거대한 사법성의 스케일과는 관련이 없다.
그리고 양지라는 것도 크게 두드러진 모양새는 아니다.

축은 이미 준비되어 있으나 살성을 내보이려 하지 않으므로 조용한 셈이다.
괜히 나섰다가 봄의 파릇파릇한 새싹들이 다쳐서는 안된다는 주의다.

축은 다시금 다가올 봄을 위하여 호랑이와 토끼의 활기를 위하여, 살성이 있는 정보들을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하여, 축은 살기를 띤 진지하거나 무섭거나 심각한 주제들과는 거리를 두려한다.

축은 이미 그러한 것들은 다 해봤다는 태도이다.
마치 未가 갑목을 입묘시키기에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과 가깝다.

축은 살성을 입묘시킨다.
살성이란 판단하고 점수 매기는 역할에 해당한다.

하여 축은 순한 정보를 다룬다.
축의 연구성은 이제 봄이 오는데 미리부터 판단하지 말자는 거다.

판단보류.
그러는 한편으로 묵묵히 땅을 가는 심정으로 봄의 터전이 되어주고자 한다.

축에서 갑이 관대에 오른다.
그러나 아직 봄은 오지 않았다.

축의 연구성은 이것도 저것도 다 다루기는 하는데 해처럼 받아들이는데 중점을 두지도 않고 자처럼 정수를 뽑아내되 정수 자체에 집중하지도 않는다.

 

봄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봄은 오지 않았다.

수기운은 모두 차분하다.
해는 받아들여하니 그러하고 자는 핵심을 만들어내야 하니 그러하고 축은 새생명이 다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러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애정사든 도를 닦는 문제이든 해자축의 성분을 구분지어 생각해보면 좋겠다.

Comments

지지가 온통 물이고,
오늘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해자축에 대한 글을 읽으니
넘 춥네요.^^
자월에 태어나서인가 추위도 엄청 탑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