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비겁과 현재의 비겁

과거의 비겁과 현재의 비겁

G ㅇㅇ 1 1,583 2023.03.01 03:23

예를 들어, 개인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던 시절을 한 번 떠올려보자.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를 보면 이 때의 사람들은 하나의 인격을 가진 개인이라기보다는 전쟁을 위해 동원되는 머릿수 정도의 가치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그땐 왜 그랬을까? 하면 개인보다는 집단의 논리가 중요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것이 곧 그들의 삶의 방식이기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의 욕구를 존중하여 그들이 소질을 발휘하고 뭔가를 이뤄내기를 기다리기 보다는, 어떻게든 한 데 뭉쳐 그날그날의 먹을 거리를 걱정하고 안전을 도모하는 방식이 그들에게는 더욱 효율적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전근대성은 그렇게 먼 옛날도 아니고 이미 우리나라의 6,7십년대에도 발견할 수 있는 삶의 양식이다.

우리는 일간, 비겁이라고 하면 무조건, '나 '개인' '인격체'를 먼저 떠올린다. 그런데 사주명리학이 만들어지던 시대에 '나'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자율적인 인격체로서의 '나'는 르네상스 이후에야 발견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겁이라는 개념이 막 만들어지던 시대의 비겁과 현재의 비겁에 대한 정의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오늘날 우리는 팔자를 세우고 일간이 갑목이면, 갑목의 성향을 이야기한다. 지는 걸 싫어하고, 치고 나가는 기상이 대단하고, 자존심 강하고 우두머리 기질이 있고 뭐 대충 이런 식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옛날 책 읽어보면 별로 이런 얘기가 없다.

그냥 갑목은 목 오행인데, 목 오행은 수를 체로 삼고 화를 용으로 삼는다. 그중에서 갑목은 양목이다. 좀더 기분 좋으면 아름드리 나무. 이게 다다.

그런데 우리는 일간만 가지고도 한 시간 넘게 떠들 수 있다. 또는 떠들려고 한다. 왜 그럴까. 나에 대한 관심, 개인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커졌기 때문에 목이라는 오행을 놓고 성격적인 부분으로 해석을 하고 그런 거에 대해서 그리도 재밌어 한다.

옛날에 성격을 가진 '나'가 어디 있었나? 이 시절에는 열심히 공부해서 장원 급제를 해도 내가 성공한 게 아니라 나라의 부름을 받아서 나아간다고 표현했다.

요컨대 그 시절엔 질서를 가장 먼저 세우는 일이 중요했다. 그런 시절에 개인은 없고 포인트는 언제나 국가와 집단에 두게 된다. 마치 전쟁 이후의 우리나라처럼, 경제 건설과 북한의 위협으로부터의 국가 안정이 우선시 되어 인권은 그 이후의 순위가 되었다.

이 시기, 집단이 우선시 되는 시기에 비겁은 어떤 의미일까. 나에게서 나를 제거하고, 인격도 제거하고, 주체성도 제거하면, 남는 건 결국 몸 밖에 없다. 몸 그리고 본능. 집단에 의해서 동원되고 사용되고 벌주는 몸.

이 때의 관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몸을 극하려면 가장 약발이 받는 건 폭력. 폭력과 공포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 지금의 북한을 생각해보면 되겠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단 한 번의 시선으로도 사람을 극할 수 있고, 말 한마디로도 사람을 극할 수 있다. 굳이 폭력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괜한 말 한 마디에 사람은 상처 받는다. 하지만 이런 건 과거에 비하면 배부른 예민함일 수밖에 없다.

어쩌다 이렇게 변했을까. 푸코라는 사람은 이렇게 얘기한다. 어느 순간부터 겁주고 벌주던 단단한 권력이, 부드럽게 교육하고 감시하는 권력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뭐 어려운 얘기 같지만 사람들이 빡센 것보다는 부드러운 걸 좋아하게 되었고, 또 그럴 만한 경제적 정치적 여건이 되었다는 정도로만 정리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어쨌거나 결론은 이렇다. 옛날에는 때려야지 사람들이 말을 들었지만, 이제는 스스로 알아서 척척척 착한 어린이가 되었다는 말씀.

알아서 일하고, 알아서 나쁜 짓 하지 않고, 나쁜 짓하더라도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도록(양심도 역사적으로 발견되고 만들어진 개념임에 주목하자) 학교에서 교육해주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이런 걸 가까운 과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옛날 우리네 아버지는 맞으면서 공부했지만, 지금 우리 아이들은 알아서 자율적으로 공부하는 주체로 바뀌었다.  

우리는 이러한 질서, 이러한 관 아래 살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이전의 질서에 의해 단지 몸으로만 평가 받던 비겁은 다르게 평가받을 때가 되었다. 인간은 타율적인 개체에서 자율적인 주체로 바뀌었다.

인간은 단순한 몸이 아닌 개인이 되었고 여기에는 주체성이라는 개념이 들어오고, 개성이라는 개념도 들어오고, 무엇보다 의지라는 개념도 들어온다. 이와 동시에 관도 폭력적인 모습에서 부드럽고 온화한 인상으로 바뀌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도록 하자. 즉, 네가 오바하지 않는 선에서 나는 너를 허용한다가 되겠다.

이렇게 돼서 되게 좋은 것 같지만, 거꾸로 피해를 입은 사람도 생기게 되었다. 옛날 같으면 별로 의지 박약이라도, 자기 개성이 없더라도 즉 국가의 부름을 받아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살만 했었다. 그런데 요즘은 자꾸만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당신의 꿈을 펼쳐보세요. 지금의 모습은 당신의 진짜 모습이 아니야! 와 같은 압박이 생기게 되었다.

대기업의 누구나 부러워하는 직장인임에도 나는 나인데 왜 내가 이런 곳에서 스트레스 받으면서 일하고 있지? 하면서 괜스레 스스로의 모습에 짜증이 난다. 옛날 같으면 생각도 못할 고민이다.

이제 정리하자. 이러니 저러니 말이 많았지만 하고 싶은 얘기는 딱 한 마디다. 전체 없는 개인이 없고 개인 없는 전체가 없듯이 그 시대의 질서 즉 그 시대의 관이, 그 시대의 비겁의 양태를 조율한다.

이 둘은 서로 영향을 받으면서 변화한다. 멈춰 있지 않고 변화하여 아무래도 먼 미래에는 또 전혀 다른 방식으로 비겁을 통변하는 일도 생길 것이다. 뭐 역이란 그런 거니까.

Comments

G 2023.03.02 10:53

변화하는 역의 통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