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 관살의 속성

사주 관살의 속성

G ㅇㅇ 1 2,330 2022.11.28 13:53

관을 비겁성에 대한 조절력이라고 볼 때, 그것은 비겁성의 의지와 고집을 일종의 공공성에 대한 의식으로 막무가내 안하무인이 되지 않게끔 인도를 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비겁성이 난 내 스탈로 살 거야라고 한다면, 관살은 내가 이렇게 살면 다른 사람은 날 어떻게 볼까라는 인식을 갖게 한다.

 

관살은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이기 때문에, 누구도 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또 어느 정도 관으로부터 가치 판단을 얻고 쓰임을 얻어야 사람이란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분명히 하고, 삶의 보람을 느끼게 된다. 나라는 인식은 그냥 생겨나지 않는다. '나'는 전체가 없으면 성립이 불가능하다. '나' 없는 전체가 없고, 전체 없는 '나'가 없다. 하여 관과 비겁은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인 셈이다. 굳이 번듯한 직장을 잡지 않더라도, 의사 검사가 되지 않더라도, 관살을 잘 쓰는 사람은 필경 사람들의 눈에 저 자식이 왜 저렇게 사나 하는 모습으로 비치지는 않는 삶을 산다.

 

우리는 흔히 고민을 한다. 한 인간으로서의 삶과, 사회적 존재로서의 삶. 누군가는 팍팍한 관의 생활에 자신의 삶을 찾길 갈망하고, 누군가는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사회적인 쓰임을 얻고자 한다. 이 둘을 같이 가져가는 문제가 쉽지는 않다. 어느 한 쪽으로는 치우치기 마련이다. 이 때 어느 쪽이 더 좋은 삶인가를 가름하기 또한 쉽지 않은 문제이다.

 

팔자 안에서 비겁이 많은데, 관살이 조절력을 잃어버리면 이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일 것이다.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은 받겠지만, 그러나 자기 마음대로 사는 건 정말이지 속 편한 삶이지 않은가. 또한 모두가 의사 변호사를 동경하지만 실제로 TV에 나오는 그들의 삶은 굉장히 바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지치고 힘든 삶이지 않은가. 음양. 음양. 언제나 단정은 금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는가를 나는 생각해봤다. 나는 언젠가 관살이란 특정 사회의 가치 기준들에 대한 민감성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 사회의 약속 가운데 쓰레기 버리지 말자라는 게 있다. 이건 그렇게 크거나 반드시 지켜야 할 가치 기준은 아니다. 하지만 일상화 되어 있는 가치 기준이기는 하다. 이 정도 기준은 딱히 민감하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사람은 지키고 산다. 살인하지 말라거나, 도둑질하지 말라거나 이런 건 딱히 민감하지 않아도 된다.

 

정말 디테일한 건 따로 있다. 예를 들어, 화가 나서 싸우게 되는 상황을 떠올려보자. 싸움이란 방식에서

하수들은 주먹이 먼저 나간다.

중수들은 거칠게 말싸움한다.

고수들은 웃으면서 여유 있게 벤다.

여기에는 감정을 드러낼수록 지는 거라는 싸움에 대한 어떤 가치 기준이 들어가 있다. 자신은 전혀 다치지 않으면서, 또는 다치지 않으면서 남을 베는 것이 보다 그럴 듯 하고 사회적으로 용인됨을 넘어 멋있게까지 느껴진다.

 

그런데 이런 건 누가 가르쳐주는 게 아니다. 스스로가 이 사회에는 그런 것이 있다는 것에 감수성을 가지면서 터득해야 한다. 관살의 민감성이란 건 이런 거다. 가장 괜찮아 보이는 것을 선별하여 미리 선점하는 속성이다. 그리고 가장 괜찮은 기준이란 건 그 만큼 희소하고 보통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노래방을 간다고 치자. 술도 얼큰하게 취했다.

하수들은 노래방 도우미를 찾는다.

중수들은 뭔가 신나는 노래를 누른 것 같긴 한데 언제나 반응이 심심한 노래만 찾는다.  

고수들은 어떤 노래를 해야 신날지 안다.

초고수들은 춤추며 망가짐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관살이란 어디에서든 이러한 레벨이 있음을 찾아내고 거기에 대해 민첩하게 반응하는 속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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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2022.11.29 06: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