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추리) 차바퀴 아래 인생

(공포추리) 차바퀴 아래 인생

G ㅇㅇ 1 2,263 2022.10.04 09:32

새까만 밤이다. 달도 별도 보이지 않는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심은 살짝 눈을 떴다. 어둠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 그렇지만 깊고 깊은 밤처럼, 끝을 알 수 없는 골짜기처럼 암흑이었다. 심은 간이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신이 누웠던 방향을 기준으로 주변의 가구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심이 누워있는 휴게실은 바깥의 빛이 통하지 않는 곳이다. 예전에 어떤 용도를 썼는지 모르지만 창문이 달려 있지 않았다. 심이 상상한 지점의 캐비닛의 윤곽만 겨우 드러날 뿐 여전히 심은 적막 속에 있었다.

  암흑 속의 너무나 고통스러운 적막함은 심으로 하여금 죽음을 연상케 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눈과 귀를 잃어버린 사람과 같았다. 자신의 존재를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되자 심은 허공에 붕 떠버린 느낌이 들었다.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다. 심은 고개를 밑으로 빨려드는 환상에 빠졌다. 실제로 심의 몸이 앞으로 숙여졌다. 그는 바닥을 짚고 몸을 지탱했다. 고개를 숙이고 침대 바닥을 바라봤지만 여전히 그곳에는 어둠이 있었다.

  새빨갛고 하얀 점들이 점점 다가왔다. 그리고 서서히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는 그것의 모습을 뚜렷이 봤다. 점으로 시작하여 뚜렷한 단상들을 보이고는 심의 귀와 얼굴 옆으로 스쳐갔다. 끝없는 행진이었다. 참담했다.

  그 이미지들은 시체였다. 그가 죽이고 구덩이를 파고 묻어버린 시체들. 얼굴은 두들겨 맞아 새빨갛고 회색과 검은색, 흰색이 점점이 박힌 교련복을 입은 사람들이었다. 그것은 잊혀지지 않았다. 그건 심이 보통 사람이라는 증거였다. 차가운 피를 가진 학살자는 아니다.

  80년 5월의 그 경험들은 심의 인생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그에게서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곳곳에서 나타나 그의 정서와 이성을 후벼팠다. 그의 정신 세계는 80년 5월의 절대적인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총격을 받고 이미 죽었거나 혼절해 있었다. 군인들은 그들을 수레에 실어 산으로 올라갔다. 이미 그들은 쓰러져 있었기 때문에 구덩이를 파라고 할 수는 없었다. 군인들이 구덩이를 팠다. 사람들을 발로 밀어버리고 총을 들어 조준을 하고 빵. 빵. 빵. 그리고 흙을 덮었다.

  심은 그들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심이 그들을 생각할 때는 얼굴 표정과 흔적, 널브러진 자세를 모두 뚜렷이 연상해 낼 수 있었다. 항상 시체를 보는 심이지만 그들의 얼굴을 뒤덮어버린 피는 심을 공포와 고통으로 밀어 넣었다. 80년. 그는 그들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그것은 죄책감이었다.

  군에서 제대한 후 몇 년이 지나 광주로 갔었다. 주둔했던 산으로 갔지만 시체를 묻어버린 그곳은 찾을 수 없었다.

  심은 캐비닛의 뚜렷한 형체를 볼 수 있었다. 멍한 상태로 캐비닛을 바라봤다. 눈동자를 굴리고 고개를 움직이지 않은 채 주변을 살폈다. 심은 캐비닛의 손잡이까지 세밀하게 식별할 수 있었다.

  뚜벅. 뚜벅. 구두 소리.

  심은 비로소 현실에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심은 이불을 걷어내고 문을 바라봤다. 문이 열리고 빛이 들어오자 반가웠다. 그는 자신이 있던 곳이 지옥 같이 느껴졌다.

  [심형사님?]

  [지금 몇 시지?]

  [어디 보자.] 그는 빛을 등지고 있어서 그의 모습은 사람의 윤곽에 새까만 칠을 한 것 같았다.  [11시 45분이요.]

  어렴풋이 계산해 보니 1시간 동안 누워있었다. 어둠 속의 남자는 다시 말했다.

  [출동하셔야겠는데요. 어느 불쌍한 인간이 또 세상을 등졌습니다.]





  심은 관할 경찰서의 형사들과 함께 차를 타고 현장으로 갔다. 채 5분이 걸리지 않는 곳이었다. 좁은 골목을 지나자 넓은 공터가 나왔다. 주차장으로 쓰는 곳이었다. 자동차들이 십여대가 있었다. 노란색 폴리스 라인은 보이지 않았다. 순찰 경관 몇 명이 주차장 사각에 버티고 서서 혹시 몰려들지 모르는 구경꾼들이 오는지 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현장 보존을 위해 폴리스 라인을 둘러야 하지만 자동차가 밀집해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난감해했다.

  오른쪽 사각에 있는 순찰경관에게 다가가자 그는 경례를 했다.

  [응. 신고 언제 왔어?]

  그는 수첩을 흘끗 봤다. [그러니까 오늘 새벽이죠. 1월 24일 새벽12시 54분쯤입니다. 이름은 안 밝혔고요. 번호를 보니까 공중전화로 걸었습니다.]

  [씨발. 처음 발견한 목격잔데 모르면 어떡해. 조서 써야 되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심의 얼굴 피부를 파고들었다.

  심은 현장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어디야?]

  [저쪽입니다. 프라이드요.] 그는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는 앞장서서 현장으로 걸어갔다.

  운전석의 문은 열려 있었다. 밑을 보니 한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작은 머리에 두꺼운 점퍼. 뒤의 형사들은 사진기를 꺼내 시체 주변을 둘렀다. 찰칵. 찰칵. 셔터 소리와 함께 불빛이 반짝거렸다. 남자의 가슴과 머리 밑으로 시뻘건 피가 고여 있었다. 남자의 셔츠는 빨갛게 젖어 있었다. 원래 옷의 색깔이 빨간색인 것 같지는 않았다. 새빨갛고 새까만 곳이 보였다. 이곳이 흉기가 들어간 곳이다. 언뜻 보기에도 십여 군데를 찔린 것 같았다.

  심은 비닐 장갑을 꼈다.

  [프라이드를 기준으로 옆의 차바퀴 밑까지 싹 흝어. 특히 머리카락, 음모, 손톱. 기타 등등. 증거라고 생각되면 전부 봉지에 집어넣고 증거거리가 안 될 것 같아도 핀셋으로 집을 수 있는 것은 다 집어넣어.]

  다른 동료들과 함께 심은 돋보기를 꺼내 들고 차 주변을 기어 다녔다. 뭐가 뭔지도 모르지만 심은 잡초까지 수집용 봉투에 집어넣었다. 수집품은 작은 박스에 수북히 쌓였다.

  주가 물었다.

  [어디에서 공격했을까요?]

  심은 주변을 둘러봤다. 엄폐물은 많았다. 골목길 입구는 가로등과 거리가 멀어서 어두웠다.

  [빈 공터가 많은데? 차에서 기다렸을 수도 있고 어디선가 달려나왔을 수도 있고.]

  강이 봉투를 가져왔다.

  [심형사. 이것 좀 보지.]

  [뭐야?] 심은 봉투를 받아들었다.

  [이거 머리카락인가? 꼬불꼬불하진 않은데?]

  [어때?]

  [글쎄. 아직은...] 봉투에 담긴 것은 황금색 머리카락이었다. 오직 한 올이었다.

  [또 있나?]

  강은 고개를 흔들었다. [없어.]

  [어느 양아치가 지네 나라에서 할 일이 없어서 여기까지 와서 행패야.]



  앰뷸런스가 도착했다. 주황색 옷을 입은 고마운 인간들이 시체를 실어갔다. 시체는 병원 영안실로 실려갈 것이다. 시체가 있던 곳은 스프레이로 표시를 했다. 머리와 몸, 팔과 다리. 윤곽선만 그려진 그 곳은 어설픈 사람을 그리려다 건성건성 스케치만 해놓은 모양이었다. 이곳은 사람이 살해된 곳이다. 불길한 곳으로 낙인찍힌 이곳에 주차하는 차는 없을 것이다. 사람이 죽은 곳을 피하는 것은 본질적인 두려움 때문이었다.





  문이 열린 차가 옆에 쓰러진 사람의 소유라는 것은 명확했다. 심은 차량 번호를 조회해서 피살자의 신원을 파악했다. 한 시대와 공간을 점유하고, 영혼을 소유했던 인간. 누군가에게 쓰라린 고통으로 영원히 기억될 사람. 이름은 장대선이었다. 가족은 아들 하나였다. 그들은 작은 아파트를 빌려 살고 있었다. 매월 집세를 내야 하는 집이다.

  사람이 자주 바뀌고 옮기고 이사오는 곳이라 그런지 그들이 세 들어 사는 아파트는 흰 페인트칠에 그런 대로 깨끗했다. 관리인에게 물어보니 오피스텔 주인도 이 건물 일층에 살고 있었다. 심과 주는 주인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주가 아주머니를 불렀다.

  [아주머니!]

  안에서 쿵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예. 나가요.]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여자는 문을 활짝 열었다. 붉은 색으로 염색한 머리는 어깨까지 내려왔다. 동그란 이마는 앞머리로 가렸다. 나이는 30대 후반. 그 이상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인상이 좋은 사람이었다.

  심은 신분증을 들었다. 여자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신분증을 뚜렷이 응시했다. 그리곤 형사 일행을 바라봤다.

  [무슨 일요?]

  [여기 장대선씨라고 사시죠?]

  [예에. 저기 3층]

  [사실 그것 때문에 왔습니다. 아들이 하나 있죠?]

  [에. 있어요. 근데 지금 집에 없는데.]

  [어디로 가야 하죠?]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죄 지을 사람은 아닌데?]

  [조금 안 좋은 일이 발생했습니다. 장대선씨가 저 세상으로 가셨습니다.]

  [어머!]

  여자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불쌍해서 어떡하나. 아들도 지금 병원에 있는데. 세상에나.]

  [병원이요? 어느 병원입니까?]

  [어느 놈팽이하고 싸움이 붙어 가지고 여러 군데 뿌러졌어요. 저기 정형외과에 입원했어요.]

  주는 수첩을 황급히 넘겼다.

  [어딥니까?]

  [한상 정형외과라고. 저기 사거리에 있는데.]

  [음. 알았습니다. 협조해줘서 고맙습니다.]

  [아이고. 참. 세상이... 무섭네.]

  [아. 이왕 온 김에 집을 한 번 둘러보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여자는 좀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글쎄요. 뭐. 그 사람들이 나쁜 짓한 것도 아닌데. 아이 뭐. 알아서 하세요. 들어가서 열쇠 가져올께. 여기 있어요.]

  여자는 열쇠를 들고 직접 문을 열어줬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서 이것저것 둘러봤다. 아담한 거실 하나에 작은 방이 둘 있었다. 여자는 밖에서 형사들의 모습을 보는 듯 하더니 밑으로 내려가 버렸다. 집은 깨끗했지만 사람의 채취가 희미했다. 남자 하나가 가족도 없이 혼자 지내려니 모든게 생략될 수밖에 없었다. 심의 상식으로 이 집은 굉장히 작았지만 그나마 그들의 활동영역이 협소했다. 가족이 없으니 거실을 쓸 일도 없었다. 잠을 자기 위한 방 하나, 간단한 저녁을 하기 위한 부엌. 나머지는 활용할 필요가 없는 공간이었다.

  집안 곳곳도 깨끗했다. 장식이 없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거실 한 가운데는 중간 크기의 책장 하나가 있었다. 그 이외의 공간에 책은 보이지 않았다. 심은 가만히 서서 책제목을 훑어봤다. 이름 있는 스릴러 작가의 작품들. 간간이 꽂힌 추리소설. 정리되지 않은 토지 16권. 또다시 정리되지 않은 유명한 대하소설들. 가치를 가늠할 수 없는 통속소설. 그리고 이칸저칸에 꽂혀있는 책들이 눈에 띄었다. 노엄 촘스키, 존 하워드.

  그들은 미국에서 유명한 반정부인사였다. 촘스키는 MIT의 석좌 교수였다. 전공은 언어학이지만 넘치는 시민적인 의무감으로 미국의 어두운 부분을 폭로하고 있었다. 하워드의 <오만한 제국>이 한 권. 그리고 촘스키의 책은 눈으로 세어본 것만 서너 권이 되었다. 미국에서는 반정부인사, 반정부서적으로 불리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이 책들은 반미서적으로 불렸다.

  오직 한 올이기 때문에 불안한 황금색 머리카락, 피살자 장대선의 반미 성향.





  하얗던 하늘이 해가 지면서 새빨갛게 변했다. 퇴근 시간이 되면서 꾸역꾸역 회색 차들이 도로를 채웠다. 병원은 집에서 가까운 거리지만 큰 도로를 지나야 했다. 8차선 도로로 진입하는 데 꽤 시간이 걸렸고 한 중간에 들어섰을 때는 속력을 낼 수 없었다.

  심은 오래된 승용차의 상석에 앉아 도로를 채운 차들을 바라봤다. 대게 나온 지 10년 이내의 작은 자동차들이 반절이었다. 커다란 고급 승용차도 제법 있었다. 그리고 외제 자동차들. 대형 승용차와 중형차, 스포츠 쿠페. 자본주의 사회에 걸맞게 도로 위의 모습도 다양했다.

  병원에 이르는 작은 도로로 들어가기 위해 깜박이를 켜고 신호를 기다렸다. 그 때문에 안 그래도 꽉 막힌 도로가 혼잡해졌다.

  병원은 건물 앞에 작은 주차장을 가지고 있었다. 퇴근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남은 주차 공간이 없었다. 운전을 하는 주는 도로 가에 차를 주차했다. 그들의 차 옆에는 키가 크고 비쩍 마른 가로수가 심어져 있었다. 곧게 뻗지 못하고 한쪽으로 기울어 자랐다. 심은 그것이 애처로웠다.

  심이 병원 안으로 들어가자 데스크를 지키고 있던 간호사가 진료 시간은 끝났고 면회시간도 지났다고 말했다. 그들은 신분증을 보여줬다.

  [누구 찾아오셨어요? 원장 선생님이요?]

  심은 고개를 저었다.

  [장성운이란 환자요.]

  [아.]

  간호사는 장성운의 아버지가 죽은 것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녀는 수화기를 들고 형사들을 언급하며 통화했다. 책임자한테 보고를 하는 모양이었다. 전화를 끊고 간호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서 가보라는 말을 했다.

  병실은 이 인용이었는데 문 앞에 써 붙인 표찰에는 장성운이라는 이름만 있었다. 상심을 했을 텐데 옆에 아무도 없다는 말이었다. 불행한 젊은 시절이고 불행한 청년이었다. 그는 침대에 앉아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인기척이 있었지만 고개를 들지 않았다.

  [장성운 씨. 안녕하십니까.]

  그는 고개를 들었다.

  [누구십니까? 아는 분들이 아닌데요.]

  [형사들입니다.] 주가 옆에서 거들었다.

  [아...그렇군요. 어쩐지 눈에 익은 분들이 아니었습니다. 제 사람은 아닌 게 확실하고. 아버지 친구들도 아니거든요. 요새 자주 오십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요.]

  [예. 미안합니다.] 심이 말했다.

  [명복을 빕니다.] 주가 말했다. 침대에 있는 환자는 힘없이 눈을 내리깔고 침묵했다.

  [몇 가지만 물어봅시다. 대답하기 힘들면 안해도 됩니다. 나중에 말해주면 됩니다.] 그는 고개를 들고 형사들을 바라봤다.

  [아버지한테 애인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이혼하신 지 꽤 됐거든요.]

  [아니...그러니까 애인이 있냔 말입니다.]

  [저랑 계속 같이 사셨습니다.]

  [알았습니다.] 주는 살짝 인상을 쓰는 심의 옆얼굴을 봤다.

  [어머니는?]

  [모릅니다. 어디 계신지.. 살아 계신지.. 어떻게 사는지..]

  [아버지 직업은 어떻게 됩니까?]

  [출판사에 다니셨죠. 저도 졸업하고 책장사를 해볼까 생각 중이었습니다.]

  [사업을 하셨습니까?]

  [월급 쟁이셨죠.]

  [혹시 원한 가진 사람은 있었습니까?]

  순간 그의 어깨에 힘이 빠지는 것이 보였다. 심은 무의식적으로 과거형을 썼던 것이다. 그것은 그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상기시켰다.

  [없습니다. 제가 알지 못하는 일은 없습니다. 원한 살 만한 일이 있다면 제가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심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렇군요.]

  그의 마음을 밝은 곳으로 돌리기엔 심의 호의는 미약했다.

  [혹시 미군과 관계된 일이 있습니까? 아니면 미국 쪽.]

  [없습니다. 젊었을 때는 시위도 좀 하고 그러셨다더군요. 주동자도 아니었습니다.]

  [집에 반미서적이 좀 끼어있던데요.]

  [시위 주동자는 아니었지만 일반적으로 그 주장에 동의는 하셨나봅니다. 저는 잘 모릅니다. 그 책은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깊은 침묵이 흘렀다.

  [아! 다리는 어떻게 다쳤습니까? 싸웠어요?]

  그의 입에서 ‘훗‘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는 선천적으로 투쟁심이 없습니다. 싸움을 싫어하죠. 아니 무서워합니다. 특히 양아치는요. 저는 싸움 보는 것도 싫어합니다. 옆에 있으면 심장이 떨리거든요.]

  그는 허리를 편 후 벽에 배게를 놓고 등을 기댔다.

  [하지만 내가 아무것도 하기 싫어하는 낙오자는 아닙니다. 내가 목표하고 있는 일에는 성실하고 뚝심 있게 임합니다. 투지하고는 다르죠. 그건 상스러운 겁니다.]

  [상황을 좀 더 자세하게 구상해보시죠.]

  [그놈한테서 술 냄새가 났습니다. 그리곤 알아듣지도 못하게 웅얼거리더니 나를 냅다 들어 매쳤습니다. 모습을 보진 않았지만 맞아보니 손에 뭔가를 들었더군요. 딱딱한 거였습니다. 경찰에선 피묻은 파이프를 보여줬습니다.]

  [재판은 어떻게 됐습니까?]

  [진행중입니다. 아비란 놈이 찾아왔었습니다. 돈을 준다고 했습니다. 꽤 큰돈이었는데...거절했습니다. 저도 아마 그랬을 겁니다. 저하곤 직접 만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단호히 합의를 거절했죠.  괘씸했습니다. 그냥 감옥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젠 어떡할 겁니까?]

  [후우. 이번에 오면 받아줘야죠. 장례도 치러야 되고. 이젠 저 혼자 남았습니다.]



  그들은 경찰서로 돌아왔다. 주는 한쪽 구석에 앉아 몇 가지 자료를 들춰보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밤은 깊어져서 새벽으로 치달았다. 주위가 조용해지자 컴퓨터에서 윙윙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장대선을 찾고 장성운을 찾았다. 사건 기록. 기소된 자는 황일룡이라는 자였다. 아버지는 황변길. 중고차 매매상. 단순한 호기심이 생겼다. 전과 기록.

  아버지 황변길은 사기전과. 황일룡은 폭력 전과가 있었다. 형을 선고받은 한 건은 합의를 못했을 것이다. 합의한 사건은 몇 번일까.





  황변길의 중고차 상점은 도시의 외곽에 있었다. 다른 도시로 이어지는 8차선의 널찍한 도로를 달렸다. 이전에 있던 회색 빛의 도로와 새로 아스팔트를 깔고 흰 색 선을 그은 새까만 도로가 명료하게 대비되었다. 날씨는 좋았다. 그러나 기분은 좋지 않았다.

  미리 연락은 했다. 그 사람이 어떤 태도로 나올지는 몰랐다. 들어가는 길에 보니 주차된 차들이 많았다. 높다란 철망이 커다란 상점을 둘러싸고 있었다. 차를 몰아 철창 정문을 통과하고 아무데나 빈곳을 찾았다. 군데군데 외국 차량들이 보였다. 유럽 차는 보이지 않았다.

  사무실의 문을 열자 딸랑딸랑 쇠종이 울렸다. 여자 비서는 즉각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여유롭게 들어오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손님용 테이블과 소파는 비어있었다. 탁자에는 치워지지 않은 찻잔과 물병이 있었다. 심은 형사증을 보여줬다.

  [사장님 어디 계신가?]

  여비서가 손을 들어 한쪽 방을 가리키려는 순간 배불뚝이 남자가 나왔다.

  [아! 들어오십시오.]

  여자는 사장이 나오자 그대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널따란 책상에 백과 사전이 가득한 책장. 고급 탁자와 소파가 있었다. 벽에는 점으로 그린 듯한 애매하고 추상적인 그림 한 점이 걸려 있었다. 소재는 고깃배였다. 배의 밑부분은 녹이 슬어 주황색이었다. 모래사장인지 항구인지는 모르지만 배는 한쪽으로 조금 기울어 있었다.

  남자는 긴장한 것인지 기분이 나쁜 것인지 얼굴이 굳어있었다.

  [앉으시죠. 앉아서 얘기해야지. 아. 난 뭐 별로 할 얘기는 없는데...]

  심과 주는 의자에 앉았다. 소파에서 뿌드득 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고 비서가 차쟁반을 들고 왔다.

  [됐습니다. 그냥 얘기하죠.]

  사장은 손을 저었다. 여자는 문을 살며시 닫았다.

  [장대선씨 아시죠?]

  [아! 그 사람. 알죠. 왜 모르겠습니까.]

  [피살당했는데 그것도 아십니까?]

  [아. 그 아들한테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오늘 전화해서 오라고 해서 갔습니다.]

  [합의해주덥니까?]

  [그럼요. 안 해줄 게 뭐가 있습니까. 우리 아들이 크게 잘못한 것도 아니에요. 법적으로 문제가 있는 거지. 어차피 싸움하면 다 똑같은 거 아닙니까?]

  [여기저기 많이 부러졌드만요.]

  [아. 그건. 싸움하는 방식이 틀려서 그렇지. 막을 때 막고 때릴 때 땔고. 잘 막아야지. 이것도 요령이 있는거에요. 멍청하게 손만 들이대고 그러니까 부러지지. 에이. 멀쩡한 자식이 엉뚱한 곳에서 몇 달째 옥살이하고 있으니. 정말 지랄 같습디다.]

  [음. 1월 23일 밤에서 24일 새벽까지 어디 있었습니까?]

  [밤 아닙니까. 잤지요. 집에서.]

  [확인해줄 사람은...?]

  [집사람이요.]

  [그 장대선씨란 사람은 왜 합의를 안 해줬답니까?]

  [아. 그 재수 없는...뭐가 그리 억울하고 분하고 미운지. 합의금도 많이 제시했습니다. 처음부터 응하지를 않는다니까요.]

  [감정 대립은 없었습니까?]

  [아. 감정 대립이야..뭐... 많이 싸웠죠. 언성도 높이고 그랬습니다.]

  [뭐라고 했습니까?]

  [뭐...양아치라고. 도둑놈 새끼도 도둑이고, 도둑놈 마누라도 도둑이라고. 흥. 미친 새끼.]

  심은 수첩을 덮었다.

  [뭐 알리바이야 가서 물어보면 되니까. 그렇다 치고. 차가 상당히 많네요. 장사가 잘 된 갑네요.]

  [아. 뭐. 그저 장사야. 뭐.]

  [외제도 취급하십니까? 미국차들이 좀 있던데요?]

  [아. 차에 대해 잘 아시나 봐요. 남들은 외제찬줄만 알지 회사까지는 모르거던. 어디껀지나 아니까 어느 나라껀지도 아는 거 아닙니까? 미국차 좋아하세요?]

  [그 차는 어디서 구합니까? 국내 사람들입니까?]

  [흠. 아닙니다. 그쪽에 사람이 좀 있어요. 아는 사람이.]

  [혹시. 미군과 관계된 사람이 있습니까?]

  [없어요. 그런 사람. 내가 아는 사람은 군인 아니요. 장사꾼이지.]





  국과수에서 사건에 관한 총체적인 분석 결과가 도착했다. 부검과 증거 자료. 흉기는 심장과 위장 등 장기를 훼손했다. 그것만으로도 즉사다. 절창으로 죽지 않았다면 피를 많이 흘려 쇼크로 죽었을 것이다. 요술쟁이 국과수 사람들은 다른 정보도 추가하였다.

‘흉기는 미군용 M9 대검. 범인은 한 명으로 보인다. 두 명 이상이라는 정황은 보이지 않는다.’ ‘시체가 있던 문 쪽에서 발견된 머리카락. 백인의 것이고 혈액형은 B형.’

  범인이 미군이라면 군기지 하나를 들쑤셔야한다. B형 병사의 DNA를 모두 채취해 비교해야 한다. 국과수에선 머리카락에 모근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비교는 가능했다. 할 수만 있다면, 현실이 뒷받침만 된다면 범인을 잡을 수 있다.



  계장과 검사에게 청원을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미군 근처에 가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탐문도 안되고 병사를 취조하는 것도 금지됐다. 중요 인사가 살해됐다 하더라도 검사들은 법조문을 들추며 조심스러워 할 것이다. 계장은 기본적으로 국과수를 믿지 못하겠다고 했다. 그 미군용 대검이라는 것도. 그 칼은 미국 칼이고 미국 놈이면 모두 하나씩 가지고 있는 칼이라는 것이다. 남은 것은 주인 없는 머리카락과 B형 혈액형과, DNA샘플이다. 대응시킬 대상이 없으면 아무 가치도 가질 수 없는 존재들.



  그 날 장성운이 퇴원을 했다. 장례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예정보다 빨리 퇴원했다. 이후에도 어차피 진료를 받아야 하지만 입원을 하는 대신 통원 치료를 하기로 했다. 심은 이미 싸놓은 짐을 경찰 차에 실었다. 그는 무표정하게 심이 실어 나르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는 한쪽 다리와 한쪽 팔이 성치 않기 때문에 그도 그의 몫을 들고 날랐지만 한계가 있었다. 두 사람이 한 번씩 움직였다. 짐은 적은 편이었다.

  [그 날 아침에 합의해줬나?]

  [예.]

  [얼마야?]

  [삼천.]

  [흥.] [다리는 괜찮아?]

  [괜찮습니다. 움직일 수 있는데요. 뭘. 저도 빨리 처리하고 빨리 잊고 싶습니다.]

  [장례가 언제야? 연락해.]

  [그러죠.]

  그는 차의 뒷좌석을 모두 차지하고 누워 반대편 창 밖을 내다봤다.





  돈이 필요할 것이다. 미국 돈. 환전할 수 있는 곳을 찾다가 이름을 보고 외환 은행을 들어갔다. 외환이란게 외국 돈 아닌가.

  단지 확인하고 싶은 거다. 그걸로 끝난 것이다. 이것은 나의 한계다. 심은 스스로의 감정과 욕구를 안에서 쓰다듬었다. 공군 기지로 향하는 길은 전용 8차선 도로였다. 길옆으로 공항이 보였다. 머리가 파란 비행기들이 서있기도 하고 떠오르기도 했다. 부대 정문으로 가까이 가자 버티고 서있던 보초가 그를 노려봤다. 심은 차를 돌려 옆에 나있는 샛길로 들어갔다. 심은 예전에 이곳에 살았다. 미군 기지와 한국 공군 기지. 국제 공항. 세 기관이 위치하고 얽혀 있는 지리를 잘 알았다. 미군 기지의 주변은 모두 차로 둘러볼 수 있었다. 곳곳에 의경들이 부대를 지키고 있었다. 길은 좁았다. 심은 골목에 차를 주차시켰다.

  미군 기지 골목에 나란히 붙어있는 술집과 바는 세 곳. 사람은 없었다. 의자가 탁자 위로 올라가 있지는 않았다. 바텐더는 심이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심은 가게 안을 두리번거리다 곧바로 바텐더에게 다가갔다. 그는 혼혈이었다.

  [헤이. 하이?]

  그는 살며시 미소지었다.

  [한국말 몰라?]

  [그냥 말씀하십시오.]

  [술 있지? 일단 한 잔만 줘봐.] 심은 달러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놨다. 그는 냉장고에서 술병을 꺼내 잔에 따르고 얼음을 하나 떨어뜨린 후 심 앞에 놓았다.

  [브랜디입니다. 마셔보셨습니까?]

  심은 한 모금을 들이켰다.

  [아니.]

  심은 비스듬히 앉아 한쪽 팔은 바에 놓고 한 손에 잔을 들고 그가 들어왔던 문을 응시했다. 꼬박 한잔을 다 마신 후 바 위에 잔을 올려놨다.

  [한 잔. 모어. 플리즈.]

  [예스. 써.]

  심은 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바 위에 올려놨다. 바텐더는 잔을 심에게 주고 사진을 봤다. 심은 다시 달러를 꺼냈다.

  [뭡니까? 이 사람은?]

  [본 적 없어?]

  [무슨?]

  [살인. 살인 모의. 살인 청부.]

  [본 적 있습니다. 몇 주 전에요. 바로 이 곳에서 술을 마셨습니다.]

  [같이 마신 사람은 없었나?]

  [왜 없겠습니까? 천하의 양아치였죠. 본국에서도 사고 치고 여기로 온 겁니다. 말하자면 그런 거죠. 감옥 갈 거냐 군대 갈 거냐. 그래서 온 놈입니다. 몇 번 나한테도 잔을 던졌기 때문에 잘 알고 있습니다.]

  [혈액형도 알아?]

  그는 달러를 주머니에 넣고 뒤돌아 찬장을 매만졌다. 심을 향해 몸을 돌린 그는 심에게 술이 가득한 잔을 내밀었다.

  [서비스입니다.]





  심은 장례가 시작된 후 마지막 날 장례식장에 갔다. 사실 거기 머무른 것은 아니었다. 탈상을 하기 위해 관을 버스에 실어 화장터로 향했다. 장대선은 불교 신자였다. 장례식을 하는 3일 동안 그는 눈물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화로 안으로 사라지자 그는 무너져 버렸다. 목발은 흩어졌고 한쪽 다리는 풀렸다. 균형을 잃고 그는 한쪽으로 쓰러졌다. 심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대기실로 들어가자 고인의 화장을 기다리는 가족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멍한 시선으로 모니터에 나오는 화장완결 예정시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대선의 시신은 5분 후 화장이 완료될 것이다. 화장이 끝나자 관을 실었던 철침대가 화로에서 밀려 나왔다. 그곳은 유리로 되어 가족들이 관람할 수 있었다. 하얗게 남은 뼛가루들이 보였다. 직원은 입에 마스크를 쓰고 빗자루와 쓰레받이를 들고 뼛가루를 쓸어 담았다.

  심은 장성운에게 항아리에 담은 뼛가루를 어떻게 할거냐고 물었다. 그는 장지에 묻고 작은 비석을 세울 거라고 했다. 황일룡은 그 날 기소가 중지되어 교도소에서 풀려 나왔다. 한 사람은 가정으로 돌아오고 한 사람은 완전히 이 세상을 떠났다. 명료한 대비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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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2022.10.04 1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