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살과 권위와 살기

관살과 권위와 살기

G ㅇㅇ 1 2,182 2022.10.02 11:19

우리의 일상은 선택의 연속이다. 하다 못해 음료수 하나 먹을 때도 고민을 해야 한다. 콜라와 사이다 가운데 콜라를 고르면 사이다라는 선택지는 사라진다. 하나의 선택은 다른 것을 선택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선택은 선택. 사이다에 대한 미련은 버리도록 하자. 콜라를 손에 쥐고도 여전히 사이다가 아쉬운가?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사이다에 대한 미련은 곧 나의 선택에 대하여 내가 져야 하는 책임이기도 하다.

 

나의 선택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을 지지만, 종종 다른 사람의 선택을 대신해야 할 때도 있다. 예를 들면, 중국집에 들어가서 복잡하게 시키지 말고 짜장면으로 통일해! 라고 외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에 대해서 동조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결국 그의 말대로 짜장면으로 통일했고 음식이 나오는 시간은 단축되었다. 하지만 그 시간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C는 타인의 취향을 존중할 줄을 몰라. C는 기다림의 미학을 몰라. 그저 빨리 시켜 먹고 나가면 그만이지. 하지만 여러분, 그렇게 C를 씹기 전에 여러분이 먼저 총대를 멜 생각은 없으셨는지요?

 

C는 나름대로 최선이라고 생각해서 제안했던 것이었지만, 욕을 먹는다. 선택이란 건 그런 거다. 이걸 선택하면 저건 희생된다. 그러므로 선택이란 것 또한 칼을 휘두르는 것과 성질이 동일하다. 무엇을 살리고 무엇을 희생할 것인가? 양날의 검. 어떻게 하면 모두가 윈윈하는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하지만 숙고를 거듭한 판단이 모두를 희생의 제물로 전락케 할 수도 있다. 이런 걸 바로 장고 끝에 악수둔다고 한다. 중대한 판단을 내릴 때 우리는 '결단'이라는 말을 쓴다. 여기서 단斷은 끊을 단을 쓴다.

 

의사든 변호사든 역술가든, 기업의 팀장이든 과장이든 대리든, 위대한 탄생의 김태원이든, 이은미든 그들은 모두 결단을 내리고 선택을 한다. 좀 더 예리한 판단을 하고 그들의 판단이 존중할 만한 판단일수록 그들 칼 든 사람의 레벨은 올라간다. 동시에 그들이 욕먹을 기회도 올라간다. 높은 권위로 올라간다는 건 그들의 판단 자체가 의문에 붙여질 기회가 많아진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내가 날린 칼이 나에게 날라오는 것이다. 잘 날린 칼은 나의 권위를 세워주고, 이상하게 날린 칼은 욕 먹을 기회를 제공한다.

 

대통령이 휘두르는 칼질 한 번에 나라는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된다. 하지만 언제나 그의 칼질에는 수 많은 의문이 붙여진다. 과연 그의 판단이 올바른 판단이었는가? 과연 이 나라는 그의 판단에 기대어도 되는가? 그의 칼은 언제나 국민을 상대로 하기에 모든 국민이 그의 칼을 바라본다. 그 아래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자들이 많을수록 권위는 높아진다.

 

하지만, 굳이 대통령이 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판단을 하고 산다. 나는 언젠가 관살이란 일종의 공공성으로서 사람들이 무언가를 가치 판단하고 바라보는 눈이라고 했다. 살기라고도 했다가, 멋이라고도 했다가, 스트레스라고도 했다가, 혹은 교과서에 실린 대로 감투라고도 했고 권위라고도 했다. 관살에 대해 주욱 생각해오면서 내가 내린 결론은 관살이란 결국 판단력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관살의 본질은 판단력이다.

 

사람을 한 번 만나고도 그 사람이 관살을 쓰는 사람인지 아닌 사람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관살을 쓰는 사람은 판단을 독점하려 한다.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저렇고, 그건 그게 아니고 뭐는 이렇고 뭐는 저렇고, 일일이 가치평가를 하려 한다. 판단을 독점하려면 권위가 있어야 하고 현대사회에서 나라를 운영하는 법을 다루고, 의술을 다루는 것 이상의 권위는 없다. 판단을 독점하려는 의지는 이 사회를 살면서 자연스레 법관이나 의사가 되는 길로 인도된다. 이 길이 막힌다면 다른 길이라도 판단을 독점해 볼 길은 많이 있다.

 

그렇다면 판단을 독점하려는 의지 아래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건 살기이다. 사람의 목숨을 쥐고 죽일까 살릴까를 흔들어보려는 권능에의 의지. 살기가 판단을 독점하려는 의지로 드러나고, 판단을 독점하려는 의지는 감투를 쓰고 칼을 휘둘려보려는 의지로 연결된다.

 

재밌는 건, 내가 판단을 독점하려는 의지를 펼치는 순간, 나 역시도 판단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누군가 대한민국 사회를 말한다, 라는 책을 쓰고 활동을 펼치려 하면 또 누군가는 대한민국 사회를 말한 그 사람에 대해 말하다, 라는 책을 쓸 것이다. 이러한 순환은 계속 된다. 예외는 없다. 세상의 모든 이해의 대상을 자신의 철학 아래 녹아보려고 했던 헤겔조차도 결국은 누군가의 해석 아래 해체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이건 내가 날린 칼이 나한테 돌아온다는 얘기와 동일한 부분도 있지만 약간은 다른 얘기이기도 하다.

 

간단히 말해, 내가 발휘한 살기는 다른 사람의 살기를 건드린다. 왜 나는 사람들이 자꾸 나를 두고 뭐라 하는지 모르겠어 투덜대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런 사람에게는 내가 먼저 타인을 판단하고 건드리지 않으면 상대도 나를 판단하고 건드리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해두도록 하자. 살기를 가진 사람은 타인을 쥐고 흔들어보려는 마음을 갖고 있지만, 그러한 마음으로 인해 그 역시 타인의 살기에 노출된다는 사실. 그러나 그럴 듯한 권위를 갖고 있지 않다면, 돌아오는 건 언제나 욕 & 욕.

 

내 팔자에 관살이 있다고 해서 그걸 오로지 내가 쓰는 칼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오산이다. 그 칼에 나도 노출되어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언젠가 술 먹는 친구 하나가 밤새 과음을 하고 냄새 풍기면서 아침 차를 타고 돌아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붐비는 차안에서 자리를 많이 차지 하지도 않고 내내 몸을 움츠리면서 스스로 벌을 주었다고 한다. 나는 그의 얘기에서, 그가 평소에 다른 사람이 이상한 소리를 하면 곧추세운 칼날으로 베곤 했던 모습들을 상기했었다. 아아 그 칼로 자신을 베었구나 생각했었다.

Comments

G 2022.10.03 08:04
죄와 벌(상벌)에 대한,심판의 권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