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

능력

G ㅇㅇ 1 2,491 2022.09.27 03:11

누구나 한가지쯤은 원하는 능력을 공상하고 있는 것이 있다. 어렸을 때 좋아하던 여자아이를 보면서 이러게 생각했다. '저 아이가 학교가 끝나고 무엇을 하고 있을까?'
선생님이 딴 생각을 한다고 혼을 낼때도 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작은 부속을 여자아이 몸에 붙여놓고 집에 가서 눈만 감으면 그 아이가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이 보여지는 능력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자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 한 일이었다. 도청기라면 가능하겠지만……

다른 학교로 오면서 그 여자아이는 잊었지만 항상 저런 능력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대학입시를 준비하게 되었다. 내가 집중할 수 있는 것은 한정되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어느 날, 갑자기 내가 그토록 원하던 능력이 내게 생겼는데도 한동안은 몰랐단 말이다. 여름방학 보충수업 받을 때 이 능력이 내게 생겼다는 것을 알았다. 비록 몸에 작은 부속을 장착 할 필요가 없었다. 나의 수많은 머리카락을 하나 뽑아 그 대상에 붙이면 됐다. 친구와 머리카락이 얼마나 강한지 놀이를 하다가 내 머리카락이 친구의 몸에 붙었다. 물론 그때는 몰랐었다. 쉬는시간 눈을 감았는데 꿈을 꾸었다. 잠을 자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그 꿈은 나와 놀이를 했던 친구가 커터칼로 연필을 깍다가 손가락을 베어버린 꿈이었다. 잠을 자지 않았기에 금방 일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친구를 보자 손가락을 움켜쥐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까 3분의 1쯤 나와 있는 커터칼 날에 피가 묻어 있고, 심이 부러진 연필이 책상에 놓여 있었다. 괜찮냐고 묻자 이정도야 하면서 애써 웃음을 보였다. 그냥 지나치려다가 친구 교복을 보니 머리카락이 붙어 있었다. 머리카락은 곧게 펴져 있어서 곱슬머리인 친구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난 생머리였다.

난 한가지 실험을 하기로 했다. 다른 사람에게 내 머리카락을 붙여놓고 집에 가서 방금처럼 눈을 감아보기로 했다. 그 대상은 내 짝꿍이었다. 상위 10% 안에 들었고 얼굴 또한 예뻐서 인기가 좋은 여자애였다. 보충학습이 끝나고 청소시간에 슬쩍 지나가는 척을 하면서 머리카락 몇가닥을 교복에 붙였다. 한가닥이라도 떨어지지 않기를 빌면서 말이다.

집으로 가면서 몇 번 짝꿍을 생각하면서 눈을 감았다. 짝꿍은 친구들과 손을 흔들며 헤어졌고, 버스를 타고 있었다. 초인종을 눌러 파란대문이 열렸고 짝꿍의 엄마로 보이는 사람이 맞이 해줬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와 교복도 벗지 않고 책상에 앉아 눈을 감았다. 깔끔하게 꾸며놓은 방이 보였다. 앞에는 침대가 보였고 그 위에는 캐릭터 알람시계가 보였다. 창문가 쪽에는 컴퓨터가 놓여 있었다.

컴퓨터를 켜고 짝꿍은 교복을 벗기 시작했다. 마의를 벗자 하얀 와이셔츠로 튀어나온 가슴은 나를 흥분시켰다. 옷걸이에 마의를 걸고 와이셔츠를 벗었다. 분홍색의 레이스가 달린 브래이지어가 짝꿍의 가슴을 받쳐주고 있었다. 짝꿍은 그 상태로 옷걸이에 걸어져 있는 츄리닝을 집어 웃도리를 입고 치마를 벗었다. 브래이지어와 같은 분홍색이었고 흘러 내릴 듯 불안하게 걸쳐 있었다. 나는 내 몸이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지만 꼼짝 않고 눈만 감고 있었다. 츄리닝 바지를 입은 짝꿍은 치마와 와이셔츠를 옷걸이에 잘 걸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인터넷서핑을 하면서 물건들을 보고 있는 짝꿍을 마지막으로 보고 눈을 떴다. 몸이 왠지 가뿐하다고 느꼈고 밥을 먹으면서도 자꾸 짝꿍이 떠올랐다. 교복에 붙어있는 머리카락은 아직 짝꿍의 방안에 있기 때문에 방안은 언제든지 볼 수 있었다.

"어이! 뭘 그리 생각해? 밥상머리에서."

멍하니 있자 엄마가 내게 말했다. 짝꿍의 이름은 김희연. 알고 지낸지는 꽤 오래되었지만 얘기를 터놓고 하지는 못한다. 서로 험한말 못하고 어색하게 지내고 있는데 벌써 두번이나 짝꿍을 했다. 방으로 돌아와 눈을 살짝 감았는데 밥을 먹고 있는 희연의 모습이 보였다. 머리카락이 교복에 붙어있는 줄 알았는데 언제 희연의 몸에 옮겨 붙었나 보다. 저녁은 희연의 엄마로 보이는 사람과 단, 둘이 하고 있었는데 계속 먹다가 희연이 현관문 쪽으로 달려갔다.


남자가 들어왔는데 희연은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얼굴이 뻘게 얼핏 봐도 술에 절여 있었고 남자는 희연을 보자마자 입을 크게 벌려 뭐라고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러자 희연의 엄마가 와서 남자에게 손가락질 하면서 싸웠다. 희연이 엄마의 옷깃을 붙잡으며 하지말래도 희연의 엄마는 계속 소리쳤다. 내 능력으로는 소리를 못 듣는다는 것이 너무나 답답했다. 남자는 신발도 벗지 않고 들어와 희연의 엄마를 주먹으로 때렸다. 넘어진 희연의 엄마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남자에게 몇차례 주먹질을 당했다. 코에서는 피가 터져나오고 희연이 남자를 울며 말려도 그만 두기는 커녕 오히려 희연을 밀쳐 넘어트렸다.


남자는 몇 번을 더 때리더니 밖으로 나갔다. 희연은 엄마에게 달려가 상태를 보고 울었다. 얼굴이 피멍으로 가득한 희연의 엄마의 살짝 뜬 눈에는 눈물이 흘러 나왔다. 희연이 텔레비전 위에 티슈를 가져와 코피가 흐르는 엄마의 코를 닦아 주면서 아랫입술을 깨물며 계속 눈물을 흘렀다. 엄마를 일으켜 안방으로 데려갔다. 안방에는 희연의 부모님 결혼사진이 커다란 액자에 넣어져 있었는데 남자가 밝은 얼굴로 희연의 엄마의 입술에 키스하고 있는 사진이었다. 나는 그 사진을 본 순간 피가 거꾸로 흐르는 기분이 들어 순간 눈을 떴다. 내 손바닥에는 땀으로 가득해 끈적거렸고 뒷머리에도 축축했다. 나는 밖으로 나가서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아빠와 엄마를 봤다.

"저, 저…. 국회의원들은 싹 잡아 죽여야돼. 이러니 나라 꼴이……."
"누가 아니래. 하여간 맨날 뽑기전에는 잘한다고 하지. 내가 해도 것보다는 잘하지."
"어이구, 김여사께서?"
"그럼."

난 안도의 한숨을 쉬고 방으로 다시 들어왔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니 희연이 걸레로 바닥에 피를 닦고 있었다. 눈물은 그쳤지만 너무 슬퍼보였다. 왠지, 왠지 나도 슬픔이 밀려왔다. 졸음이 와서 눈을 감을 때는 내 능력은 사라졌다.


다음 날 희연은 나보다 일찍 학교에 와 있었다. 수학책을 펼쳐 어떤 문제를 집중해서 풀고 있는 것이 평소와 다름없었다. 나는 무언가 말을 건네고 싶었다. 저 모습 속에 꼭 숨겨진 것을 내가 벗겨주고 싶었다. 어떤 말이라도 건네야 하는데 도대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렇다고 위로의 말을 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저기…."

말이 너무 작았다. 평소에 말하는 목청이 너무 커서 항상 지적을 받았던 내가 이렇게 작아 질 수 있는지 나도 놀랐다.

"응?"

희연은 용케도 알아 들었다. 샤프을 놓고 빤히 나를 쳐다보며 내가 부른 이유를 기다리고 있었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껌 줄까?"

이런 바보같은! 난 껌도 없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아니, 껌은 잘 안 씹어."

내가 기분 나쁘지 않게 희연은 눈웃음을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어제의 서글픔은 어디로 숨겼을까…….

내 능력이 한계가 있다면 첫 번째로 졸음이 와서 눈을 감을 때는 효능이 나오지 않고 (이건 좋은 점이지만) 자정이 지나면 능력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래도 머리털이 한 올도 나오지 않는 이상 크게 걱정 할 것은 없었다. 종례하기 십 분전쯤에 내 머리카락을 뽑아 희연의 교복에 살짝 걸쳤다. 원래 이렇게 살짝 걸쳐놓으면 머리카락이란 게 워낙 가벼워서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날아가 버릴텐데 어제도 그렇고 내 머리카락은 잘 떨어지지 않는다. 능력이 생기면서 머리카락에 생긴 변화인지 모르지만 내 능력과 잘 어울러 맞는다.

내가 희연을 훔쳐보고 싶은 욕망이 생겨서가 아니라 어제 우연히 본 희연의 사정이 내게 연민의 감정이 생기게 한 것 같다. 다른 친구들 중 희연의 속사정을 잘 알고 있는 친구들은 없을거라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아니고는 희연을 도와 줄 사람은 없다. 당장 도울 방법은 없다. 하지만 앞으로 있다면, 내 말 한마디가 도움이 된다면 난 기꺼이 도움을 줄 생각이다. 집에 돌아가 교복도 벗지 않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슈퍼에 들려 물건을 사고 있는 희연의 모습이 바로 눈커플에 새겨져 영상처럼 나왔다. 희연은 생리대와 오렌지주스를 계산하고 집이 있는 아파트로 들어갔다. 희연은 이때부터 표정이 불안한 기색이었고 굉장히 어두워졌다. 엘리베이터에서 6층을 누를 때도 급하게 닫기 버튼을 수차례 눌러댔다. 열쇠로 현관문을 열고 뭐라고 말하면서 안으로 들어갔는데 입모양으로 '엄마' 이었다. 그러나 집안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슈퍼에서 사 온 물건을 식탁에 올려 놓고 핸드폰으로 어디에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자 내가 불안해질 정도로 희연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희연이 안절부절 못 할때 남자가 들어오자 희연은 너무 놀라 멎는 듯 하더니 이내 무표정을 했다. 남자는 희연을 보자마자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를 버럭 질렸다. 내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내 심장이 벌렁거렸다. 아무말 하지 않고 자기 방에 들여가려던 희연은 남자의 어떤 한마디 때문에 뒤돌아 서서 맞받아 쳤다. 그러자 남자는 눈이 하얗게 돌아가 희연의 머리칼을 쭉 잡아 당겨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리고 술냄새가 찌든 손바닥으로 희연의 볼을 후려쳤다.


빨갛게 부어 오른 희연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보자 마음이 답답해졌다. 내가 지금 도와 줄 수는 없었다. 희연은 일어나 밖으로 뛰쳐 나갔다. 엘리베이터가 다른 층으로 가 있자 계단으로 내려갔다.

가로등 불빛이 깔려 있는 도로를 희연은 울며 뛰었다. 희연이 닿은 곳은 가로등 불빛만 있고 사람은 없는 공원이었다.

"밥 먹어라. 얘가 벌써 자나. 얘, 얘."

나는 눈을 떴다.

"에예. 안 잤어요."
"어서 밥 먹어라."
"안 먹으면 안돼요? 별로 생각이 없는데."
"너 아빠한테 혼 날라고 그래? 어서 나와!"
"네……."

우리집은 필법이 있는데 그것은 가족과 함께 밥을 먹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이 없어도 아빠와 엄마가 모두 식사를 마칠 때까지 부엌에 앉아 있어야 했다. 18년동안 변함없이 지켜 온 것이라 평소에는 꺼림이 없었지만 오늘은 필법보다 희연이 더 걱정이 되었다. 난 부엌으로 가서 의자에 앉았다.

"생각이 없다니까 반 밖에 안 펐으니까 다 먹어. 잡채도 해놨으니까 맛있게 먹어야 돼."
"그래, 밥은 꼭 먹어야 한다. 알겠니?"
"네…."

난 밥을 퍼 입안에 넣고 다시 밥을 퍼 먹었다. 반찬은 거의 먹지 않아 맛은 없었지만 얼른 희연의 상황을 살펴보고 싶었다. 물론 지금 눈을 감아도 보이겠지만 예의를 가장 중요시 여기는 아빠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다.

"너 성적표는 왜 안 갖고 오니?"

반쯤 억지로 먹었을 때 아빠가 말했다. 아빠는 중간고사 성적을 말하는 것이었다.

"아직… 안 나왔어요."
"이젠 기말고사가 얼마 남지 않았을텐데 아직 안 나왔다는 게 말이 돼? 일단 지금은 밥 먹고 그 후에 아빠와 얘기좀 해보자. 너 이젠 진로도 정해야지. 언제까지 목표없이 공부 할 거야?"
"내일 하면 안되요? 지금은 바쁜데…."
"안돼. 너한테 진로보다 바쁜 게 어딨어."
"진짜 안되는데……."
"어허! 잔소리 말고 밥 먹고 안방으로 와."

나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말하지 않자 아빠는 확답을 꼭 들어야 하는 것처럼 다시 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알았어요."

그러나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아빠의 진로핑계인 설교를 30분 이상이 계속 되었다. 내가 진로의 대한 확신도 없이 이리저리 방황하는 것을 나도 인정을 하지만 시간이 길어 질수록 짜증이 밀려왔다. 다행히 길어지는 설교에 오히려 엄마가 짜증을 내자 거기서 끝냈다.

난 급히 내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긴지 모르기 때문에 급했다. 눈을 감자마자 나타난 장면에 내 숨이 멎는 듯 했다. 세명의 남자에 둘러싸인 희연은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눈물범벅이었다. 남자들은 실실 웃으며 더러운 손을 희연에게 뻗었다. 희연이 완강히 거부를 하지만 여자 혼자서 남자 셋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더러운 손들이 희연의 몸들을 만지며 옷을 잡아 당겼을 때 심장이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당장 도와줘야 하는데 저곳이 어디인지 모르겠다. 굉장히 어두운 걸 보아 어디 건물 안 같은데 그거 하나만으로 저곳을 찾을 수 없었다. 더구나 희연이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도와준다는 건 도박을 하는 것과 같았다. 희연의 몸을 계속 더듬던 손은 기어코 희연의 교복을 강제로 뜯어냈다. 분홍색 브래이지어가 살짝 보일 때 눈을 떴다.

알면서도 도와주지 못하는 심정보다 답답한 게 있을까? 모른다면 모를까 아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반에 아는 사람에게 모두 전화를 걸어 희연이 살고 있는 곳을 알아보기로 했다. 여러명한테 전화를 한 결과 희연이 사는 동네를 알 수 있었다. 내가 시계를 보니 9시가 거의 다 되어 있었다.

"엄마, 저 친구네 좀 갔다 올게요."
"시간이 몇 시인데 남의 집을 가?"
"책좀 받으려고요. 금방 올게요. 요 앞이에요."
"알았어. 바로 와."
"네."

희연의 동네는 여기서 10분정도 되는 거리였다. 나는 빠르게 그런 더러운 짓을 당할 만한 장소를 생각했지만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가는 길에 있는 파출소에 들려서 지금 내 상황을 긴급히 말했다.

"허,헉. 도와주세요."
"무슨 일입니까?"
"제 친구, 친구가 강간을 당하고 있어요. 여자인데... 빨리 도와주세요."
"김순경! 이순경! 빨리 출동 준비해! 그곳이 어디입니까?"
"그게…. 잘은 모르겠어요. 그냥…."
"직접 본 게 아닙니까?"
"에, 네. 그냥 감으로. 아니, 확실해요. 빨리 OO동이에요. 지하실 같았는데 하여튼 빨리 도와주세요. 저도 찾을게요."

경찰은 의심스럽게 날 쳐다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와 함께 OO동으로 가서 건물들을 뒤지고 다녔다. 그러나 OO동에 있는 건물 지하실이란 지하실은 모두 뒤지고 다녔지만 희연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잘못 생각 한 것일까? 어둡고 침침하다고 지하실이라고 생각 한 것이 잘못된 것일까? 가깝지만 OO동은 별로 와 본 적이 없어 연상케 하는 것은 별로 없었다. 일단 희연이 더러운 짓을 당하기 전 있었던 공원을 생각했다. OO동에 내가 알기로는 두개의 공원이 있었다.

"어디인지 확실히 모르십니까?"
"네, 그게요."

내가 여기서 공원으로 가서 조사하자고 하면 분명 속으로 짜증을 낼 게 분명해서 돌아가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처음에는 돌아가지 않고 도와준다던 경찰은 내가 수차례 가도 된다고 말하자 몸을 돌려 파출소로 갔다. 경찰이 가는 모습을 보고 공원을 찾아 갔다. 공원의 위치를 잘 몰라 지나가는 사람에게 묻고 물어 가까스로 찾았다. 기억을 더듬어 희연이 앉은 벤치를 생각했다. 가물가물하지만 근처에 가로등 불빛의 인상이 남아 있었다. 벤치 근처에는 주황색 빛이 깔려 있었는데 이 공원에서는 흰색 불빛만 있을 뿐 어디에도 주황색 불빛은 없었다. 이 공원은 아니었다. 나머지 공원은 별로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 공원에 가보니 온통 주황색 빛이었다. 가운데는 분수가 있었고 수많은 벤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파트는 하나밖에 없었기에 그곳이 희연의 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으로 향하는 길을 찾아보니 희연이 바로 앉을 수 있는 벤치는 한정되어 있었다. 그럼 이곳에서 어디로 갔단 말인가. 내가 저녁을 먹고 아빠의 설교를 듣고 다시 눈을 감았을 때까지 대략 한시간정도 흐른 후였다. 그렇다면 한시간 안에 희연이 사라졌다는 것인데 범위가 너무 넓다. 젠장.

1분도 아니고 1시간이라면 내가 찾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더러운 새끼들이 하는 짓을 보면 거의 처음이라는 것이고 그렇다면 1시간과 가까워진다. 정말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까.

다음 날 일찍 학교에서 희연을 기다렸다. 항상 일찍 오던 희연이 조회시간이 되어도 안 오자 걱정이 되어 속이 타들어갔다. 1교시가 끝나고 희연은 교실문을 열고 들어왔다. 평소처럼 밝은 표정은 아니지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왜 미소를 지을까? 굉장히 무서웠을 텐데…. 그 모습을 보고 내가 온 몸이 아팠는데 왜 희연을 미소를 짓고 있을까. 혼자 애써 고통을 참고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안녕?"

가방을 가방걸이에 걸며 내게 인사했다. 나도 인사를 한 적은 없지만 희연이 내게 아침인사를 한 것도 처음이었다.

"으, 응."
"오늘 늦잠을 잤어. 바보같이 말야. 시험이 다가오는데 잠이 올까."

이것도 처음이었다. 희연은 자기의 일상생활을 편한 친구에게 말하듯이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괘, 괜찮니?"
"응? 뭐가?"
"아냐. 그냥 늦잠 잔 거 괜찮냐고."
"괜찮은데 왜?"
"아니야."

희연은 바로 다음 과목 교과서를 꺼내고 예습을 하고 있었다. 샤프를 들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니 손목이 참 가늘다는 것을 알았다. 기다랗고 가는 손가락은 위태롭게 샤프를 잡고 있었다. 빠르고 정확한 글씨는 얼마나 섬세한지 알려주고 있었다. 희연은 2교시를 시작해서 점심시간, 종례까지 평소와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아니, 오히려 나에게는 더욱 편하고 자주 말을 걸어주었다. 종례시간 담인선생님을 기다릴 때 희연이 내게 말했다.

"어디 사니?"
"A동."
"정말? 바로 옆동네네. 왜 몰랐을까? OO동이야. 두개 공원이 유명하잖아. 알지?"
"응. 너 어제 혹시 공원에 갔었니?"
"어떻게 알았어?"
"그냥 혹시나 해서."

웃었다. 나도 모르게 어제 희연의 기억을 되살아나게 했는데도 희연은 웃었다. 왜 웃을까? 오늘도 난 종례시간에 몰래 머리카락을 희연에게 붙였다. 내 머리카락은 날이 갈수록 접착력이 강해지는 걸 느꼈다. 아침에 머리를 감다보면 손에 끈적끈적한 게 묻어나온다.

"잘가."
"그래."

난 곧장 집으로 가서 침대에 누웠다. 점점 습관화되어서 이젠 일상이 되어버린 내 능력은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이젠 영웅심이 생겨 필수적으로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감자 희연이 보였고 어제 그 공원을 지나가고 있었다. 희연의 아파트로 가려면 공원으로 가는 게 약간 더 빠르지만 나는 희연이 공원을 지나가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공포를 당한 곳이나 원천이 된 곳은 가지 않는 게 정상인데 희연은 그러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아침부터 희연의 행동은 이상했다. 이상한 것을 넘어 수상하기까지 했는데 왜 그러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희연은 더러운 짓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소를 짓고 웃으며 친하지 않던 나에게도 친하게 대했을까. 강간을 당하면 창피해서 그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숨기며 혼자 괴로워 한다는데 희연도 그러는 것일까? 괴로움조차 보이지 않으려고 웃는 것일까?

희연은 집으로 가지 않고 공원 벤치에 앉아 누군가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아무도 오지 않자 핸드폰으로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입을 벌리며 무엇을 말하는 것 같은데 입모양으로는 도저히 그 말을 알 수 없었다. 말을 끝내고 희연은 기분이 좋은 듯한 미소를 지었다. 알 수 없는 희연의 행동에 머리를 아무리 굴려봐도 머리만 지끈 아파오기만 할 뿐이었다. 잠시 후, 희연에게 나타난 한명의 남자. 커다란 키에 노란색으로 염색을 했고 코에는 피어싱을 해 얼핏봐도 불량배 같았다. 그런데 희연은 남자를 보자 커다란 웃음을 보이고 팔짱을 꼈다. 남자친구일까? 그럴 수도 있겠다. 희연에게 저렇게 불량해보이는 남자친구가 있는 것은 의외였다. 희연이 웃는 걸 보니 남자는 스토커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괜시리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눈을 떴다. 마음이 왜 이리 시릴까. 마치 얼음덩어리가 가슴속에 자라고 있는 것 같다. 이 얼음을 녹일 수 있는 것은 희연밖에 없는 것 같은데, 나는 이리도 시립고 아픈데 희연이 알아봐주지 않을까? 그래, 이건 내 욕심에 불과하다. 아프다.

이젠 희연에게 내 능력을 더 이상 쓰지 않기로 했다. 내 마음을 나도 잘 모르겠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반이 바뀔 때 마다 좋아하는 사람이 바뀌었지만 단 한번도 고백해 본 적이 없다. 초등학생이 좋아해봤자 진심이기보다 예뻐서가 대부분이겠지만 항상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었다. 하기야 초등학교 때는 누구를 좋아한다는 것은 놀림의 대상이었으니 더더욱 못 했으리. 어떤 날은 혼자 바라보기만 하기에 너무 힘이 들어서 내 비밀을 지켜 줄 만한 친구에게 털어 놓은 적이 있었다. 친구는 본심이 아니었겠지만 약간의 실수로 반 전체에 내가 누구를 좋아한다고 퍼져 몇날 며칠 놀림을 받아야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니 졸음이 와 잠을 자려고 눈을 감았는데 희연이 번뜩 나왔다. 급히 눈을 떠 시계를 보니 아직 11시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내 능력은 진정으로 졸려서 눈을 감았을 때는 능력이 발휘되지 않은데 이번에는 능력이 발휘되었다.내 능력이 변하는건가? 졸린 상태에서 눈을 감으니 몽몽한 게 꿈처럼 영상이 펄쳐졌다.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희연이 지금 있는 곳에는 바람이 솔솔 불고 있었다. 무더운 여름 날 소나기 구름이 한 차례 지나간 다음 나무들이 흔들리는 기분이 들어 내가 거기에 있는 것처럼 기분이 매우 좋았다. 희연은 혼자였다. 남자친구랑 헤어진 것 같았다. 그런데 또 누군가 기다리는 것처럼 이리저리 두리번 거렸다. 이번에는 누구일까? 내가 다 초조해져 입술이 바싹 말라가고 있었다. 곧 희연에게 나타난 사람은 모두 세명이었다. 그 중 희연의 남자친구도 포함되어 있었고 나머지 둘도 희연의 남자친구처럼 염색을 하거나 피어싱을 해서 매우 불량해 보였다. 그들은 희연에게 오면서 실실 웃고 있었다. 아주 기분 나쁜 웃음이었다. 어제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세명이었지만 얼굴이 확실히 보지 못해 함부로 의심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나는 속으로 설마, 혹시라는 말을 되풀여 소리쳤다. 희연도 그들을 보자 무언가 만족스럽다는 미소를 지었다. 몇 마디 말을 하더니 희연과 그들은 어디론가 향했는데 그곳은 다름아닌 모텔이었다. 멀리 떨어진 모텔이었는데 모텔주인은 아무 의심도 하지 않고 방을 내주었다.

도대체 뭐하려는 것일까. 희연이 왜 저렇게 불량해 보이는 남자들 세명씩이나 왜 모텔로 왔을까. 난 자꾸 혹시라는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갈수록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두근거리는 심장을 주체 할 수 없었다. 방은 매우 좁았으니 침대랑 텔레비전도 있었고 텔레비전 위에는 콘돔도 있었다. 나는 이것을 계속 봐야 하는 지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세 명의 남자들은 계속 실실 웃으며 희연을 바라보았다. 희연은 침대에 앉아 텔레비전을 켰다. 홀딱 벗은 여자가 텔레비전 속에 들어 가 춤을 추고 있었다. 아, 깜깜하다. 정전이 되었나? 왜 이리 깜깜 하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 후에 나온 장면은 내 손조차 보이지 않는 어둠속에서 전력으로 달리는 장면이었다. 사람들은 이걸 꿈이라고 했다.

아침을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 희연이 걱정이 되어서? 아니면 희연에게 실망을 해서? 이 둘 모두 포함 될 수 있겠지만 도대체 희연이 왜 그들과 그런 짓을 했는 지 모르겠다. 자정이 지나면서 바로 꿈으로 바뀌어 다른 장면이 되어서 확신하지는 못하겠다. 제발 아니길 빈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학교로 향했다. 밤새 비가 왔는 지 바닥은 축축하고 물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운전하는 사람은 안개가 더럽게 재수없겠지만 난 안개가 끼면 기분이 좋아진다. 작은 물알갱이를 빨아 들이면 그 특유의 맛에 중독이 되었다. 그 알갱이들은 몸으로 들어 가서 툭 터진다. 그런데 오늘 안개는 너무 심해서 바로 앞에 있는 간판글씨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교실에 들어가니 희연은 먼저 와서 예습을 하고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안녕?"

내가 가방을 걸고 앉자 희연이 나를 보며 인사를 했다. 나는 희연에게 두 번째로 인사를 받았다. 그것도 연이어. 나는 한번도 하지 못했었는데 내일부터 먼저 해야겠다는 생각을 잠시 하는 동안 난 매우 행복했다. 능력이 없었다면 항상 행복해 했겠지만 능력으로 희연의 속모습을 모두 본 이상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너 무슨 일이니? 도대체 그러는 이유가 뭐야.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다 할게. 비록 내가 돕지 못해도 좋아 도울 수 있는 방법은 모두 알아 볼 거야. 가르쳐 줘.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그런 권리조차 있는지 모르겠다. 이리도 마음이 아프고 도와주고 싶은데 권리가 뭘까, 그깟 말 할 용기가 없을까. 속이 터질 것 같다. 차라리 희연이 어제 모텔에서 강탈을 당해 괴로워 했으면 좋겠다. 그랬어야 내가 마음껏 도와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제는 뭐했어?"

정말 뜻밖으로 희연이 내게 말했다. 내가 어제 뭐했지?

"그, 그냥."
"그냥 모……."

희연은 입술을 쭉 내밀며 말했다. 꽤 귀여운 모습에 안달이 날 것 같았다. 이런 모습도 있었나? 원래 있었는지 모른다. 워낙 서먹서먹하게 지냈기 때문에 내가 모를 수도 있었다. 그래도 내가 항상 봐 온 모습은 조용히 공부만 하는 모범생이었다. 아, 예쁜 모범생.

"잤어. 밥먹고."
"아, 응."
"너는?"

나도 모르게 물었다.

"으, 응……. 공부."

희연은 우물쭈물거리며 말했다. 1교시가 시작하고 종례까지 간간히 한 몇마디 빼고는 대화 하지 않았다.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희연을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좀 치사하지만 미행하기로 했다. 학교가 끝나고 약간 거리를 두고 희연을 따라갔다. OO동까지는 열정거장이나 되지만 희연은 힘들지도 않는 지 열정거장을 모두 걸어 공원으로 향했다. 어제와 같이 희연은 그 벤치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나는 최소한 목소리가 들릴 만한 곳까지 붙어 나무뒤로 숨었다. 만약에 들킨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었다. 조금만 있으니 어제 그 남자가 희연에게 모습을 나타냈다. 이번에는 세 명 모두 와서 희연 근처에 섰다.

"잘 있었어?"
"얼굴 보니까 잘 있었네. 낄낄."

남자들의 목소리를 듣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 특이한 목소리도 아닌데 그랬다.

"준비 됐어요?"
"다섯 번은 자야지. 안 그래? 벌써 이러면 우리가 섭하지."
"열 번이라도 자줄테니까 빨리 죽여요! 그 새끼를 보면 환장 할 것 같아."

공원에는 운동하는 사람이 몇몇 있었지만 희연은 크게 소리쳤다.

"조용히 해. 다 판치기 전에. 알았어. 니 말대로 오늘이라도 하는데."
"알았어요. 우리 아빠 얼굴 알아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죽이는 거 그리 어렵지 않아. 대신 위험감수가 필요하지. 한 장정도 필요해."
"한 장이요? 돈 말 하는 거에요?"
"그럼 뭐겠어?"
"돈을 달라고요? 같이 자면 된다고 했잖아요. 약속이 틀리잖아요."
"조용히 하라고 했지? 그러니 싸게 주는거야. 다른 사람들이면 3장은 불러."

희연은 잠시 고민하는 듯 조용하더니 이내 알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못 줘요. 각서라도 쓸게요."
"크크. 좋아."

나는 희연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우리 아빠가 그정도로 악질이라면 나도 충분히 죽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마은 뿐이지 실제로 죽일 수는 없다. 그러나 희연은 이들에게 살인청부를 요구하고 있었다. 자신의 몸까지 버리고 돈까지 주겠다는 각서까지 쓰면서까지. 정말 그정도로 괴로웠을까?

"그럼 내일 여기서 너희 아빠라는 사람 사진을 갖고 와. 그럼 알아서 해줄테니."
"알앗어요."
"그리고 좀 있다 다시 이곳으로 와."
"왜요?"

남자는 말없이 희연의 몸을 만졌다. 희연의 표정이 약간 굳어졌지만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아파트로 돌아갔다. 난 한동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남자들은 담배를 꺼내 피면서 그 자리에 계속 있었다.

"쟤 어떠냐?"
"저정도면 A급이지. 키킥."
"오늘은 내가 할테니까 넌 몰래 사진이나 찍어놔."
"알았어."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내가 어찌하면 좋을까. 오늘 밤에 저 더러운 새끼들이랑 모텔에 갈 것이 분명하다. 희연의 마음을 이용해 먹는 나쁜새끼들에게 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 저들이 오늘 희연의 몸을 찍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일은 더 커져버리고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 할 늪에 빠져버릴 게 분명하다. 내가 어떻게 해야할까. 지금 당장 달려가서 막아볼까? 그러나 다리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머리는 이미 판단을 내렸다. 모든 것을 말해서 희연을 도와주기로 했다. 빨리 가야 한다. 그런데 다리는 여전히 떨어지지 않았다.

"뭐야? 이거. 이 새끼 처음부터 다 들은 거 같은데?"

나를 발견한 한 명의 남자가 말했다. 아주 끔찍하게.


그들을 나와 대면을 하니 희연이 느꼈을 괴로움을 충분히 알 것 같았다. 그들 중 한명이 내게 말을 하기까지 나는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저들이 나한테 어떻게 할까. 혹시 나를 죽이면 어떡하지? 어떻게 죽일까? 칼로? 아니야, 저런 놈들이라면 날 몰매쳐서 죽일 수도 있을거야. 그러면 많이 아플텐데. 나는 지금 맞고 있는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영식아, 얘 어쩔까?"
"야, 따라와."

두 명이 앞서서 가고 한 명은 내 뒤에서 내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뒤따라 왔다. 따라오라는 장소까지 갈 동안 서로 오간 대화는 "담배좀" 밖에 없었다. 결국 그들이 향한 곳은 희연이 처음 이들을 만났을 장소인 것 같았다. 캄캄하고 축축한 이 더러운 기분. 아니, 이 기분이 언제부터 이리도 기분이 더러웠을까. 지독하게 더러웠다.

"너 거기서 뭐했어?"

낮은 톤이지만 어중있게 날 짙게 누르는 말이었다.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어요."
"지나가는데 가만히 서서 말을 다 듣고 있어? 너 우리가 하는 말 다 들었지?"
"아, 아뇨. 그냥 얼핏 들었는데… 얼핏 들었는데, 잘 기억이 안… 안 나는데."
"안나? 안 난다고? 다시 말해봐."

한 명이 내 머리를 살짝 치면서 말했다.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 그게…."

마음이 약해지려는 것일까? 그들은 담배를 열심히 몸속으로 들여넣고 있었다.

"아무것도 못 들었어요. 저 빨리 풀어줘요."
"아, 이 새끼."

정말 몰랐다. 손바닥이 내 뺨을 때리는 지. 팔을 움직이지 않고 손목으로만 치는 것이 많은 사람을 때려 본 것 같았다. 너무 순식간에 당해 별로 아프지는 않지만 뺨을 어루만졌다.

"지금 몇시냐?"
"8시."
"아, 너 돈좀 있냐?"

내게 말했다. 돈은 별로 없지만 만원정도가 주머니에 있었다. 오늘 아침 엄마에게 저녁을 사먹는다고 받은 돈이었다. 엄마는 와서 먹으라고 했지만 친구네 가야 한다고 받아 낸 돈이었다. 희연을 미행하기로 한 계획은 여기서부터 시작했다.

"만원밖에……."
"아…, 그거라도 내놔."

나는 돈이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했다. 삥을 뜯길 때는 두가지 방법이 가장 현명하다고 얘기를 들었다. 힘이 안되면 무조건 도망가거나 힘이 되면 싸우거나. 그런데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돈을 내주었다. 뭣도 아니고 개만 된 것이다.
그런데 돈을 주려고 주머니를 뒤졌지만 앞주머니에는 없었다. 돈이 어디갔지? 돈이 지금 없다고 하면 분명 화를 내며 때릴지 모른다. 뒷주머니에도 없었다. 내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주머니를 뒤지자 그들은 짜증나는 얼굴로 나에게 다가왔다.

"장난하냐? 왜 없으면서 있다고 구라를 쳐. 어?"

순간 띵하고 머리가 뒤쳐졌다. 코가 무척 매웠고 이번에는 진짜 얼굴이 얼얼했다.

"있다고 하면 안 맞을 줄 알았어?"
"있었는데…, 있었는데…."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같은 말만 반복해서 말했다. 나도 그 이유를 몰랐다. 왜 자꾸 같은 말만 반복해서 말하는지, 아마도 겁에 질려 있나 보다.

"그러니까, 그러면 안 맞을 줄 알았냐고. 사람 말을 왜 자꾸 씹냐."

그가 손을 뻗어 나를 겁주었다. 그러나 실제로 때리지는 않고 내가 잔뜩 쪼는 모습을 보고 낄낄 하고 웃었다. 날 장난감처럼 갖고 놀고 있지만 왠지 기분이 전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나도 살짝살짝 웃었다. 혹시 풀어주지 않을까. 지금 당장 풀어주지 않더라도 때리지는 않았으면. 아까 맞은 곳이 쓰라려 점점 부어오르고 있었다.

"이제 시간 다 됐다."

어디 가려는 거지? 맞다. 모텔.

"얘들아, 가자."

난 풀어주겠지? 그러나 내 기대와는 달리 그들은 날 풀어주지 않았다. 내가 예상했던 것처럼 이곳은 확실히 지하실이다. 그러나 위치가 어디쯤인지 모르겠다. 철문을 닫자 희미하게 들어오는 달빛 말고는 이곳을 밝혀 줄 만한 것은 없었다. 문을 열어봤지만 덜컹하고 소리만 낼 뿐 열리지 않았다. 나는 뒤늦게 희연이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멍청하게 내가 위험하다고 희연을 까맣게 잊은 것이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희연 때문에 내가 이러고 있다고 생각을 한 것 같다. 나는 뭐지? 아주 약했지만 주먹을 쥐고 내 얼굴을 쳤다. 이러지 않으면 죄책감에 빠져 미쳐버릴 것 같았다.

아픈것이 가라 앉을 무렵, 또다시 겁쟁이증이 발동했다.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평생 여기서 썩어 죽어야 하나. 평생도 아니겠다. 굶어 죽든, 말라 죽든, 혼자 미쳐 자해를 해서 자살을 하든 일찍이 죽어 자빠 질 것이다. 아아악! 희연을 구하기 위해 이곳을 빠져나가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내가 맥가이버가 되는 것처럼 주변을 돌려 보면서 찾아보았지만 달빛이 닿지 않는 곳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손감각이 그리 좋지 못하는 내가 하나씩 더듬으면서 찾는 방법을 찾을 수는 없었다. 날이 밝아 모든 것이 다 보인다고 할 때도 내가 이곳을 빠져나간다는 보장은 없었다. 아, 어떻게 해야하지. 뒤늦게 핸드폰을 생각해내는데 성공했지만 핸드폰은 가방에 들어 있었다. 더 중요한 것은 가방이 나한테 없었다. 생각을 더듬어 가방의 위치를 따라가니 가방은 그 공원에 있는 게 틀림없었다. 좋게 말하면 깜빡 잊고 안 갖고 온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너무 놀라 가방을 들고 올 힘이 없었다. 부정하고 싶지만 이게 맞는 것 같다. 오줌까지 지를 뻔 했으니까.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내가 빠져나가려고 하는 이유의 대해서도 갈등이 되었다. 희연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이것을 굳이 정할 것은 없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이것을 꼭 정하기로 했다. 결국 처음 희연을 미행 한 목적을 따르기로 했다. 아악! 환장 할 것 같은 감정이 폭발하였다. 검은 벽을 향해 주먹질을 하였다. 평소에 싸움도 잘 하지 않던 내가 오늘처럼 주먹에 힘을 주고 많은 주먹질을 한 적은 처음이었다. 기껏해야 입운동만 했지. 주먹을 통해 전해오는 충격은 뼈가 떨릴 정도로 아팠다. 핏물이 벽에 튀겨 내 얼굴에 묻어 흘러 내렸다.

퍽! 퍽! 허헉, 헉- 헉.

주먹질이 꽤나 많은 체력소모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1분도 하지 않았는데 숨이 목을 조이는 것처럼 막혀 오는 것이 백미터 달리기를 연속으로 몇번 한 것 같았다.

부스럭, 부스럭.

숨을 헐떡거리는 소리 가운데 어색한 소리가 끼어들었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그 행방을 찾다가 금방 내가 친 벽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너무 어두워 소리의 정체는 직접 만져보고서야 알았다. 그것은 콘크리트 부스러기였다. 원래 있던 게 아니라 뭔가 부숴져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설마, 설마.

나는 따끔한 걸 참고 주먹에서 흐르는 피를 옷에 스윽 닦았다. 그리고 다시 주먹질 할 자세를 잡고 달빛에 비쳐 밝은 벽에 주먹질을 몇 번을 했다. 벽에 금이 가고 부숴졌다. 무너질 정도는 아니었으나 이정도 파워면 저 지하실 문은 충분히 때려 부숴서 열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어디로 이런 힘이 나왔지? 싸움은 전혀 멀던 나였는데. 핵주먹 타이슨이라면 벽을 부술수 있을까? 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힘이 쎄고 주먹치는 기술이 갖고 있더라도 단단한 콘크리트 벽을 부수지는 못 할 것이다. 만화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그렇다면 내게 또 다른 능력이 생긴 것일까? 인간 이상의 힘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약골이 내가 타고난 힘이? 그건 아닌 것 같다. 그건 나중으로 생각 하기로 하고 내게 주어진 이 능력으로 빠르게 희연을 구해야 한다. 이정도 힘이라면 그깟 개새기 3마리쯤 혼내주는 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지하실 문을 힘껏 쳤다. 굉장히 큰 소리를 내며 반은 찌그러졌다. 다시 한번 치니 못이 휘어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떨어져 나가면서 나는 명쾌한 소리는 정말 듣기 좋았다.

신속히 지하실 위로 올라와서 내가 온 길을 생각하며 공원을 달려갔다. 달리기 하나는 정말 자신 있었기에 걸어서 15분은 족히 걸릴 거리를 몇 분도 안되어 도착했다. 그 벤치 뒤로 가서 내 가방을 찾아서 핸드폰을 꺼냈다. 엄마에게 온 부재중 전화가 두통이 있었다. 그러나 그딴 건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전화번호부를 보면서 희연이라는 이름을 찾았다. 통화음이 가는 내내 불안해서 핸드폰을 던져버릴 것 같았다. 이상한 감정이지만 빨리 희연이 받지 않자 문자로 보냈다.

[이 문자 보면 빨리 연락해]

그 개새끼들이 나간 시간이 약 20분이 지났으니까 지금쯤 희연을 만났을지도 모른다. 그때 주머니속에 있는 핸드폰이 진동을 울렸다.

희연이었다.

"여보세요."
"응, 왜 전화하라고 했어?"
"지금 어디야!"
"집인데……."
"거짓말 마!"

핸드폰에 대고 소리쳤다.

"당황스럽겠지만 잘 들어. 나는 평소에 너와 별로 친하지 않았어. 그렇지만 언제부터인가 난 너의 대해 모든 걸 알게 되었어. 지금 니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니가 지금 어떠한 기분에 있는지 다 알고 있단 말야. 그러니 날 속일 생각하지마. 난 지금 널 도와줄 수 있어."
"야, 야……. 왜 그래. 너 같지 않아."

희연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나 같지 않아도 좋아. 아니, 나 같다면 너를 도와 줄 수도 없어. 그래, 말하기는 힘들거야. 내가 너의 상황을 충분히 아니까 이해 할 수 있어. 지금 니가 어디에 있는지 말하지 않아도 좋아. 그 새끼들한테 떨어져서 도망쳐! 희연아, 희연아 듣고 있니?"

나는 왼쪽 주먹을 꽉 쥐었다. 힘이 생겨 피가 몰리는 느낌이 들었다. 대답해 줘. 도망치겠다고. 나는 정말 널 도와주고 싶어.

"미안해."

울먹였다.

"미안하다니."
"너가 어떻게 이 일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날 도우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 힘들어…"
"너는 속고 있는거야! 내가 다 들었어."
"이만 끊을게."

희연은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그 전에 들린 소리가 있었는데 분명 남자의 목소리였다. 마음이 답답해왔다. 너무 늦은 것일까? 나는 저번에 희연이 그들과 갔던 모텔의 위치를 생각해보았다. 이곳에는 꽤 멀리 떨어진 곳은 분명하였으니 그 위치가 정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근방에 모텔이 있을 법한 곳은 한군데 밖에 없었다. 유흥가 거리였다. 술집도 많은데다가 얼마전에는 홍등이 비쳤던 곳이었다. 물론 모텔도 굉장히 많았다. 나는 그곳으로 뛰었다.

그러나 막상 가보니 생각해던 거보다 모텔이 적었다. 그때 기억을 다시 더듬어 모텔의 외부모습을 봤다. 간판이 매우 화려한 것 같았다. 네온사인이 반짝 거렸고, 특히 초록색 빛이 돋보였다. 초록색 불? 난 근처에서 초록색 불이 들어 가 있는 모텔 네온사인을 찾아보았다. 두 곳이었다. 그러나 이 두곳을 모두 가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산이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두곳에는 산이라는 글자는 없었다. 아, 역시 틀린건가.

선인장? 한 모텔 이름이 선인장이었다. 산은 아니지만 내가 잘못 본 것이라면 선자가 맞을 것이다. 선인장이라는 글씨 옆에 커다란 선인장 그림이 있었고 초록색으로 반짝 거렸다.

나는 곧장 그곳으로 달려 들어갔다. 축 늘어난 흰 티를 입고 있는 늙은 노파가 작은 문을 열고 나를 이상한 눈으로 봤다. 나는 기분이 나빴지만 교복까지 입은 남자가 혼자서 모텔을 들어오니 충분히 그런 눈으로 볼 수 있었다.

"학생은 안 받어."

한마디 툭 뱉어내고 문을 쾅 닫았다.

"저기요! 할아버지. 문좀 열어주세요. 중요한 걸 말해야되요."

노파는 귀찮다는 듯이 힘겹게 문을 열고 "무슨 말" 이라고 말하면서 승질을 냈다.

"한 20분 전부터 여기에 들어 온 손님 들어 온 손님중 여자 한명이랑 남자 셋이 들어 온 손님은 없었나요?"
"그런 걸 왜 물어! 니가 형사야? 사람 죽었냐고. 기분 나쁘게 스리."
"저한테 정말 중요해요. 제발 알려주세요. 분명 왔을 거에요. 어떤 방이에요."
"그런 사람 안 왔어."
"확실해요. 왔다니까요! 좀 알려주세요."
"안 왔어. 영업방해로 경찰 부르기 전에 당장 꺼져!"

노파는 문을 다시 쾅 닫았다. 앞이 깜깜했다. 지금쯤이면, 지금쯤이면. 너무 허무하고 힘이 빠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가끔 노파가 날 힐끔 쳐다봤지만 이젠 더 이상 신경쓰지 않기로 했는지 작은 텔레비전에 열중했다.
손님이 들어왔다. 순간 뒤돌아 보았는데 이럴수가. 희연과 그새끼들이었다. 희연은 날 아직 못 봤는지 한 개새끼에 팔짱끼고 웃고 있었다. 거짓으로.

"희, 희연아!"

희연이 날 봤다. 그와 동시에 세마리의 개새끼들도 나를 봤다. 으르렁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옛날에 아빠에게 들은 적 있다. 사람을 무는 개는 패야한다고. 몇 대 패면 다시는 사람을 물지 않는다고. 이 개새끼들.

"어? 이 새끼 여기 어떻게 왔어. 누가 문 안 잠그거야? 어떻게 나왔지?"

한 개새끼가 재수없게 지껄였다.

"희연이 그냥 보내줘요."

찡그린다. 똥개가 똥을 씹어도 저렇게 찡그릴까?

"니가 뭔데? 니가 얘 남자친구라도 돼?"
"아니요. 그냥 친구에요. 내 친구가 아니라도 어떤 양아치새끼들이 여자에게 이런 짓을 한다 해도 난 도울거에요."

나한테 다가온다. 분명히 나를 위협하는 말을 할 것이다. 그러나 난 힘이 있다. 힘이 있다. 이딴 놈들 단 한방에 나가 떨어지게 할 수 있는 힘이 있다.

"뭐라고 했냐? 지금 나랑 맞짱 뜨자는 얘기지? 내 귀에는 그렇게 밖에 들리지 않네."
"필요하다면요."

나는 힘이 있다. 힘이 있어. 겁을 낼 필요는 없는거야.

"아니, 이렇게 존댓말 할 필요도 없겠네. 이 개자식들아. 어디서 할 짓이 없어서 어린애를 팔아 넘길라고 해?"

표정을 봤어야 했다. 얼마나 무게를 잡고 있던지…….

"따라와."

희연에 얼굴에는 웃음이 사라지고 매우 진지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믿고 있을까?
그들이 향한 곳은 모텔 뒤였다. 앞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이게 쓰레기가 널리고 너무 어두웠다. 갈기갈기 찢어진 신문지, 부러진 각목, 산산조각이 나버린 병조각들이 뒷골목싸움이라는 느낌을 줬다.

"니가 얘 친구라고?"

개새끼가 희연의 허리를 움켜 안았다. 손이 점점 위로 가면서 개새끼는 세상에서 가장 비열한 웃음을 지었다. 희연은 처음에 잔뜩 찡그렸다가 바로 표정을 고쳤다. 내가 자기를 보고 있다고 알았기에 그랬다. 내 앞에서 그렇게 태연한 척 하는 이유가 뭘까.

"이렇게 해도? 크하핫."

혓바닥을 길게 내밀고 희연의 볼을 핥았다. 애완견이 아니라 똥개새끼가 말이다. 나는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속에서 무언가 알지 못 할 분노가 끓어 올라 미칠 것 같았다. 저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가 꽉 쥐었다.

"그만 두지 못해! 이 개새끼야!"

나는 빠른 걸음으로 개새끼 앞으로 다가갔다.

"어쩔건데? 고삐리 새끼가 어쩔…."

주먹으로 개새끼의 얼굴을 후려 갈겼다. 주먹에 느껴지는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았지만 개새끼는 깽깽거리며 바닥에 뒹굴렀다. 몇 번 깽깽거리는 듯 하더니 기절했는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뭐, 뭐야! 야, 임마! 일어나."

그러나 내 분노는 풀리기는 커녕 더욱 달아올라버렸다. 저 두마리도 기절시키지 않으면 어떻게 되버릴 것 같았다. 개새끼들.. 개새끼들.. 다 죽여야 돼. 개새끼들..

내가 다가가자 놀란 듯 했지만 꼴에 자존심은 있어가지고 폼을 잡는다. 두 번째 놈은 광대뼈가 튀어나온 곳을 쳤고 세 번째 놈은 망치로 내려 찍는 것처럼 머리를 내려 쳤다. 두대골이 부숴지는 듯한 매우 커다란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내 주먹에는 피가 묻지 않았다.

"희연아."

희연의 반응은 예상했던 것과 달랐다.

"니가 뭔데…. 왜 내 일에 상관하는 거야. 니가 뭔데…."

희연이 운다. 나 때문일까? 나는 희연의 곁에 다가갔다. 안아주고 싶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내가 무슨 권리로. 난 왜 우냐고 한마디의 말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뛰지도 않았는데 숨이 턱 막혔다. 눈이 가려워 비볐다. 피도 묻지 않던 내 주먹에 눈물이 묻는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학교에 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친구에게 전화가 왔는데 오늘 뭘 할거냐고 한다. 뭘 하긴. 학교에 가지.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오늘은 개교기념일이라 학교에 가지 않았다. 그걸 왜 잊었을까. 쉬는 날에 늦잠을 자지 않고 일찍 일어난 게 억울했지만 그만큼 쉬는 날을 오래 즐길 수 있지 않은가. 소파에 앉아 아침햇살을 맞으며 소파에 누웠다. 여유로웠다. 어제 있었던 일을 생각을 했다. 내 손에서 나오는 힘. 나도 믿지 못 할 힘은 나를 구했고 희연을 구했다. 문득 난 불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희연은 잘 들어갔을까? 희연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지 못한 난 여전히 겁쟁이었다. 지금 희연에게 보내는 문자 쓰는 게 왜 이리 힘들까. 버튼 하나하나 누르는 것이 너무나 힘겨웠다.

[별일 없었어?]

5분동안 이 말을 썼고 확인을 눌렀다. 제발 답장이 오기를 나는 간절히 바랬다. 그러나 보내고 나서 10분이 지나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내일 학교에서 용기를 내서 물어봐야겠다. 나는 텔레비전을 켰다. 마침 오전뉴스를 하고 있었는데 이 근처 뉴스를 하고 있었다.

전국뉴스가 간단히 끝내고 우리 지역뉴스를 하는데 특보가 떴다. 살인이 났다며 아나운서마저 긴장해서 소식을 알리고 있었다. 살인사건. 정확하게 어제 내가 그들과 싸웠던 장소였다. 안 좋은 기분이 들어 리모콘을 눌러 다른 채널로 돌렸다. 그 얘기. 다른채널. 조사중. 커다란 둔기에 맞아서 즉사. 사망자는 모두 세명.

머리가 복잡해졌다. 내가 보기로는 기절했을 뿐 생명에는 별로 지장이 없어 보였었다. 아무리 내가 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잊으려고 해도 어떤 점에서도 나와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난 집을 나와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래 정말 설마하는 마음이었다. 여관에 도착하니 몇대의 경찰차와 구경꾼들, 모텔뒤로 가는 길은 노란색 줄로 막아놓고 있었다. 그리고 물씬 풍기는 냄새. 기분 나빴다. 왜 죽고 지랄이야. 개새끼들. 잘 죽었지. 그런데 우리나라 경찰이 아무리 꼴통이라도 나 잡는 건 시간 문제 일 것이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목격자가 있었다. 바로 모텔주인인 노파랑 희진이었다. 희진이 나를 고소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희진이 그들이 나때문에 죽었다는 알게되면 (지금쯤 알지도 모른다) 어떨지는 모른다. 그리고 노파가 가장 문제인데 내가 그들과 바로 노파앞에서 말다툼을 한 걸 뻔히 알고 싸우러 간다는 것도 알 것이다. 만약에 경찰이 노파에게 뭔가 물어보면 나는 용의자 1 순위가 되버린다. 그렇게 되면 콩밥을 먹는 건 당연한 게 되고.

튀어야 할까? 고등학생이? 뭘 믿고? 힘으로 사람들 삥이나 뜯어? 그럼 내가 죽인 개새끼들이랑 다를 게 뭐야.

그럼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목격자를 없애는 것이다. 말이 너무 살벌한데 돌려서 말하자면 입을 막겠다는 것이다. 얼핏 지나가는 길로 경찰들의 대화를 들어보니 아직 노파에게는 가지 않은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모텔로 들어가서 노파를 만났다. 어제와 다를 게 없이 여전했다. 그 옷을 입고. 다만, 기분이 약간 좋아진 것 같았다.
기분이 좋은 이유가 뭐야. 기분 나쁘게.

"저 기억하시죠?"
"내가 학생은 오지 말랬지."

아무래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이러면 굳이 입을 막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아, 죄송해요. 다시는 안 올게요. 안녕히 계세요."

이렇게 쉬울 줄이야. 노파의 기분보다 내가 더 좋아졌다. 그건 내가 장담한다. 하하하하. 웃고 싶다. 이젠 희진이랑 잘 얘기해보면 된다. 희진이가 날 신고 할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상관없었다.

그런데.

"네가 어제 죽은 놈들이랑 싸웠던 놈이지?"
"네?"
"오늘 뉴스에서 다 봤어. 아침부터 워낙이 시끄럽게 하지 말이지. 보자마자 바로 네가 생각나더라구. 끌끌."

기분 나쁜 웃음. 그러나 여전히 기분이 좋아보였다.

"더구나 모텔 뒤에는 카메라가 있거든. 요기로 다 녹화가 돼. 곧 경찰이 찾아와서 보여달라고 할거야."

노파는 내가 한 일이라고 확신을 한 모양이다. 거기에다가 카메라에 녹화된 것까지 있다면 나는 어디로 도망칠 곳이 없었다.

그런데.

"난 네가 했다고 말하지 않을거야. 모텔 뒤는 너무 어두워서 그것만 보고는 누가 누군지 몰라. 그럼 경찰들이 화면속에 누군지도 모르는 너를 찾느라 머리좀 아플거야. 조금만 지나면 현상금이 걸리겠지. 난 그때 내가 갖고 있는 증거를 살짝 풀면 돼. 현상금 받고 이 지겨운 모텔 팔아 넘기고 해외여행이나 하면서 살거야. 너는 그동안 어디 숨기나 해. 학생. 학생은 이런 곳에 오는 거 아니야. 내가 아무리 돈에 미쳤다고 하지만 법은 지키지."

차분하게 말하면서 내 온 몸을 휘갈겨 놓았다.

그러나.

"한가지 잊고 계셨네요. 정말 그러시면 안되죠. 그깟 돈 때문에."
"역시 넌 너무 어려. 돈 때문이라고? 돈이면 못하는 건 없어. 모든 걸 다 할 수 있지."
"그렇군요. 그런데 안 궁금하세요? 한가지 잊고 있다는 걸요."
"그딴 건 궁금하지 않아."
"나중에 현상금을 받는다고요? 그게 가능할까요. 지금 손에 죽을텐데. 내가 바보인 줄 아셨어요? 그걸 전부 말하다니.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야. 그냥 나는 혹시 알고 있나 와 본 것인데. 웃기지 않아요? 전세 역전 됐네요."

침묵. 또 침묵.

"하하. 날 죽인다고? 바로 옆에 경찰이 이, 있어."

처음에는 죽일 생각이 없던 나는 점차 이 인간을 죽여야 내가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굳혔다. 이렇게 마음 먹은 이상 경찰이 이곳에 들이 닥치기 전에 빨리 죽여야 한다.

분노를 하자. 동정따위 필요없다.

나는 노파가 있는 카운터로 들어가려고 다가갔다. 그러자 노파는 재빠르게 문을 잠갔지만 낡은 문짝은 내가 살짝 잡아 당기자 툭하고 열렸다.

"거, 거래. 하자."
"무슨 거래요?"

나는 노파의 복부를 힘차게 쳤다. 노파는 내 말에 답을 하지 못하고 푹 쓰러졌다. 입에서는 피가 터져나와서 카운터 안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캬. 나는 더욱 확실하게 하기 위해 앞으로 엎어져 쓰러진 노파를 붙들고 머리를 세차례 세차게 후려쳤다. 그러자 노파의 눈이 늘어졌고 목이 옆으로 꺽였다. 아마도 목뼈가 부러진 것 같았다. 목에서 갈갈 하고 소리가 났다. 굉장히 기분이 나쁜 소리였고 토 할 것 같았다. 목격자 한 명을 죽였다.

혹시 몰라 그곳에 있는 테잎이란 테잎은 모두 주머니속에 넣었다. 이젠 경찰이 오기전에, 보기전에 빨리 이곳에 나가야 한다. 내가 사람을 죽이다니. 오늘 뉴스를 보기 전까지는 전혀 생각도 못했을 뿐더러 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내가 처음이 아니라는 걸 부정하고 싶다. 난 정말 죽을지 몰랐단 말이다. 그런데 죽었다. 그것도 사람을 죽였다고 하는건가? 그것도 살인이라고 하는건가? 나는 인정 못한다.

다행히도 내가 나오느 걸 본 사람이 없어서 안전하게 모텔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곧장 달려가 피가 묻은 웃도리를 세탁기 안에 넣었다. 다른 살인자들은 증거를 없애는 차원에서 피가 묻은 옷들은 모두 태우거나 버린다는데 아끼는 옷이라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묻은 피라고는 코딱지 만크도 안 묻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피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소파에는 반짝거리는 내 핸드폰을 볼 수 있었다. 핸드폰을 열어 보니 희연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나 너무 무서워 어떡해? 니가 그 사람들 죽인 거 같아]

심장이 두근거렸다. 당장 희연에게 달려가서 안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꾹 참기로 했다. 그 뭐랄까. 안정을 위해서라고 일까. 희연도 불안한 상태이고 나또한 뜻하지 않게 사람을 죽이고야 말았으니 굉장히 불안한 상태였다.

[내일 얘기하자 미안해 지금 도와주지 못해서...]

답장이 왔다.

[그래]

글자였지만 너무나 힘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 이젠 어떡하지. 아무도 모른다지만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아는데. 이 죄책감을 평생 안고 살아야 하는건가. 머리가 뫼비우스띠처럼 돌고 돌았다.

왜 그럴까. 이런 중죄를 지었는데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찾았고 졸음이 와서 잠을 잤다. 머릿속에는 내가 사람을 죽여놓고 이러면 안된다는 말을 계속 되풀이 하며 외치고 있는데 내 행동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다음 날 모닝콜이 울리는 것도 모르고 늦잠을 자기까지 했다. 결국 엄마가 깨워서 허겁지겁 챙겨입고 학교로 향했다. 지금쯤 뉴스에서는 유력한 목격자가 살인을 당했다고 나올 것이다. 문제에 심각성을 깨달은 경찰측에서도 현상금을 내걸고 목격자를 찾거나 나를 찾을 수도 있다.

그러나 완전범죄도 많이 있다. 대표적으로 화성연쇄살인사건도 있고 개구리소년(이건 완전범죄에 포함되는지 판단이 잘 되지 않지만)도 있다. 또 나는 흉기를 사용하지 않고 오직 주먹 만으로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경찰에서는 둔기라고 생각 할 것이다. 보통 주먹으로 사람을 죽이기는 쉽지 않으니. 그렇기 때문에 증거도 없고 목격자도 없는 (희연을 빼면) 이 상황에서 내가 평소와 같이 지낸다면 경찰은 날 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평소와 같이. 평소와 다름없게.

"상수야, 안녕!"
"뭐야. 어색해. 하지마. 무슨 어울리지 않게 아침인사야. 아이구. 닭살 돋는다."

희연은 와 있었다. 하기야 내가 워낙이 늦었으니. 다행히 담임이 아침조회를 하기 전에 왔다.

"괜찮아?"

내가 앉자마자 희연에게 물었다.

"......"

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를 바라 본다. 여전히 아무말 하지 않는다. 몇 초간 희연의 눈을 마주치자 괜히 뻘쭘해서 고개를 돌렸다.

"날, 봐."

작게 말했지만 무게가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내가 힘겹게 희연을 쳐다보았지만 희연은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희연이 내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었는지 나는 알 것 같았다. 그리고 한참후에서야 말을 꺼냈다.

"자수했으면 좋겠어."

벼룩이 들어도 자신들의 소리인 것처럼 착각 할 정도로 아주 작은 소리였다.

"니가 자수했으면 좋겠어."

그러나 나는 그 말에 뻔뻔해질 수밖에 없었다.

"무슨 소리야? 자수라니?"
"뉴스 못 봤니? 그곳에서 살인이 났어."

희연의 목소리가 약간 커졌다. 하지만 나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듣지 못 할 소리였다. 그러나 희연은 자신의 소리가 매우 컸다고 생각했는지 "좀 있다 얘기하자." 라고 말하고는 책을 폈다. 첫교시가 끝나고 쉬는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희연은 내 팔을 붙잡고 교실밖으로 나갔다. 잠시뿐이지만 희연의 손길이 닿자 묘한 기분이 들고 열이 올랐다.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서 걸음을 멈춘 희연은 뒤돌아 선채 말을 했다.

"어제 뉴스를 보니까 그 모텔뒤에서 살인이 났더라. 그것도 세명."
"나도 알아. 하지만…"
"니가 죽였어!"
"아니야. 내가 죽이지 않았어."
"그럼 누구겠니? 나는 네가 자수했으면 좋겠어."

나는 죽이지 않았지만 죽인 것일 수밖에 없었으니 진지하게 말하는 희연 앞에서 뭐라고 대꾸 할 수 없었다.

"너라도 나를 믿어줬으면 좋겠어. 나는 죽이지 않았어. 너도 봤잖아. 겨우 한대씩 때린 것 뿐이야. 나는 싸움을 그리 잘하지 않아. 급소같은 걸 우연히 쳐서 한명을 죽였다고 치자. 세명이나 가능하겠어?"
"아니야, 니가 죽였어."

희연은 거의 애원을 하듯이 말했다. 또 나는 희연의 그런 모습을 처음 봤기에 당황했다. 희연의 이런 행동에 나도 모르게 내 행동이 변했다.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 그래서 자수하라고? 그러면 너는 어땠지? 내가 죽였다고 생각하는 그 개새끼들한테 몸까지 팔면서 아버지를 죽이고 자수하려고 했어? 말해봐."

희연은 놀랐다. 그것도 굉장히. 입을 벌린 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네, 네가 어떻게 그걸 알았지? 어떻게 알았냐고!"

울음을 터트렸다.

"설마 내 뒤를 조사하고 다니니?"
"아니야."
"뭐가 아니야. 그럼 네가 어떻게 알아. 어?"

나는 사실을 말하려다가 말하지 않기로 했다. 결국 내 능력으로 인해 희연의 뒤를 조사한 것이니까 희연의 말이 전혀 틀린 말도 아니었다. 나는 이젠 헷갈리기 시작했다. 내가 하는 짓이 잘하는 일인지. 희연을 돕기 위해 내가 늪으로 빠졌다. 텔레비전에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고 자신이 죽는 모습을 마치 영웅처럼 표현하는 것을 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단하다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아니었다. 그게 얼마나 바보같은 짓인가. 만약에 죽어 떠돌아다니는 혼이 정말 있다면 영웅대접을 받는다는 게 상관없겠지만 혼마저 없다면? 그냥 죽는 다는 게 한줌의 흙으로 변하는 거라면? 그런 내가 별로 친하지도 않던 여자아이를 구하기 위해 사람까지 죽였다. 연민으로 시작한 희연의 감정이 억울함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내가 이래서 사랑을 얻을 수 있을까? 영웅대접을 받을 수 있을까?

"미안해. 하지만 뒤를 조사하지는 않았어. 믿어줘."

수업종이 친다.

종례시간이 끝나고 희연이 잠시 얘기하자고 불렀다.

"아까 화낸 거 미안해."
"아니야. 그런데 왜 불렀어?"
"다시는 자수 하라는 말 하지 않는다고 약속할게. 하지만 한가지만 얘기해줘. 네가 어떻게 내 얘기를 알았는지 말이야."
"말하면 화낼지도 몰라."
"화 안 낼게."
"거짓말 같다고 생각 할거야."
"그렇게 생각 안해."

웬만하면 말하지 않으려고 했던 난 희연에게 모든 걸 솔직하게 말했다. 내가 처음에 이 능력을 갖게 된 것부터 그 능력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다만, 왜 머리카락을 희연에게 붙였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내 마음을 알아 챌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희연에게 얼마나 더러운 짓을 하려고 했었던 것도 모두 말했다. 또 그곳에서 내가 얻은 새로운 능력도 말했다.

"정말 너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거니? 믿는다고 말하고 이런 말 하기 미안하지만 솔직히 믿지 못하겠어."
"괜찮아. 나도 이게 꿈인 것 같거든."

정말 이게 꿈이었으면. 처음으로 간절하게 능력이 애초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평범하게 아침에 일어나서 졸린 눈 비비며 맛없는 아침밥을 먹고 학교에서 공부하고 집에 돌아와 복습하는 공부를 하고 잠을 자는 일이 그리웠다. 그렇다고 지금 그런 일을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처럼 마음이 불안하고 아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2

두렵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지훈이가 사람을 죽인 것이 확실하다. 사람을 죽인다는 걸 듣기만 했지 실제로 겪어보니 (내가 죽이지는 않았지만) 악마의 손길이 내 온몸을 헤집고 다니는 것 같다. 우리 아버지는 알콜중독자에 가정폭력자이다. 하루도 술을 먹지 않는 날이 없었고 엄마에게 손찌검을 했다. 그래서 엄마는 온통 멍투성이였고 동네사람 보기 창피하다며 밖에 나가는 일은 장보는 일 빼고는 나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공원에 혼자 있는데 불량배 세명에게 잡혀서 어디론가 끌려갔다. 그들은 날 강탈하였다. 내가 애써 거부하고 있는 힘을 다 써도 남자 세명을 이길 수는 없었다.

"야, 얼굴좀 예쁜데? 나랑 사귈래? 오빠가 잘 해줄게. 킬킬."

나는 거절 할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이미 겁에 먹은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래? 오빠가 뭘 해줄까? 너도 내가 마음에 들었나 보구나. 내 물건에 한번 맛들인 여자들은 아주 미친다니까. 카카카. 뭐든 말해. 다 해줄게."

끔찍했다. 굉장히 아팠고 뜨거운 피가 흘러나와서 죽는 것이 아닌가 겁이 났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잠시뿐이었다. 그가 뭐든 다 해준다는 말에 나는 그보다 더 인간쓰레기인 아버지를 생각했다. 아버지만 없다면 어떤일이 일어나도 지금보다 행복할거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에게 맞았던 엄마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날 밤, 잠에서 깨어나보니 엄마는 발코니에 나가서 입을 손수건으로 꾹 막고 울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잠시도 지켜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애써 눈물을 먹으며 잠을 자려고 했다. 내가 왜 엄마가 울고 있는 모습을 계속 볼 수 없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를 죽이는 걸 부탁하기로 했다.

"사람을 죽여줘요."
"뭐, 뭐?"
"정말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만 죽여주면 몇번이라도 해줄게요. 그러니 제발 누구좀 죽여줘요."

그는 빠르게 코웃음을 쳤다.

"누구를 죽여줘? 말해봐. 크크크."

왜 웃는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요. 우리 아버지를 죽여줘요."

그리고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뿐만 아니라 나머지 둘도 마찬가지였다.

"알았어. 내일 그 공원으로 나와."

나는 아픈배를 만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가니 아버지는 없었고 장을 본 엄마가 요리를 하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요리를 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그냥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슬프거나 우울한 일이 있을 때 요리를 하곤 했다. 그리고 그렇게 한 요리는 아무도 주지 않고 자신이 혼자 다 먹었다. 그게 유일한 해소라면 그 일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방에 들어가서 책상에 앉아 공부했다. 그리고 실이 나간 것처럼 웃음이 계속 나왔다.

다음 날 학교 갈 때도 기분이 좋아졌다. 잔인한 패륜아가 되었지만 나는 그 일을 즐길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더러운 쓰레기이며 아무 쓸모없는 인간이고 차라리 없어지는 게 환경이 덜 오염되게 하는 것이다. 학교에 가보니 지훈이가 먼저 와 있었다. 지훈이는 내가 가방을 걸때까지 빤히 쳐다보았다.

"안녕?"

인사를 했다. 그깟 인사가 어려운 것도 아닌데 지금까지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으, 응."
"오늘 늦잠을 잤어. 바보같이 말야. 시험이 다가오는데 잠이 올까."

내가 인사를 하자 왜 그러냐나는 듯 했다. 그래서 나는 한마디 더 했다. 정말 다정하게 해서 지훈이와 친해지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다정하게 말해도 지훈이는 더 표정이 굳어졌다.

"괘, 괜찮니?"
"응? 뭐가?"
"아냐. 그냥 늦잠 잔 거 괜찮냐고."
"괜찮은데 왜?"
"아니야."

지훈이는 뒤늦게 늦잠을 잔 것이 괜찮냐고 했지만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었다. 그 후, 아무 말이 없자 나는 교과서를 꺼내놓고 예습을 했다. 눈은 책을 보고 있었지만 생각은 온통 어제일로 가 있었다. 수업시간이 되어도 수업은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고 공원으로 곧바로 갔다. 한참을 기다리자 아무도 오지 않아 전화를 했다. 그들은 곧 온다고 했다. 그리고 곧 세명의 남자가 다가왔다. 쇳덩어리를 얼굴에 구멍을 뚫고 끼어넣은 것이 아프지 않을까? 세명 모두 쇳덩어리를 달고 있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나는 그에게 붙어서 팔짱을 꼈다. 담배냄새가 강하게 났지만 다행히도 술냄새는 나지 않았다. 그거면 됐다.

그 후로 몇 번 지훈이에게 연락이 왔었다. 내가 위험하니 어딘지 말하라고. 그걸 못하겠으면 그들에게 도망치라고. 나는 그 지훈의 뜻밖의 말에 갈등을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그들과 함께 간 모텔에서 지훈이를 만나게 됐다. 지훈이는 모텔주인에게 무언가 간절히 부탁하고 있었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내가 지훈이를 보고 놀란 것에는 두가지가 있었다. 한가지는 어떻게 이곳에 왔냐 이거고, 다른 하나는 지훈이가 사는 동네에서 못해도 한시간은 걸릴 거리인데 지훈이가 내게 연락한 시간대를 비교하면 시간이 너무 맞지 않았다. 나는 지훈이를 불렀다. 하지만 그건 실수였다. 나는 지훈이를 부르지 말았어야 했고 뒤돌아봐도 몸을 숨기거나 고개를 푹 숙였야 했다. 결국 나를 알아 본 지훈이는 그들에게 화를 내며 말했다.

"희연이 그냥 보내줘요."

지훈이는 이렇게 소리쳤다. 내가 그 말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정확히 내 이름이 들어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훈이는 나를 구하기 위해 화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일까…. 지훈이가 거슬렀다.

몇마디 신경질적이게 주고 받은 후 모텔 뒤로 갔다. 나는 그에게 싸우지말라고 부탁해봤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지훈이는 싸움을 그리 잘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러는 지훈이가 왜 그러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최소한 나 외에는 아무도 피해가 가지 않기를 원했다. 그건 지훈이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지훈이가 절대 다치는 일이 없기를 바랬다. 얼핏봐도 지훈이는 그들에게 상대조차 되어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해도?"

그는 갑자기 내 허리를 움켜잡았다. 순간 불쾌해서 표정을 잠깐 찡그렸지만 왠지 지훈이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면 안되는 생각에 표정을 다시 바꿨다. 그리고 지훈이의 얼굴을 봤을 때 놀랐다.

"그만 두지 못해! 이 개새끼야!"

지훈이는 분노로 가득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리고는 굉장히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나도 그 옆에 있었기에 엄청난 속도였다는 걸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지훈이의 그런 분노는 그에게 웃음거리밖에 안되는 듯 했다

"어쩔건데? 고삐리 새끼가 어쩔…."

이것도 순간이었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지훈이에게 맞아서 나가 떨어졌다. 무언가 깨지는 소리. 큰 소리지만 바람을 가르는 지훈이의 주먹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나가 떨어진 그는 몇 번 고통의 신음소리를 내더니 죽어버렸다.

"뭐, 뭐야! 야, 임마! 일어나."

둘은 당황해 일어나라고 말했지만 이미 죽은 사람에게 그런 말은 아무 소용 없는 짓이었다. 지훈이는 나머지 둘도 주먹을 날려 기절시켜버렸다. 죽은 것 같다. 나는 울고 싶었다. 지훈이가 모든 일을 망친 것처럼 미웠고 지훈이가 내 이름을 불러도 미친듯이 괴로웠다.

"니가 뭔데…. 왜 내 일에 상관하는 거야. 니가 뭔데…."

나는 이렇게 말하고 펑펑 울었다. 눈물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지훈이의 형상이 없어진 것 같았다. 10여 분 울다가 힘없이 두시간을 걸어서 집으로 갔다. 먼 길이었다.

아버지는 며칠동안 들어오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어디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다음 날은 개교기념일이라 학교에 가지 않았다. 일어나지보니 지훈이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나는 답장을 하려고 몇번이고 내용을 썼지만 결국 핸드폰을 닫았다.

"일어났니? 오늘 개교기념일이라고 했지? 푹 쉬어. 맨날 공부한다고 고생했는데."
"알았어."

오늘따라 햇살이 거실로 듬뿍 들어오는 것 같았다. 텔레비전을 켰지만 햇살에 가려 화면은 잘 보이지 않아 소리만 들렸다. 익숙한 아나운서 목소리때문에 나는 그것이 지역뉴스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다급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어떤 사건인지 짐작을 하게 했고 조금만 더 지나니 그 어떤 사건이 나와 관련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지훈이도 지금쯤 이 뉴스를 봤을 것이다. 무려 세명이나 죽였고 나는 그 일에 유일한 목격자였다. 지훈이도 내가 눈만 감아주면 조용히 넘어 갈 것이라고 생각 할 것이다. 그럼 난 어떻게 해야 할까. 내 마음은 지훈이의 도움이 헛되었다고 생각하고 평생 이 일을 품고 살 수 없었다. 지훈이 원하지 않는 살인을 저질렸지만 말이다.

그리고 오늘 모텔주인이 살해되었다는 뉴스를 보게 되었다. 뉴스는 현장의 사진을 화면으로 내보내지 않았지만 잔혹하게 살해가 된 것과 유일한 목격자라는 것으로 보아 어제 일어난 사건에 이은 사건이라고 했다. 범인은 증거를 모두 없애기 위해 CCTV에 찍힌 테잎들을 모두 사라졌다고 나왔다. 그럼 그 범인이 누구일까. 나는 지훈이밖에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지훈이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힘이 있었고, 그렇게 해야 할 이유도 있었다. 학교에서 목격자가 됐을 때 대처법이라는 과목이 있었다면 나는 지혜롭게 대처를 할 수 있었을텐데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갈등만 해야 했다.

3

지훈과 희연은 서로 친구이자, 사랑하는 사이이며 결국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된다. 사람의 죄책감이란 얼마나 가는 것일까. 지훈은 자신이 사람을 네명이나 죽였다는 죄책감에 못 벗어나 정신병까지 앓게 되었다. 그걸 알게 된 희연이는 자신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생각해서 지훈의 옆을 떠나지 못하게 된다. 지훈을 돌보는 동안 희연은 자신이 지훈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의 능력으로 지훈은 정상으로 회복했고 무사히 고등학교를 마치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희연의 아버지는 희연이 졸업을 할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지훈의 능력이 두가지가 아니라 세가지였던 것이다. 그것의 대한 것은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지훈조차 자신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희연이 아버지를 실종신고를 해도 아무런 말도 안했던 것이다. 실종신고를 하는 희연은 아버지 같지도 않은 아버지였지만 그래도 아버지였기에 최소한 생사확인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같은 대학은 아니지만 지훈과 희연은 모두 수도권대학에 합격해서 서로 만나는 데는 어렵지 않았다. 어느 날 지훈이 희연에게 이런 말을 했다.

"결혼 해줘."

여자는 한번쯤 튕겨야 한다고 하던가? 희연은 생각해본다고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속뜻은 그렇지 않았다. 지훈은 그 말이 마치 허락이라도 한 것처럼 기뻐서 팔짝팔작 뛰고 싶었다. 시간은 화살촉처럼 빨리 흘러갔고 지훈은 남자라면 누구나 겪는 군대에 갔고 제대를 한 후에는 취업난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지훈은 순조롭게 대기업에 취업하게 됐다.

몇 년이 지나고 지훈은 아파트를 장만하였는데 마침 이때가 희연이 지훈의 프로포즈를 받아 준 때이다. 양부모 반대 없고 서로 사랑을 확인도 했고 지훈과 희연은 영원히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무서운 일은 결혼을 하고 자식이 6살쯤 됐을 때 일어났다. 직장상사와의 안좋은 일때문에 사표를 내고 말았다. 꼭 그럴 것 까지는 없었는데 지훈은 더러워서 못해먹겠다고 상사에게 침을 뱉고 회사를 나왔다. 지훈은 그 후로 술을 계속 마셨다. 희연은 그런 지훈이 안쓰러워 위로를 해줬지만 지훈은 희연의 위로는 필요없다고 생각했다. 유일한 위로는 술이었고 매일 슬펐던 지훈은 매일 술을 마셨다.

"여보, 이러지마. 이젠 술은 그만 먹고."
"시끄럿!"

지훈은 희연의 뺨을 때렸다. 그리고 계속 된 폭력. 희연은 자신의 아버지가 살아 돌아 왔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괴로웠다. 또 악몽에 빠지는 것 같았다.

-end

Comments

G 2022.09.27 06:41
기구한 희연의 삶...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추천 비추
2614 사주 기신대운 클라이막스엔 반드시 큰 다툼과 싸움이 일어나지만 그것은 좋은 현상이다 댓글+1 G 나루호도 04.21 31 0 0
2613 사주 사주 대운 보는 방법 댓글+1 G 서킷로얄 04.21 36 0 0
2612 사주 근묘화실 년(年)에 대한 고찰 댓글+1 G 설화 04.15 36 1 0
2611 사주 핵기신운 쎄게 쳐맞은 사람들 특징 달관함 댓글+1 G 세이 04.14 49 0 0
2610 사주 사주 봐 주는 직업은 활인업이 아닙니다 댓글+1 G 길조 04.12 57 0 0
2609 사주 인터넷, 유튜브에서 사주 년운 볼때 주의해야 할 것들 댓글+1 G 길조 04.12 43 0 0
2608 사주 초년용신 중년기신보다 비침한건 세상에 없다 댓글+1 G 기린 04.11 65 0 0
2607 사주 기신 대운에서 용신 대운으로 바뀌는 것은 드라마보다 더욱 반전이 심하다 댓글+1 G 옴뇸 04.11 62 0 0
2606 사주 일간별 특징과 믿을만한 일간, 못믿을 일간 댓글+2 G 정점 04.06 155 0 0
2605 사주 용신대운에 중요한 악연 대처 방법 댓글+1 G 길버트 04.05 132 0 0
2604 사주 사주에서 인성을 용신으로 사용하는 것의 의미 댓글+1 G 도토리 04.03 101 1 0
2603 사주 사주로 남녀 궁합 보는 방법 댓글+1 G 유희 04.03 154 0 0
2602 사주 기신운 글이 유행이냐? 기산운에서 호운으로 들어갈때 보이는 증상들 나도 썰 풀어봄 댓글+1 G 호빵맨 04.02 91 0 0
2601 사주 20년짜리 핵기신운 끝났다 더 이상 무서울것이 없다 댓글+1 G 궁디팡팡 04.02 63 0 1
2600 사주 인다남은 절대로 만나선 안된다 댓글+1 G 세인 03.30 145 2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