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추리/스압) 그 여자의 향기

(공포/추리/스압) 그 여자의 향기

G ㅇㅇ 1 2,201 2022.09.27 03:10

정원과 수영장을 갖춘 수십억 대를 호가하는 이 저택에서, 상주 가정부로 일한다는 29살의 미모의 여성이 커피를 갖다 주고 사라진지 30여분만에 문제의 여자가 계단을 밟으며 내려오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고무줄로 묶고 있는 그녀는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듯 핑크빛 잠옷 위에 나이트 가운을 걸쳤고 허리끈을 힘껏 동여 매고 있었다.

 

가정부가 너무 젊고 미인이어서 한 번 놀랐던 최 형사와 나는 가정부의 미모를 단 번에 시들케 해 버리는 승희 라는 이름의 여자를 보며 잠시 넋이 나갔다.

 

화장기가 전혀 없는 얼굴이었지만 마치 표나지 않은 화장이라도 한 듯 피부가 뽀얗고 깨끗했다. 늘씬한 몸의 선이 단단한 조인 허리끈으로 살아 났고, 머리를 묶기 위해 양 손을 올리고 있는 탓에 가슴의 윤곽이 탐욕스럽게 봉긋 솟아 났으며 무릎 아래로 드러난 두 다리는 희고 매끄러웠다.

 

 

미모에 놀라 엉거주춤 일어난 우리 앞으로 여자가 다가왔다. 우리는 승희가 미인일 거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다. 사채업자인 아버지에게 이 저택을 상속받았다는 얘기는 듣고 왔었다.

“오래 기다렸죠. 잠이 부족하면 누가 깨워도 눈이 떠지지 않죠. 하지만 이렇게 잘 생긴 형사님들이 와 있다는 걸 알았으면 억지로 라도 일어났을 텐데.”

승희의 눈이 최 형사를 지나 내 얼굴로 옮겨오더니 무안할 정도로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어렸다. 나는 형사가 방문한 것을 알고도 늑장을 부리다가 내려온 여자가 긴장하기는커녕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한껏 여유를 부리는 것에 당혹스러웠다.

 

 

37살의 국회의원 보좌관이자 아내 살해범의 피의자로 체포된 강태민의 내연녀로 밝혀진 이승희. 태민이 모시는 의원이 장관직에서 물러난지 몇 달 되지도 않은 여당 실세 중의 실세여서 태민이 살인 용의자로 체포되었다는 뉴스는 청와대로까지 불통이 튀었다. 운동권 학생이었던 태민이 운동권 출신이 대거 포진한 청와대 실세들과 친분이 두터웠을지 모른다는 근거 없는 추정이 청와대의 기강 확립을 운운하는 지경으로 비약된 형국이었다.

“차는 드신 것 같은데, 주스라도 더 하시겠어요?”

여자가 맞은편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으며 나의 몸을 아래위로 훝으며 말했다. 나는 태민이 이 여자에게 유혹당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착각이 아니라면, 여자는 노골적으로 내게 추파를 던지고 있었다. 태민의 주장대로 라면 그녀는 태민과 1년 넘게 살을 섞는 관계였다. 때문에 어떤 감정이라도 있어야할 듯 한데, 그녀에게선 태민의 존재 가치는 이미 사라진 듯 느껴졌다. 아니면 감추고 있는 것일까.

 

 

“아니, 됐습니다. 여기 오기 전에 알아보니 신문사에 사직서를 냈더군요. 강태민 씨 사건 때문입니까?”

여자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내게 담배를 달라고 했다. 담배를 폐속 깊이 빨아들이는 그녀의 눈동자에 아련한 그리움이 어리는 것 같았다. 이윽고 연기를 내뱉은 그녀의 눈동자에 순간적이었으나 강한 적개심 같은 빛이 스쳤다.

“진짜 힘들게 공부해서 입사한 회사였죠. 하지만 나 때문에 자기 아내의 목을 졸랐다고 하는데, 도의적인 책임은 피할 수가 없더라고요.”

 

 

“강태민 씨는 횡성수설하고 있죠. 자백할 당시엔 자기가 아내를 죽였다고 자백했지만 다음날부터 진술을 번복하고 있어요. 자기가 죽였는지 확실치 않다고 하더니 이젠 태도를 바꿔 무죄를 주장하고 있죠. 그날 술에 너무 취해 있긴 했지만 아내를 만난 기억은 없다는 겁니다. 굳이 사이도 안 좋고 또 집에서 만날 수 있는 아내를 밖으로 불러내 차에 태우고 1킬로미터 떨어진 공원까지 갈 이유가 없다는 거죠.”

 

 

태민의 아내 김순미는 공원 깊숙한 곳에 세워진 그랜저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사망 원인은 가느다란 로프에 의한 질식사였다. 태민은 아내가 사망했을 시각으로 추정되는 새벽 2시경에 양복저고리를 입지 않은 채 자기 집으로 올라가는 모습이 엘리베이터 감시카메라에 포착되었다. 그는 그 시각 이전에 퇴근한 모습이 감시카메라에 찍히지 않아 용의선상에 올랐다. 와이셔츠 바람으로 퇴근한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갔던 것이다.

또한 김순미의 휴대폰에 태민의 전화번호가 찍혀 있었고, 그것은 녹화테이프에 아파트를 나서는 김순미의 모습이 촬영된 시각에서 1시간 가량 앞서 있었다. 김순미가 태민의 전화를 받고 집을 나갔다고 추정되는 대목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나간 후 30분 후에서 1시간 사이에 살해되었다. 왜 전화를 받은 1시간 후에 집을 나섰을까 하는 의문은 그가 그 시각쯤에 공원으로 나오라고 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다음 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출근을 한 태민은 아내의 가게에 전화까지 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의상실 종업원은 태민이 어젯밤에 아내가 집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출근을 했는지 물었다고 진술했다.

미처 엘리베이터에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었다는 것을 망각한 태민은 녹화테이프를 보여 주며 추궁하자 더 이상 부인해 봤자 소용없다고 판단한 듯 술술 자백하기 시작했다.

그와 김순미는 며칠 전부터 냉정 중이었다. 그는 성격 차이를 이유로 들어 이혼을 요구했고, 순미는 죽어도 이혼은 못해 주겠다고 했다.

 

 

사건이 있던 날 아침에 태민은 계절이 바뀐 것을 실감하고 장롱 안쪽에서 가을 양복을 꺼내 입었다. 순미는 믿었던 남편의 갑작스런 이혼 요구에 의처증이 심각한 상황이었고, 가을 양복을 입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한 순미는 자기가 사 준 양복을 입고 어떤 년을 만나러 다니냐며 달려 들어 옷을 벗기려 들었다. 태민은 순미를 밀쳐 버리고 출근했다.

태민은 그 때문에 양복을 벗어 아무데나 버렸을 거라고 진술했다. 그녀를 죽인 것은 아침에 너무 화가 났고, 그런 여자가 있는 집으로 퇴근해야 하는 자신을 생각하자 견딜 수 없는 부아가 치밀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혼은 안해 주고 죽을 때까지 곁에서 괴롭힐 여자라고 판단했다고 했다. 그는 순미와 이혼하고 승희와 결혼할 야심을 품고 있었다. 사흘만에 자기 존재를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승희와 말이다. 하지만 그의 야심에는 승희의 언질이 있었을 것이다. 승희가 대놓고 이혼하란 얘기는 안했지만 그런 의사를 자주 비췄다고 태민은 진술했다.

 

 

그가 진술을 번복한 것은 푹 자고 일어난 다음 날 아침이었다. 그는 과음하면 필름이 자주 끊기는 체질인데, 승희를 만나고 택시에 탄 기억 후부터 한기가 들어 눈을 뜬 공원 벤치 이전의 기억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즉 승희 집에서 술을 마시고 그녀가 태워 준 택시에 몸을 실었고 곧 잠이 든 것 같으며, 눈을 떠보니 공원 벤치였다는 것이다. 그는 속이 울렁거려 택시를 세우고 내렸구나 생각했다고 했다. 의원를 보좌하면서 술만 늘어 어느 날부터 필름이 끊기는 현상이 나타났고, 점점 그 증세가 심해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던 그는 아직도 취기로 어질거리는 거리를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고 진술했다. 그는 승희 집에서 몇 시에 나왔는지도 기억하지 못했고, 순미에게 전화를 걸은 기억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우리는 그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무죄를 주장한다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게는 살인 동기도 있었고, 자기 입으로 필름이 자주 끊긴다는 것과 공원 벤치에서 정신이 들었다는 진술은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가 몇시 경에 승희 집을 나섰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다른 수사관들은 살인 증거품인 로프와 양복저고리를 찾고 있는 동시에 그 날 태민을 태운 택시기사를 수배 중에 있었다. 정황 상으로 봐서 김순미 살인 사건의 범인이 태민에서 다른 사람으로 바뀔 가능성은 희박한 상태였던 것이다.  

“그가 안 죽였다고 한다고요?”

승희는 뜻밖의 소리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요? 강태민 씨가 자기 아내를 죽일 거란 말을 한 적이 있습니까?”

“그런 말은 하지 않았어요. 그치만 내 집에 오면 자기 집에 가기 싫다고는 자주 했죠. 난 그럼 그냥 자고 가라고 했어요. 하지만 한 번도 자고 간 적은 없어요. 바람은 몰래 피어야 한다나 어쩐다나 그런 소릴 했죠. 당신에게 내 존재는 오락거리밖에 안 되냐고 따진 적은 몇 번 있어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선 마음에 없는 소리도 간혹 해줘야 하거든요.”

 

 

“옛? 마음에 없는 소리라니요? 그럼 그를 이용 가치로만 여긴 겁니까?”

그녀가 다리를 바꿔 포갰다. 난 그녀의 다리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난 정치부 기자예요. 경쟁심과 승부욕으로 따지자면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걸요. 남보다 앞서기 위해선 내 몸도 아끼지 않죠.”

어처구니 없게 들리는 승희의 말에 나와 최 형사는 깜짝 놀랐다. 그게 사실이라면 태민은 자신의 출세를 위해 물불 안 가리는 여자에게 완전히 놀아 난 것이며, 허황된 망상에 사로잡혀 거추장스러워진 아내를 죽인 것이 된다.

 

 

승희는 태민이 자기 아내를 죽였다는 소식에 어떤 심정이었을까. 태민으로 인해 직장을 그만두어야만 한 승희는 자신의 박탈감만 분개하고 있지, 태민에 대해선 어떤 연민도 동정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아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그녀의 눈에 어린 적개심은 태민을 향한 것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승희에게서 순미를 죽일만한 어떤 동기도 단서도 없음을 내심 확신했다. 미약한 혐의였지만 승희도 용의선상에 올려 놓고 있었던 우리였던 것이다.

난 태민이 집으로 돌아 간 시각을 물었다. 그러자 승희는 물어볼 것도 없는 질문이라며, 태민은 항상 정각 자정이 되면 집으로 돌아갔으며, 그 날도 마찬가지라고 진술했다. 왜 그렇게 취할 정도로 과음했냐는 질문엔 조금만 마시라고 말렸는데도 꾸역꾸역 마셨다고 말했다. 그는 기분이 안 좋아 보였고, 이유를 묻자 아내와 다퉜다며 곧 이혼할 수 있을 거란 소리도 했다고 했다. 그녀와 정사를 나눈 후에 늘상 하는 소리여서 승희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 넘겼다고 했다. 그런데 다음 날 그가 아내를 죽인 혐의로 체포된 뉴스를 접하고 기암했다는 것이다. 그가 그토록 순진한 남자인 줄 알았다면 가정을 버린다는 소리는 못하게 했을 거라고 탄식했다. 그것은 곧 그녀의 파멸로 이어진다는 것을 승희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젠 남자도 골라가면서 사귀어야겠어요.”

우리를 대문 앞까지 배웅나온 그녀가 내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 눈빛이 너무 요염해서 난 순간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그런 나를 그녀의 가정부가 대문 안쪽에서 기이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한 순간, 난 우리가 승희에게 농락당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서늘한 느낌을 전해 받았다.







 

 

 

 

최 형사는 사무실로 돌아가고, 난 승희 집으로 올라가는 골목 입구 한 켠에 차를 주차해 놓고 있었다. 해가 서쪽 하늘로 기울기 시작하자 시장바구니를 든 아줌마들이 하나둘씩 골목에서 내려왔다. 오전 11시경에 승희 집을 방문했으니까, 장장 6시간의 지루한 잠복 근무가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난 승희의 가정부가 풍기던 기묘한 느낌을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는 육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녀와 승희 사이엔 고용인과 고용주 이상의 뭔가가 있을 것 같았다. 그토록 젊고 미모를 가진 여자가 가정부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은 내 상식에 맞지 않았다. 물론 그런 연유로 그녀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녀가 김순미 살인사건에 대해 우리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으며, 그 예감은 승희가 김순미 살인사건에 관련되었을 개연성을 암시했다. 미심쩍은 것이 있으면 조사를 하는 것이 수사의 원칙이다. 육감이나 예감도 미심쩍은 성질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철수하라는 반장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난 끈질기게 그녀를 기다렸다. 그 이면에는 29살의 요녀 승희에게 끌린 33살의 내가 혐오스러웠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내가 아직 미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었다. 그리고 마음만 먹으면 유혹할 수 있는 상대로 보고 있는 듯 했다. 불쾌하고 자존심이 상했다. 사적인 감정은 수사를 그르칠 우려가 있었지만, 난 까닭없이 승희를 김순미를 살해한 진범으로 몰고 있는 내 자신을 느꼈다.

 

 

난 승희의 가정부를 발견하고 클랙슨을 울렸다. 그녀는 천으로 된 시장바구니를 돌돌 말아 쥐고 시름에 잠긴 얼굴로 내려오다가 클랙슨 소리에 내 쪽을 돌아보았다. 좀 놀란 표정이었으나 이내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내게로 다가왔다.

“물어볼 말이 있습니다. 잠깐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여자가 좀 머뭇대더니 조수석에 올라탔다.

“어차피 버스를 타야해요. 마트까지만 태워주실래요?”

여자는 조금도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그렇다고 긴히 할 말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천성이 우울한 눈빛인 것을 내가 착각한 것은 아닐까. 여자에게서 승희를 추궁할만한 단서를 기대했던 난 진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참고로 조사할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난 차를 출발시키고 애써 기운을 내서 말했다.

여자는 말하라는 듯이 힐끗 쳐다보았다.

“사흘 전, 즉 강태민 씨가 이승희 씨 집에 머물 동안 집에 있었습니까?”

“아니요. 집에 누가 오면 난 미리 음식을 차려놓고 집을 나와요. 그런 날은 내 주소지가 있는 집에 가죠. 그곳에 대학을 다니는 남동생이 혼자 살고 있거든요. 종로구 창신동 꼭대기에 살고 있어요. 주소는…….”

여자가 자기 알리바이를 증명해 줄 거란 듯이 상세 주소를 열거하더니, 내가 운전하는 것을 쳐다보고는 메모지에 적어 주기까지 했다. 난 뜻밖의 여자의 태도에 맥이 풀려 버렸다. 여자는 자기를 의심하고 있는 줄 아는 것이다. 대체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뭐란 말인가.

 

 

“성함이?”

“은영이라고 해요. 박은영.”

“은영 씨, 내가 은영 씰 의심하고 있다고 생각한 겁니까? 왜죠?”

  은영은 움찔 놀란 것 같았으니 곧 쓴웃음을 입에 걸었다.

“승희가 날 모함한 줄……. 아니에요. 대문 안쪽에서 지켜보는데, 승희가 형사님께 소곤거린 것 같았어요. 그리곤 형사님이 날 쳐다보았죠. 그랬던 형사님이 기다리고 있으니, 날 의심하는 줄 알았어요. ”

 

 

“이승희 씨가 왜 은영 씰 모함할 거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승희 라고 호칭하는 걸 보니 서로 친구 사이 입니까?”

"예, 친구였죠. 난 승희에게 큰 돈을 빌렸고, 난 그 빚을 갚지 못했어요. 내가 왜 승희 가정부로 일하는지 대충 짐작이 갈 거예요. 그 이상은 묻지 마세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거든요. 걘 날 괴롭히는 것을 좋아해요. 자기 가정부로 빚을 갚아 나가는 날 보는 것만으론 성이 안 차는 거죠. 그런 이유로 난 승희에게 피해의식이 깊어요. 억울한 점이 많지만 증명할 길도 없고.“

“증명할 길 없는 억울함이란 무슨 의미죠?”

 

 

“그런 게 있어요. 그건 그렇고, 어처구니 없게 승희가 나더러 태민 씨의 아내를 죽였냐고 묻더군요. 살인사건이 난 다음 날예요.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를 질투한 것이 아니였냐고 하면서 말이죠. 그녀는 종종 자기가 만나는 남자들과 나를 오해했어요. 자기 모르게 은밀한 만남을 갖고 있지 않냐는 듯이요. 정신병 환자 같아요. 어딘지 모르게.”

난 정신병 환자 같다는 은영의 조소 어린 말을 머릿속에 새기고 물었다.

“승희 씨가 강태민 씨를 사랑한 것이 맞습니까?”

“그건 몰라요. 종잡을 수가 없는 애라서. 그리고 내게 그런 얘길 할 필요도 없을 걸요. 다만 진심은 아니었을 것 같긴 해요. 뭐가 부족해서 유부남을 사랑하겠어요.”

 

 

“승희 씨가 은영 씨에게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를 질투한 것이 아니냐고 누명을 씌우려 했다면서요?”

“쓸데없이 그런 이상한 짓으로 날 괴롭히곤 했어요.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내게 자주 했단 소리예요. 아주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말이죠. 그건 날 대놓고 업신여기려는 수작에 불과해요. 5천이나 되는 돈을 가정부 임금으로 까나가려고 하니 열불이 나는 거죠. 다 왔네요. 그만 내려야겠어요. 승희가 오늘은 집에만 틀어박혀 있어, 시각에 맞춰 저녁을 차려줘야 하거든요.”

 

 

난 종종걸음으로 마트로 들어가는 은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은영은 승희를 증오하고 있었다. 그것이 고용관계에 의한 필연적인 것이라고 해도 자신의 알리바이를 증명해야 할 정도로 피해망상을 느끼는 것은 그녀가 승희에게 모종의 보복을 가했거나 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갖게 했다. 사람은 자기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난 승희의 비열한 핍박보다 은영의 피해망상이 가진 - 그녀는 대문 안쪽에 있는 그녀를 내가 쳐다보았다는 이유 하나로 알리바이가 있다며 주소까지 적어 주었다 - 의혹에 마음에 쏠렸다. 순간 은영이 강태민을 그냥 태민 씨라고 호칭했다는 것이 섬광처럼 뇌리를 스쳤다.  







 

 

 

 

난 그 길로 경찰서로 돌아와 태민을 심문했다. 수척해진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내를 죽인 기억이 없다고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필름이 끊긴 기억도 누가 상기시켜 주거나 하면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데, 그날 밤에 아내와 통화한 기억마저 전혀 없다며, 자신이 함정에 빠진 것 같다고 호소했다.

“누가 강태민 씨를 함정에 빠뜨렸다고 생각하시는데요?”

나의 질문에 그의 눈빛이 반짝했다.

“날 태운 운전기사가 아니었을까요? 그가 살인청부업자였을지 모르죠.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사람말입니다. 아니, 그 자가 틀림없을 거예요. 날 공원 벤치에 앉혀 놓을 사람은 그 자뿐이 없지 않겠어요. 내 핸드폰으로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공원으로 나오라고 했겠죠. 내가 너무 취해 있으니 데려가라 했던가 뭐 그런 비슷한 소리로 아내를 불러내어 죽인 거죠.”

 

 

“택시기사의 인상착의는 기억납니까?”

“승희가 날 부축해서 큰 도로까지 나온 것 같아요.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혼할 거라고 장담하자 승희는 좋아했죠. 승희가 좋아해서 나도 기분이 좋았죠. 우린 콧노래를 흥얼대며 큰 도로까지 나왔어요. 합칠 수 있다는 공감은 우리를 흥분시켰죠. 그녀와 난 천생연분입니다. 그녀는 첫 눈에 내가 자기의 이상형이라고 말했어요. 내가 결혼한 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고 했죠. 난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만날 때마다 그런 소리를 하기에 진심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이혼하기로 결심한 겁니다. 어쨌든 기분 좋아서 과음을 하게 된 거예요. 승희도 어느 정도 취해 있었고요. 택시에 태운 그녀가 내 입에 키스를 해 줬어요. 난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고, 운명적인 사랑에 헌신할 줄 아는 그녀의 용기에 고무되었죠. 난 그녀의 입술을 음미하며 눈을 감았어요. 밀폐된 공간으로 들어가자 술이 확 올라온 탓도 있었겠지만, 난 내 입술에 남은 그녀의 입술 감촉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감고 되새겼죠."

 

 

태민은 자기 인생에서 승희를 만난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그녀의 달콤함에 분별력을 잃었을 것이다. 알 수 없는 질투심이 내 가슴을 스치는 것 같았다.

“택시기사의 얼굴을 보았냐고 물었습니다?”

“얼굴은 보지 못했어요. 승희가 늘 택시 타는 곳까지 배웅해 줬었고, 술에 취한 날 대신에 운전기사에게 행선지를 말했을 거라고 믿었죠. 난 편안히 눈을 감고 잠을 청했을 뿐이에요. 내 인생에 온 축복을 자장가삼아서 말이죠.”

 

 

자기 아내를 죽여 놓고도, 불륜의 단맛에 취한 태민의 면상에 주먹을 갈기고 싶었다.

승희가 그를 택시에 태워 준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승희와 합치기 위해 태민은 한시라도 빨리 아내와 이혼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집으로 가지 않고 공원에 내려 조용히 얘기 좀 하자며 김순미를 불러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침에 양복 건으로 싸웠던 아내가 이혼에 동의해 줄 거란 기대는 애초에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김순미를 죽일 계획을 가지고 그녀를 공원으로 불러낸 것이다.

“박은영이라고 아시죠?”

난 그를 취조실로 데려온 목적을 상기하고 물었다.

그런데 태민의 반응이 놀라웠다.

 

 

“난 은영이가 택시기사로 가장한 자에게 날 파멸시켜 달라고 사주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옛?”

“그녀는 내게 승희와 놀아나지 말라고 경고했어요. 승희와 은영은 고교 동창생이에요. 여자들 사이의 친한 친구라는 것은 라이벌을 의미하기도 하죠. 은영은 승희를 아주 나쁘게 평판하더군요. 자기 남자친구가 승희에게 빌려 준 돈을 가지고 종적을 감춰버렸는데, 승희가 자기 남자친구를 질투했었다면서 둘 사이에 자기가 알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고, 그것은 자기를 완전히 제압해 버리기 위한 수단으로 쓰여진 것 같다고 말입니다. 그 일로 그녀는 승희의 가정부가 되었답니다. 라이벌에서 종으로 전락한 거죠. 피해의식이 말도 못한 여자입니다. 정신병 환자 같아요.”

 

 

난 은영의 피해망상을 예측하고 있던 터라 태민의 말에 설득당했다. 자기의 불행을 친구라는 이름으로 선뜻 거금을 빌려 준 승희에게 돌리고 있는 은영의 심리를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라이벌 관계라는 것은 근거가 없어도 보이지 않는데서 친구의 조정이 있어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 자신에게서 멀어진다고 믿는다.

“박은영 씨와 어떤 관계였죠? 그녀가 강태민 씨를 태민 씨라고 부르더군요.”

그가 떫은 감을 씹은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술이 뭔지 승희 집에서 승희를 기다리던 어느 날, 말동무를 해 주는 은영이와 술잔을 기울리다가 몸을 섞는 일이 생겨버렸어요. 치마를 입고 있던 그녀가 다리를 벌렸다 오무렸다 하며 허연 속살로 유혹하는 데 넘어가 버린 겁니다. 하지만 우린 없었던 일로 하기로 합의했죠. 알콜을 탓하며 서로가 실수한 거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어요. 승희와 헤어지라고 압박해 오더군요. 승희 곁에 있으면 불행한 일이 닥칠 거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난 승희와 결혼하게 되면 그녀의 빚을 탕감해 주겠다며 설득해야 했어요. 나더러 미친 놈이라고 하더군요. 승희가 왜 나하고 결혼할 거라고 믿느냐며, 이용해 먹고 있을 뿐이라면서 말이죠. 그러면서 내가 처 자식에게로 돌아가지 않으면 참혹한 일이 생길 것이라고 경고하더군요. 당치도 않은 가설일지 모르지만, 은영이 승희와 나의 결혼이 현실의 일로 다가오자 그것을 시샘해 내 아내를 죽였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죄를 내게 씌운 거죠. 날 죽이는 것보다 내가 살아서 고통받는 것을 보며 즐기려고 말입니다. 또한 승희가 비탄에 빠져 낙담하고 슬퍼하는 것을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싶었을 겁니다.”

 

 

태민의 공상은 끝이 없을 것 같았다. 사람 죽이는 일이 그렇게 쉬운 결정이란 말인가. 하지만 은영에게 의혹이 제기된 이상 조사를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태민이 법정에서 무죄를 주장하면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날 소지가 있는 사건이었다. 그의 살인 혐의를 입증해 줄 로프나 양복저고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고, 그를 태운 택시기사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다음 날 오후 늦게, 나는 최 형사에게 은영의 주소지를 넘겨 주고, 승희를 만나러 사무실을 나갔다. 오전에는 이전의 수사 중인 사건으로 바쁘게 보낸 탓이었다.

승희를 만나려는 것은 그녀에게서 택시기사의 인상착의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택시기사가 나타나 태민을 몇 시경에 공원에 내려 주었는지를 진술해 주면 태민이 김순미를 살해했을 것이라는 퍼즐은 보다 신빙성을 가지고 맞춰질 것이다.

은영은 사뭇 냉랭한 태도로 날 맞았다. 승희는 헬스클럽에 가고 없다고 말하는 그녀의 쌀쌀맞은 목소리에서 태민이 언급한 정신병 환자의 증상이 엿보이는 듯 했다. 은영은 무엇인가에 집착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승희의 불행이 아닐까 싶었다. 그녀는 날 승희의 팬의 한 사람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듯 보였다. 시기의 눈빛이 차갑게 번들거렸다.

 

 

난 은영이 왜 태민을 유혹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태민의 가설은 지나치게 작위적인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은영은 승희가 유부남을 진심으로 사랑할 이유가 없다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지 않은가. 은영은 단지 배가 아팠을 뿐인 것이다.

난 그녀의 치부를 감싸 주고 싶어 태민과의 관계를 묻지 않았다. 그녀에 관한 신상자료는 최 형사가 조사해 올 것이다. 문제가 발견되면 그때 확인해도 늦지 않는다고 난 판단했다.

“승희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아세요?”

헬스 클럽 명함을 내게 건네주며 은영이 조소를 머금고 물었다.

“왜요?”

 

 

“모범 택시에 치어 사망했어요. 그 차가 서울 외곽에 버려져 있었는데 도난당한 택시였다더군요. 불과 5년 전의 일이에요. 승희 아버진 소위 자린고비셨는데, 승희는 그런 아버지를 입에 담는 것조차 꺼려했어요. 이렇게 좋은 집에 살면서도 승희는 버스를 타고 등하교했고, 값싼 떡볶이조차 내가 사줘야 먹을 수 있을만큼 항상 주머니가 비어 있었죠. 난 승희가 양녀이거나 친적 누군가의 아이를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 승희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이 돌보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승희에게 묻진 않았죠. 상처받을까 봐. 승희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화려하게 변했어요. 아버지의 유산을 통째로 상속받았더군요. 아버지가 친아버지였구나 하고 난 쓴웃음을 지었죠. 어차피 돌아가시면 승희에게 다 물려 줄 재산을 왜 그렇게 움켜 쥐고 있었는지 의아했거든요.”

 

 

“내게 왜 그런 얘기를 하는 거죠?”

난 은영의 어떤 의도가 느껴지자 되러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자 그 동안 억압된 욕구가 분출돼 화려한 삶을 영위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가 사채업자였다니 돈 씀씀이가 어떤 사람이었을지 금방 유추되었다.

“조심하시라고요.”

“예?”

 

 

“승희를 조심하시란 말이에요. 승희에게 찍히면 어떤 남자든 넘어오죠. 형사님이라고 예외는 아닐 것 같거든요. 걔는 완전범죄를 저지를 수 있을 만큼 영악스런 여자거든요.”

난 좀 놀랐다. 은영은 김순미를 살해한 사람이 승희일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던 것이다.

“이승희 씨가 강태민의 아내 김순미 씨를 살해한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난 그렇게 말하진 않은 것 같은데요. 그냥 승희가 어떤 여자애라는 것에 대해 말해 준 거예요. 형사님이니까, 무슨 소리인 줄 알 거라고 생각하고요.”

 

 

은영은 추궁하자 한 발 빼는 태도를 취했다. 자기 말에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것은 승희를 모함하기 위해 꺼낸 말이었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니면 그런 소리를 했다는 것이 승희에게 전해질 것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심증은 가는데 입증할 증거는 없고, 그런 제보를 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무고한 사람 모략했다는 이유로 승희에게 어떤 보복을 당할지 두려워서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아닐까.

 

 

난 헬스 클럽으로 차를 몰면서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다. 문득 승희 아버지가 모범 택시에 치어 사망했다는 것에 신경이 쓰였다. 은영이 태민에게 한 경고성 말들은 방금 은영이 나에게 한 조심하라는 소리와 같은 맥락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스쳤던 것이다. 난 승희 아버지 교통사고 건과 5천만원을 갖고 종적을 감춰버렸다는 은영의 애인에 대해 시급히 알아봐 줄 것을 부탁하고 전화를 끊었다.




승희는 몸에 꽉 끼는 반팔 반바지 트레이닝복을 입고 런닝머신에서 천천히 뛰고 있었다. 땀에 젖은 뒷머리와 등에 달라붙은 웃옷, 실룩거리는 엉덩이 아래로 쭉 뻗은 다리, 난 너무나 섹시하고 완벽한 그녀의 뒷모습에 매료되었다. 난 그녀를 만나러 온 목적도 잃고 그녀의 육감적인 뒷모습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실내의 모든 남자들이 그녀를 힐끗 거리는 것 같았는데, 그 시선들이 뜨겁고 끈적거리는 듯 했다. 승희는 그 시선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온싸인들이 명멸하기 시작한 도심의 야경을 응시하며 사뿐사뿐 발을 내딛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다가선 나를 발견하고 우아한 미소를 머금었다. 자기 뒤쪽에서 내가 탐욕스런 눈으로 자기를 감상하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는 듯이.

“보충 질문이 있어 왔어요, 이승희 씨!”

난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그녀의 눈을 피하고 말했다. 땀에 젖은 상체에는 도발적인 두 봉우리가 솟아 있었고, 매끄럽고 탄탄한 배의 일부와 배꼽이 웃옷 아래로 드러나 있었다.

 

 

“잠깐 기다려 줄래요. 금방 샤워하고 나올게요.”

그녀의 얼굴에 약간의 실망기가 스쳤다. 그녀는 하나로 묶은 머리를 풀으며 협조하겠다는 듯이 살짝 미소 지었다. 풀어 헤쳐진 머리가 그녀의 어깨를 덮으며 내 눈과 머릿속을 어지렵혔다. 난 그녀가 샤워하는 상상을 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담배를 한 대 피우며 내 몸의 열기를 식히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승희 아버지 건과 은영의 애인 건을 알아봐 달라고 내가 전화했던 민 형사였다.

 

 

“신문 기사는 별로 소득이 없었어. 그래서 관할 경찰서에 조회를 의뢰했는데, 그 사건 담당 형사가 전화를 해 왔더군. 이승희 씨 부친되는 이강철 씨가 뺑소니 차에 사망한 장소가 아무래도 석연치 않아서 한 때 이승희 씨를 용의선상에 두고 수사를 했었대. 이강철 씨가 자기 차를 갓길에 세워 두고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사고가 난 것인데, 그 시각에 - 새벽 1시경이었대 - 자기 사무실과 집과는 정반대 방향인 그 장소에 와서 사고난 것이 이상했던 거지. 당시에 이승희 씬 친구 보증을 잘못 서서 일천 만원의 빚독촉에 시달리고 있었거든. 거기다가 자기 아버지 앞으로 일억 대의 생명 보험을 들어 두고 있었고.

 

 하지만 그녀에게 알리바이가 있었어. 그녀 집에 설치된 방범용 폐쇄회로 티브이에 7시경에 귀가한 것이 촬영되어 있었고, 집을 나간 장면은 찍혀 있지 않았거든. 그래서 이강철 씨와 채무 관련이 있는 자가 택시를 훔쳐 살해한 것으로 결론 내렸지. 범인은 잡히지 않았고.”

 

 

난 이강철 사망 사고에 택시와 폐쇄회로 티브이가 등장하자 단박에 김순미 살해 사건이 떠올랐다. 승희가 용의자의 혐의를 벗을 수 있었던 것은 녹화 테잎에 귀가 장면이 촬영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태민이 자기 아내 살인범으로 수사 대상에 오른 것은 폐쇄회로 카메라에 찍힌 녹화 테잎이 단초였다. 기여도가 다르긴 하지만 택시도 등장했다.

 

 두 사건의 유사성! 만일 승희가 방법용 카메라에 찍히지 않고 집을 나갔다고 가정한다면? 또 승희가 태민의 아파트에 폐쇄회로 카메라가 작동되는 것을 알고 있었다며? 승희는 태민이 술에 취하면 필름이 끊긴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날 태민이 순미와 다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 왜 태민의 아내를 죽여야 했을까? 어떤 이유에서건 승희는 태민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태민은 말로만 이혼하겠다고 떠벌리기만 하지, 실상은 이혼할 마음이 전혀 없으며 되러 그것을 악용해 자기를 농락하고 있다고 결론내렸다면?

 

문득 태민이 은영의 심리를 추정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그것을 승희에게 적용해 본다면, 태민이 자기 아내의 살인범이 되어 감옥에서 썩는 것을 농락당한 보상의 차원으로 위안받고, 어리석었던 자신이었지만 실상은 어리석은 것이 아니고 그 대가를 치루게 할 수 있는 강인한 사람임을 되새길 수 있는 기념작으로 남겨 두기 위해서가 된다.

 

 

“그리고 박은영 씨의 애인 건은 이상한 데서 풀렸어. 이승희 씨가 보증 선 친구가 남자더군. 그 남자의 주소지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더니, 1년 째 행방불명 상태라는 거야. 그런데 그 남자 이름이 이승희 씨가 보증 선 남자 이름과 동일 인물이었어. 나이는 두 여자보다 3살이나 많더군. 레스토랑을 운영하다가 말아먹었는데, 빚이 많았다고 해. 알아듣기 쉽게 말하자면, 이승희 씨가 대학 4학년 때 이 남자를 알았고, 박은영 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이 남자를 알았어. 동시에 이 남자를 만나고 있었거나 이승희 씨와 헤어진 남자를 박은영 씨가 사귀게 되었거나야.”

 

 

난 전화를 끊고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켰다. 은영이 괜히 승희를 의심한 것 같지 않게 생각되기 시작했다. 승희는 자기가 사귄 남자가 은영이와 사귀는 것을 알고 태민에게 추정된 행위처럼 남자는 죽여 버리고 은영은 자기 수하에 두면서 어떤 우월감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승희의 자라온 환경을 조사해 보지 못한 것이 심한 갈증을 동반했다. 하지만 그것은 차후에 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난 승희가 김순미를 살해했을 가능성을 높게 갖기 시작했다.

 

 

승희가 타이트한 리트 원피스를 휘어감고 주차장에 나타났다. 육감적인 그녀의 볼륨에 난 숨이 멎을 지경이었으나, 곧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난 승희가 내 차로 올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빨간 스포츠 카의 문을 열더니 운전석에 올라 탔다. 난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황급히 차에서 내렸다. 난 재킷 안쪽에 찬 권총을 꺼내려고 손을 밀어넣으며 스포츠 카 앞쪽으로 뛰어갔다. 그녀가 나를 치고 달아날 것 같은 위기감으로 내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나 그녀는 어이없어 하는 표정으로 조수석 문을 열고 있었다. 자기 차에 날 태울 생각이었단 말인가.

 

 

“다시 이곳으로 모셔다 드릴게요. 아직 저녁 식사 전이죠? 나도 그렇거든요.”

그녀는 나의 성급한 행동을 추궁하지 않고 말했다. 방금 전의 달려오는 나를 보고 그녀는 자신이 참고인이 아닌 용의자 신분이라는 것을 느꼈을 텐데도, 고혹적인 미소를 머금으며 내가 자기 차에 오르기를 기다렸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공포가 일순 나를 스쳤다. 그녀 주변에서 차와 연관된 사고가 또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내가 형사님 차에 탈까요?”

무언의 시위를 벌이는 내게 그녀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게 좋을 것 같군요.”

난 그나마 안도감이 느껴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형사님이 묻고자 하는 얘기로 식욕이 달아날지 모르니까, 우리 한강둔치에 가서 먼저 얘기 나눠요.”    

승희가 허벅지가 거의 드러나는 다리를 꼬고 앉으며 눈웃음을 쳤다.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향긋한 비누 내음이 내 코를 스치며 몸의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난 승희를 경찰서로 데려가 심문을 하기 전에 심증이 갈만한 단서를 그녀로부터 찾아야 한다고 내 자신에게 우기고 있었다. 자기가 용의자 신분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있는 것만 봐도 혐의가 짙게 간다. 그러나 그 점이 더욱 그녀를 함부로 연행할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그녀의 어떤 증거도 찾지 못할 것이라는 자신감이 어떤 위력으로 날 압도했다.

난 묵묵히 그녀가 시키는 대로 운전하는 내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리고 그녀가 범인이 아니기를 바라는 내 자신이 속물 중의 속물이라고 비꼬았다.

 

 

한강 둔치에 다다를 무렵에 한두 방울 내리치던 빗방울이 둔치 한 켠에 차를 주차시킬 때는 굵어져 차창을 때렸다.

“참 운치 좋네요.”

승희가 태평하게 속삭이며 내 허벅지에 손을 얹어 놓았다. 난 그것을 떼어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버진 날 데리고 운치 있는 장소에 자주 갔어요. 난 같이 온 사람이 내 아버지가 아니고 남자 친구라고 생각했어요. 억지로 억지로 그렇게 생각해야 했어요.”

난 그녀의 손을 떼어놓으려고 내 손을 가져가다가 날 쳐다보는 그녀의 눈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난 아버지의 눈을 다른 남자들의 눈에서 보았어요. 그 눈들은 내 속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이 빛났어요. 하지만 더러 아버지의 눈과 다른 눈을 가진 남자들이 있었죠. 따뜻하고 자상한 눈빛. 난 그 눈 속에서 내 안식처를 발견했어요. 나이는 상관없었죠. 조건도. 난 안식처만 갈망하고 있는 여자거든요.”

난 승희가 자신의 범죄를 자백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난 충격에 휩싸여 그녀의 손을 치우는 것을 잊고 있었다.

 

 

“포기할 수가 없네요. 내가 오인했구나 싶어 포기하면 포기하기는 이르잖아 라는 듯이 아버지의 눈과 다른 눈을 가진, 내게 오인했다는 자각을 하게 한 남자들과 뭔가 또 다른, 그런 눈을 가진 남자가 날 불쌍히 여긴 신께서 보낸 듯이 나타났거든요.”

 

 

그녀가 젖은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난 한없는 연민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그녀는 친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하며 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로 인해 남자들을 불신하며 살아온 그녀에게 아버지를 지우게 할 남자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남자를 은영에게 빼앗겼고, 아내를 버리고 자기를 거두어 줄 줄 알았던 태민이마저 섹스 상대 이상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판단하게 된 것이다.

 

 

“지금 자백하는 겁니까?”

나의 질문에 승희의 눈에서 눈물이 넘쳐 볼을 타고 흘렀다.

“누가 아버질 죽였는지 난 알고 싶지 않아요. 난 솔직히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 고마웠죠. 그는 짐승이었으니까. 태민 씨의 아내도 난 몰라요. 은영이가 태민 씨와 잤다는 것을 알고 죽여 버리고 싶더군요. 준수 씨를 내게서 가로챈 간 년이 태민 씨마저 손댔다는 것이 날 미치게 만들더군요. 하지만 태민 씨가 은영에게 관심 없는 것을 알고 눈 감아 주었어요. 그 놈의 라이벌 의식에 진저리가 났거든요. 은영에게 돈을 꺼 주고 나서 은영의 남자가 준수 씨라는 것을 알았죠. 준수 씬 은영의 돈을 갚고 튀었나 봐요. 다른 여자가 생겼거나 은영의 사이코 같은 집착에 환멸을 느껴 예정된 이별이었을지도 모르죠. 난 은영을 용서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내 가정부 노릇을 하면서 돈을 갚아 가라고 한 거죠.”

승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형사님이 날 의심하는 것을 보고 가슴이 너무 아팠어요. 하지만 내 집 거실에서 이층에서 내려오는 날 보던 형사님의 어쩔 줄 몰라하던 모습이 아파하지 말라고 내게 말하더군요. 널 믿어 줄 남자니까 믿음을 버리지 말라고. 괜찮다면 날 좀 안아 줄래요? 갑자기 한기가 느껴져요. 말을 너무 많이 했나 봐요.”

난 냉정하게 굴어야 한다고 내 자신에게 경고했다.

“강태민 씨를 택시에 태우면서 운전사를 보셨죠? ”

승희가 한숨을 내쉬며 진짜로 추위를 느끼는 듯이 자신의 팔로 몸을 감싸 안았다.

 

 

“젊은 남자였어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어요. 좀 특이한 것은 목에 동전만한 붉은 점이 있었어요. 그 운전사가 살인사건과 무슨 연관이 있나요?”

그 때였다. 내 핸드폰이 울렸다. 난 최 형사의 번호가 뜨는 것을 보고 차 밖으로 나왔다. 굵은 빗줄기에 내 옷은 금세 젖었다.

 

 

“박은영의 남동생이 자살했어. 사망 추정 시간은 오늘 새벽 5시에서 6시경으로 추정되고 사인은 청산가리야. 매일 배달되는 우유에 청산가리를 타서 마셨어. 누가 침입한 흔적은 없었고, 경비원이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는 낯선 사람을 보지 못했대. 아파트단지에서 일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택시도 발견되었어. 택시 주변 쓰레기통에서 강태민의 저고리와 김순미를 살해한 로프로 추정되는 것을 찾아냈고. 고로, 김순미를 살해한 것은 박은영의 남동생  박은수인 것 같아. 박은영이 사주했거나 동조했을 거야. 우린 박은영을 체포하러 출동하네…….”

 

"혹시 그 남자 목에 이상한 반점 같은 거 없었나?"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아나. 동전만한 반점이 있었어. "

 

 

난 안도감으로 가슴에 뜨거운 기운이 솟구쳤다. 박은수의 자살은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은영이 태민의 아내를 죽이려 한 것은 쉽게 납득이 안 갔으나, 자신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 태민에 대한 복수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보다 정확한 내막은 곧 밝혀질 것이다.

 

 

내가 젖은 채 들어가자 승희는 마치 오래 사귄 남자 친구나 되는 듯이 손수건을 준비하고 있다가 내 얼굴을 닦아 주었다. 나는 너무 가까이 다가온 그녀를 밀치지 않았다. 그녀의 스커트는 말려올라갔고, 놀랍게도 팬티를 입지 않았다. 난 바지가 금세 불편해졌다.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을 포갰다. 나는 참을 수가 없어 그녀를 끌어안았다. 내 손이 그녀의 원피스 속으로 스며들어 갔고, 그녀의 터질듯한 가슴이 내 손아귀에 들어왔다. 난 그녀의 아버지와 다른 눈을 가진 남자로 그녀를 사랑해 줄 수 있다고, 그녀의 기대를 절대로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승희는 이 남자의 욕정이 깃든 눈빛을 기억했다. 거실 소파에서 그녀의 다리를 훔쳐보던 남자를 느끼고, 아버지의 더러운 혓바닥과 징그럽던 손이 몸을 더듬던 기억에 몸서리가 났었다. 승희는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남자를 보면 살기로 온 몸이 부들거렸다.

 

 

승희는 형사가 다리에 머리를 처박고 허벅지를 핥는 것을 내버려두었다. 이 남자에게도 아끼는 누군가가 있을까. 남자들은 한 여자로 족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태민은 그녀가 미리 훔쳐다 놓은 택시에 태울 때도 운전석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가 마신 술에 적정량의 수면제를 탔고, 그는 택시에 몸을 실을 때 반쯤 눈이 감겨 있었다. 그의 아내는 그녀가 그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자 어떤 상대라는 것을 즉각 알아차렸다. 공원으로 불러낸 일은 그래서 수월했었다.

 

 

승희는 아버지의 혓바닥이 허벅지 안쪽으로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놈을 향해 힘껏 페달을 받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는 내 머리를 쥐어뜯는 승희를 느끼고 그녀가 흥분을 참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난 다시 한 번 그녀의 끔찍한 과거를 잊게 할 남자로 그녀를 사랑해 줄 거라고 다짐했다. 빗줄기가 폭우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Comments

G 2022.09.27 06:23
사건 추리소설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