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

가뭄

G ㅇㅇ 1 30 09.20 07:33

정말 시원하게 비가 쏟아지고 있다. 백년만에 가뭄이라며 농민을 위한 성금모금 ARS에 전화한지 몇 분밖에 되지 않는데 비가 내린다. 창문을 열었더니 메마른 땅이 축축해져서 풍기는 땅냄새가 난다. 잠시 더운 바람이 집안을 돌더니 이내 한기로 바뀌어 그동안 흘렸던 내 땀들을 시켜준다. 이렇게 오랜만에 비가 내리는 날은 한동안 자리에 누워서 창밖을 내다보고 싶다. 우리 집은 10층이라 거실에 누워 베란다에 창밖을 내다보면 땅이 보이지는 않지만 마주보고 있는 앞동 벽면에 비가 젖는 것만 보아도 충분히 기분을 낼 수 있다. 텔레비전은 음악채널을 틀어놓고 베개를 가져와 거실 중간에 던져 놓는다.
빗소리, 감미로운 음악, 땅냄새……. 한기는 내 몸을 파고든다…. 눈이 스르르 감긴다.

두시간 정도 잤을까?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다. 눈을 뜬다. 가위에 눌린 것처럼 몸을 자유로이 하지 못한다. 하는 수 없이 고개만 돌려 베란다 밖을 내다본다. 세차게 내리는 비를 뒤로 앞동이 보인다. 비가 아까보다 더 많이 내려 잘 보이지 않지만 벽면이 심하게 부패되어 있는 것이 눈 안에 들어온다. 지은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아파트가 저리도 부패가 되어있을 수 있을까. 금방 까지 움직이기 힘들었던 몸이 그것을 보자 알지 못하는 힘이 생겨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베란다로 나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본다. 여전히 부패되어 있는 모습이 빗길 사이로 뚜렷이 보인다. 부패되어 부서진 시멘트 조각들은 벽면을 몇 번타더니 땅으로 푹하고 소리를 내고 떨어진다. 눈이 그곳을 따라가다 보니 새로운 광경을 본다. 시멘트 조각도 충분히 나를 깜짝 놀라게 할 수 있지만 온통 빨간색으로 물들어 피바닥을 연상케 하는 땅은 시멘트 조각을 산산조각 나게 만든다. 놀람도 잠시. 곳곳에 끔찍하게 놀란 표정으로 죽은 시체들을 보고 피바닥은 이제 실제라는 것을 안다. 눈이 그리 좋지 못한데다가 물안개가 끼기 시작해서 시체를 자세히 보지 못한다. 갑자기 바람이 불어 비가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거실까지 들어왔는데 비의 세기가 어찌나 센지 창문이 모조리 깨어져 버리고 틀이 찌그러져 버린다. 세차게 들어 온 비는 내 팔뚝을 때린다. 그러자 살갗이 벗겨지고 피가 주르르 흐른다. 그제야 부패와 피바닥의 원인을 안다. 급히 방으로 피신해 작은 창문을 통해 비내리는 것만 보고 있다. 앞동은 시멘트가 많이 부서져 철근이 보이기 시작한다. 귀가 멍멍해진다. 처음에는 포근하게만 느껴졌던 빗소리가 굉장한 소음을 내며 내리고 있다.

언젠가는 그치겠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비는 그렇게 20시간이 넘게 내렸고 우리 집의 천장이 거의 뚫리려고 하자 나는 급히 옷을 챙겨 입고 1층으로 내려왔다. 마음이 급하여 1층에 있는 집들의 초인종을 내리 눌러보지만 응답이 없다. 나는 초조하게 비가 그치길 바라는 수밖에 없어 구부려 앉아 눈을 감는다. 4시간이 더 내리고서야 비는 그친다. 조심스레 밖으로 나가보니 비가 휩쓸고 간 참혹한 현장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다. 마치 핵폭탄이 근처에 터진 것처럼 주위에 살아있는 것이라고는 없어 보인다. 간간히 보였던 시체가 도로로 나오자 일제시대에 일본이 민간인학살을 한 것처럼 수많은 시체가 머리가 터지고 팔다리가 끊어진 상태로 죽어 있다. 내 시계는 정오를 가리키고 있지만 또 비가 내릴 것처럼 온 세상이 어둡기만 하다.

저편 상가 건물에서 여러사람들이 걸어 나온다. 그들이 나를 부른다. 나는 그곳으로 뛰어간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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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