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과 인성, 그리고 웃음

관과 인성, 그리고 웃음

G ㅇㅇ 2 68 09.18 07:14

옛날부터 나는 잘 웃었다. 그냥 웃기는 일이 많은 것 같았다.

"넌 왜 그렇게 잘 웃니?"

나를 보며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면 나는 또다시 의아해 했다.

"넌 왜 그렇게 잘 안 웃니?"

나는 그렇게 반문하곤 했다.

나는 항상 웃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나의 웃음은 외롭거나 슬퍼도 절대 웃지 않는 캔디 같은 웃음과는 달랐다. 나는 햄릿에 공감한다.

자신의 삼촌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가로챘다는 사실 앞에서 햄릿은 고통 받는다. 그리고 햄릿은 웃는다.

햄릿은 유령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하여 자신의 삼촌과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한 남자가 다른 남자의 귀에 독약을 붓는 연극을 꾸며 보여준다. 그때도 햄릿은 웃는다.

햄릿은 자신의 약혼자가 죽어도 호탕하게 웃는다.

햄릿은 복수를 고민하지만 동시에 존재를 고민한다. 인간은 아름답게 살아가고 싶으나 동시에 비극을 안고 사는 존재이다. 행복하게 살고 싶으나 고통 받는 존재이다. 이 불가사의한 진실 앞에서 햄릿은 그냥 웃어버렸다.

어떤 시인이 말했다.

왜 사느냐 물으면 그냥 웃지요. 이런 웃음도 아니다. 이것은 해탈의 경지, 탈속한 웃음이다.  

햄릿의 웃음은 아직 세계 속에 몸부림치는 존재의 웃음이며 그래서 광적이다.

유머와 위트의 차이를 아는가. 위트가 머리에서 나오는 재치나 기지를 말한다면 유머는 가슴에서 나오는 웃음을 말한다.

우디 앨런의 영화는 위트가 넘치고, 주성치의 영화는 유머가 넘친다.

진정한 웃음은 가슴을 울린다. 그리고 슬프고 그리고 아프고, 얼마간 광적이며 그리고 눈물 짓게 한다.

일찍이 니체가 웃음에 대해 핵심을 꿰뚫으며 말한 바가 있다.

세상에서 가장 고통받는 존재가 웃음을 발명했다.

 

관은 삶의 스트레스이며 일간의 의지를 가로막는 고통이다. 인성은 사랑이며 동경이며 따뜻함이다. 관은 일간을 극하고, 인은 일간을 생한다. 관과 인은 언뜻 떼어놓고 보면 별로 상관이 없어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는 나를 죽이고 하나는 나를 살린다. 언뜻 아무 상관 없는 인자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관은 인을 생한다. 이 극적인 변화. 어떻게 고통의 부메랑이 즐거움으로 돌아올 수 있는가.

수 많은 웃음거리와 예능들이 있지만 모두를 관통하는 웃음의 포인트는 간단하다. 긴장의 축적과 해소.

드라마는 갈등을 만들고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에 주력한다.

우리네 인생도 그러한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어찌보면 삶은 닥쳐오는 고난들을 하나하나 받아 넘기는 과정에 불과하기도 하다. 관생인. 고난을 겪은 자는 지혜를 갖는다. 그리고 지혜는 얼마간의 흐믓한 미소를 짓게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려는 웃음은 드라마가 직조하는 갈등의 증폭과 해소와는 다르다. 삶의 지혜가 갖는 따뜻한 웃음과도 다르다. 웃음은 축적된 긴장감이 한꺼번에 해소될 때 폭발한다. 그것은 긴장감의 극대치에서 발생한다. 다시 말해 웃음은 관의 극대치에서 인성으로 넘어가는 그 꼭지점의 아리랑 고개에서 발생한다.

그것은 쌓이고 쌓이다가 한계치에서 폭발한다. 개그 프로에서 느껴지는 짧은 순간의 긴장감의 축적과 해소 속에서도 우리는 그러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웃음에 대해 조금만 깊게 생각해보면 우리는 웃음이란 것이 일종의 고통 즐기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긴장감이 없으면 해소를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니체의 말을 떠올려본다. 세상에서 가장 고통받는 존재가 웃음을 발명했다. 세상에서 가장 고통받는 존재가 그 고통에 짓눌리다 못해 그 끝에서 웃게 된다. 그러니 어떠한 사소한 웃음 속에도 광기는 쉽게 발견된다. 쉽게 받아넘길 수 없는 고통일수록 그 웃음은 광적일 것이며 그래서 미쳐버리게 될 것이다.

미친 자가 늘 헤실헤실 웃는 이유. 나는 관과 인성의 관계에서 그 단서를 발견한다.

Comments

희노애락...
그냥 정도의 차이.
오늘도 곡차 한잔..
최후에 웃는자가 승리자라지요.
기쁨 행복 만족스런 웃음지어보아요~^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