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 살육의 섬2

(공포) 살육의 섬2

G ㅇㅇ 1 2,143 2022.09.11 01:15

삐그덕 삐끄덕. 살인마가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계단을 사이에 두고 길다란 복도 양편에 객실이 들어차 있었다. 난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살인마의 후레쉬 불빛이 복도 위로 점점 올라왔다. 어느 방으로 숨을 것인가. 난 이미 계단 입구를 지나 재

 

혼 부부가 투숙한 오른쪽으로 넘어 온 상태였다. 우선 아무데나 몸부터 숨겨야 했다. 빌어먹을, 돌리는 문고리마다 잠겨 있었

 

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고 이빨이 덜덜 부딪쳤다. 이러다간 복도에서 살인마와 정면으로 마주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

 

습한 순간, 객실 하나의 문이 열렸다. 살인마가 계단 입구에 우뚝 섰다. 놈의 후레쉬 불빛이 반대편 복도를 휘익 비추고 이쪽으

 

로 방향을 트는 찰나에 난 온 신경을 집중시키며 소리나지 않게 문을 닫았다. 이마에서 비 오듯 땀이 흘러내렸다.

 

 

난 안심할 처지가 아니었다. 놈에게 발각되는 것은 시간 문제일 것이다. 달빛이 구름에 가렸는지 방안은 한치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난 방의 구조를 머릿속으로 더듬었다. 욕실이 딸린 방엔 붙박이 옷장과 화장대, 텔레비젼이 놓인 탁자와

 

더블침대가 전부였다. 난 욕실에 숨어 있다가 놈이 방을 수색하는 틈을 타 도주할 것인가로 고민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한다면

 

놈도 방에 들어와서 욕실부터 살필 가능성이 높다. 내가 잠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와중에 희미한 달빛이 열린 창문으로 스며들

 

었다. 명희가 저 창을 통해 잔디밭으로 버려졌다는 생각에 울음이 치밀었다.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는 욕구가 내 안에서 소용돌

 

이쳤다. 지켜 주지 못한 명희의 시신이라도 내 손으로 거두어야 했다. 희미한 달빛 자락에 드러난 침대에 무언가 있었다.

 

 

‘설마 내가 재혼 부부 방에……’

 

 

난 어이없게도 살육이 저질러진 방에 들어온 것 같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입안이 바짝 말랐다. 다음 순간 달빛이 방안을

 

깊숙이 비추었다. 설마했던 난, 입을 틀어막았다. 웃통을 벗은 남자 몸이 심한 가뭄에 쩍쩍 갈라진 논바닥처럼 참혹하게 난자당

 

해 있었다. 난 목 위로 시선을 옮기기가 겁이 났다. 비릿한 신물이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것이 금방이라도 토악질이 날 것 같다.

 

순간, 꼼짝 않고 있어 죽은 줄 알았던 남자의 몸이 경련을 하듯 흐물거렸다. 난 소스라치게 놀라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죽지 않

 

았어. 난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끼며 벽의 그늘에 가려 잘 보이지 않은 남자의 얼굴 쪽으로 한걸음에 다가섰다. 바닥이 온통 피

 

바다인 듯 미지근한 물기가 발을 적셨다.

 

 

“이보세요?”

 

 

난 남자 얼굴 가까이로 고개를 숙이며 낮게 속삭였다. 누군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나의 인기척에 남자는 감겨 있던 눈을 부

 

릅떴다. 난 갑작스레 열리는 동공에 흠짓 놀랐다. 하지만 그건 약과에 불과했다. 남자의 이마에 깊숙이 박힌 도끼를 발견하고

 

난 기겁을 하며 뒷걸음질쳤다. 뒷걸음을 치는 발에 무언가가 밟혔다. 나는 속절없이 미끄러졌지만, 잽싸게 팔을 짚어 간신히 엉

 

덩방아를 모면했다. 식은땀이 전신에 솟았다. 복도에서 살인마가 잠긴 문을 하나씩 때려 부수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공포가

 

목을 조여왔다. 나는 발에 걸린 무엇이 흉기로 쓰일 수 있을지 몰라 손을 내저어 피가 질퍽한 바닥을 더듬었다. 무언가 잡혔다.

 

갈퀴 손으로 그것을 집어드는데 뭔가 석연치 않았다. 아직 온기가 느껴지는 그것이 팔굼치에서 토막난 팔이라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난 진저리를 치며 떨어뜨렸다. 억지로 삼키고 있던 신물이 울컥 넘어왔다. 나는 배설하듯 먹은 것을 모두 토해내

 

기 시작했다.

 

 

시큰한 입안을 침을 고여 삼키며 난 일어섰다. 문짝을 발로 차는 소리가 이제 가까이서 들려왔다. 몸을 숨길 데는 침대 아래 뿐

 

이다. 후레쉬로 방안을 훑고 욕실를 점검하러 간 사이에 도망쳐야 할 것이다. 침대 밑을 살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영화속에나

 

가능할지 모른다. 난 정신을 가다듬고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반드시 구해 주러 올 테니 생명의 끈을 놓치 말라고 위로할 참이었

 

다.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을 견디고 있는지 남자의 눈은 질끈 감겨져 있었다. 그러나 내 기척이 느껴지자 아까처럼 눈을 부릅

 

떴다. 하지만 난 이번엔 놀라지 않았다. 내가 뭐라고 입을 열기 전에 남자의 입에서 웅얼대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난 복도를 살

 

피며 남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죽은 척 하고 계세요. 돌아올게요, 꼭.”

 

 

나는 남자의 귀에 입을 대고 소곤거렸다. 남자는 알았다는 듯이 눈을 힘겹게 깜박거렸다.

 

 

쾅 쾅! 얼마나 힘껏 걷어차는지 문짝이 떨어져 나가 뒹그는 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바로 옆옆방이거나 건너편의 앞방 문짝이

 

떨어져 나간 것이 분명했다. 이제 한순간도 머뭇거릴 수 없었다. 내가 침대 아래로 기어들어가려고 몸을 구부리는데, 남자의 눈

 

동자가 긴박하게 한쪽으로 쏠렸다. 나는 남자가 사력을 다해 내게 무언가를 알려주려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남자의 눈이 가르

 

키는 곳은 머리 쪽 바닥이었다. 문 앞에서 발자국 소리가 멈추었다.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난 남자가 필사적으로 내

 

게 알려 주려한 것을 움켜 쥐고 침대 밑으로 몸뚱아리를 집어넣었다.

 

 

문을 벌컥 열고 피비린내를 풍기며 살인마가 들어왔다. 비옷 모자를 눌러 쓴 놈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한 손엔 후

 

레쉬를 비치고 다른 손엔 보기만 해도 섬뜩한 횟칼을 치켜든 채 찬찬히 방안을 거닐었다. 발목까지 올라온, 피와 살점이 낭자한

 

놈의 검은 장화가 내 눈 앞으로 다가왔다 멀어졌다 했다.

 

 

난 숨 소리가 새어나갈 것이 두려워 입을 틀어막았다. 후레쉬 불빛이 방 안 구석을 비추자 온갖 살인도구들이 집결해 있는 것이

 

보였다. 난 잠시 어리둥절했다. 톱과 여러 자루의 크기가 다른 횟칼과 도끼와 낫은 이해가 갔지만 삽과 삼지창과 괭이 따위는

 

날 당혹스럽게 했던 것이다. 사람을 죽이는데 쓰일만한 것을 닥치는대로 가져다 놓은 것 같다. 왜 저렇게 많은 도구가 필요하다

 

고 생각했을까. 의문에 휩싸여 있는 내 눈에 놈이 삼지창을 집어 드는 것이 보였다. 놈이 다리를 굽혔다. 낌새를 알아차린 것일

 

까. 나는 몸을 웅크리며 공포에 가득 찬 눈으로 놈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턱이 덜덜 떨려 주먹을 입에 물었다. 이상했다. 놈은

 

후레쉬를 바닥에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혹시? 어떤 예감이 내 머리를 스치는 순간 침대의 스프링이 요동쳤다. 이어서 남자

 

의 비명 소리가 허공을 찢었다. 죽은 듯이 있으라고 일렀건만! 난 내 지인이 살해당한 듯 끔찍한 고통이 밀려와 눈시울이 붉어

 

졌다. 비 오듯 후레쉬 불빛 사이로 피가 튕겼다.

 

 

살인마가 다시 다리를 구부렸다. 후레쉬를 집은 손이 문득 움직임이 없었다. 그 바람에 후레쉬 불빛이 온전히 나를 비추었고,

 

난 들통나겠구나 하는 절박감에 숨도 못 쉬었다. 후레쉬 불빛이 날 스치며 지나가더니 방바닥을 면밀히 훑고 있었다. 피냄새에

 

섞인 음식 냄새를 맡은 것일까. 빌어먹을! 후레쉬 불빛이 창가 밑으로 이동한 순간에 난 침대 밑에서 몸을 빼냈다. 몸을 빼내며

 

문 쪽으로 한 번 굴렀다. 후레쉬 불빛은 즉시 나를 비추었다. 난 턱밑까지 차오르는 공포에 전율하며 날렵하게 몸을 일으켰다.

 

문 밖으로 튀어나가는 내 등에 무언가 와서 박혔다. 타는 듯한 아픔이 등에서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굵은 눈물처럼 피가 등줄기

 

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나 난 달릴 수 있었다. 뚱뚱한 덩치의 놈이 쿵쿵거리며 뒤쫓아오는데, 넘어지거나 쓰려졌다가는 그 자

 

리에서 난도질당할 것이다. 극심한 고통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눈앞이 어질어질하는 현기증이었다. 계단을 내려오는데 거실

 

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난 마지막 계단을 두어개 남겨 두고 그만 발을 헛딛었다. 난 손에 쥔 것을 놓쳤다.

 

 

내 손을 떠난 가발은 마루 바닥을 쓸며 어둠 깊은 곳으로 사라졌다. 난 고꾸라지면서 머리를 강하게 찧었다. 너무나 강한 충격

 

에 난 의식이 가물거렸다. 내가 잘 못 본 것일까. 가발이 자취를 감춘 쪽의 벽에 여자의 젖가슴 두 개가 희미하게 보였다가 사라

 

졌다. 젖가슴 위쪽은 어둠뿐이었다. 그리고 난 의식을 잃었다. 재혼남이 죽어가면서 내게 알려 주려 했던 가발. 그것은 왠지 부

 

조화스러워 보이던 덥수룩한 머리의 관리인아저씨의 것이었다.







                                                 * * * * *

 

 

 

 

 희미한 달빛에 거실의 윤곽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2층에서 소화가 안 되는 듯 끄윽 끄윽  트럼을 하며 재혼녀가 계단을 내려왔

 

다. 그녀는 관리인 아저씨 방 앞에서 고민을 하더니 이내 돌아서 냉장고로 다가왔다. 그녀가 캔맥주를 꺼내들고 차가운 감촉이

 

좋은 듯 뺨에 빙그르 돌렸다. 가구의 그림자처럼 누워 있던 그림자 하나가 그녀의 등쪽으로 움직였다. 재혼녀는 열이 많은 여자

 

인 듯 웃옷 속에 캔을 집어넣고 이리저리 굴였다. 이윽고 본연의 목적대로 캔의 뚜껑을 땄다. 여자는 뚜껑을 따는 소리가 몹시

 

귀에 거슬린 듯 관리인 방을 흘끗 쳐다보았다. 잠시 가만히 서 있다가 어깨를 으쓱거리곤 계단 쪽으로 발을 내딛었다. 발을 내

 

딛던 여자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 귀를 쫑긋 세웠다. 거실에 누군가 있는 것 같은 농밀한 느낌이 뒷통수에 느껴진다. 막연한 공

 

포심일까. 뒷머리가 쭈뼛서고 심장이 무섭게 고동쳤다. 왠지 돌아보면 안 될 것 같다. 그러나 걸음을 내딛는 순간 뭔가 쭉 뻗어

 

나와 목덜미를 움켜 질 것 같았다. 여자는 자신이 지나치게 예민한 것 같아 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그리고 숨을 깊이 들이쉬

 

었다. 돌아보면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용기가 생기자 여자는 고개를 돌렸다. 여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너무 놀라서 비명을

 

지르는 것도 잊었다. 여자의 손을 떠난  캔이 바닥을 치며 요란한 파열음을 냈다. 허공을 가르며 시꺼먼 자루가 달린 날카로운

 

것이 여자의 목을 내리쳤다.

 

 

“날 괄시해! 본때를 보여 주마!”

 

 

살인마는 장작을 패듯 여자의 목이 이탈할 때까지 내리찍는 짓을 멈추지 않았다.

 

 

계단을 거침없이 올라간 살인마는 재혼부부의 방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문이 빼꼼히 열려 있었다. 남자는 줄무늬 팬티로

 

아랫도리만 가린 채 드르릉 드르릉 코를 골았다. 여자가 잠을 청하지 못하고 아래층으로 내려온 대는 저 놈도 한 몫 한 것 같았

 

다.

 

 

‘홀쭉이와 통통이군. 부조화의 극치가 따로 없어……’

 

 

몇 수저 뜨지도 않고 식탁을 벗어나 소근대며 계단을 올라가던 년놈들이었지.

 

 

‘지저분한 손으로 음식이라고 만든 저 노인네는 어떻고.’

 

 

살인마는 용암처럼 끌어오르는 살의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놈의 목에 칼을 꽂았다. 놈의 가증스런 눈이

 

번쩍 떠졌다. 살인마는 괴기스런 웃음 소리를 흘리며 놈의 이마에 도끼를 내리꽂았다. 씨팔 놈새끼! 살인마는 아직 성이 안 찬

 

듯 흉기가 될 만한 것이 방에 있는지 후레쉬를 비춰댔다. 그는 툴툴거리며 방을 나갔다.

 

 

잠시 후, 방에 나타난 살인마는 한무더기의 횟칼과 온갖 농기구를 쏟아놓고는 마치 인체에 시험이라도 하듯 하나씩 집어 들고

 

미동도 없는 재혼남을 내리찍었다. 정신없이 울분을 토해낸 살인마는 만족스러운 듯 어린아이처럼 히히덕거렸다.

 

 

 무언가를 해냈다는 자부심과 일말의 허탈감이 밀려와 벽에 등을 기댔다. 그러나 이내 기분 나

 

쁜 기억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비웃음 소리. 년놈들의 키득대던 웃음 소리는 귓전에서 메아리쳤다. 아직 분이 안 풀렸어! 살

 

인마는 등을 곧추세우고 벽에서 벗어났다. 토막내 주리다! 조각조각!

 

 

한쪽에 내둥댕이친 살인도구 더미에서 톱을 찾았다. 그때 복도에서 간격이 짧은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살인마는 칼을 집어

 

들고 문가에 몸을 숨겼다. 후레쉬 불빛이 방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놈의 심장을 향해 칼을 쑤셔박았다.

 

 

고목처럼 픽 쓰려지는 놈은 관리인 아저씨였다. 하지만 그는 죽지 않았다. 고통스러운 듯 파닥거리는 놈의 목에 톱을 가져가 쓱

 

쓱 썰었다. 오랜 세월 동안 두껍게 쌓인 분통과 울화와 스트레스가 톱질하는 손에 가해져 더러운 기억들이 썰어지는 속도만큼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지금 썰고 있는 모가지는 관리인의 목에서 상처를 준 숱한 인간들의 목으로 순간순간 바뀌었다.

 

 

쾌감이 세포들을 깨웠다. 억눌리고 짓밟히고 모욕을 당해 주눅이 든 온 몸의 가엾은 세포들이 핍박과 주눅에서 벗어나 신명나

 

게 춤을 추었다.

 

 

목이 떨어져 나갔다. 너무나 일찍 년놈들의 모가지가 짤려 나갔다. 불충분했다. 이 정도로는 충분치가 않았다. 난 분리된 머리를

 

박살내기 위해 머리를 잡고 들어올렸다. 눈물이 그윽한 눈을 깜박거리고 있는 머리는 명희의 것이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다.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선명한 잔혹한 살육의 장면들이 머리를 핑핑 돌게 했다. 심하게 목이

 

말랐다. 난 늘상 머리맡에 두고 잠이 드는 주전자를 찾아 머리 위쪽으로 손을 더듬었다. 주전자는 없고 바닥의 차갑고 축축한

 

것이 쓸렸다. 난 그제서야 시꺼먼 구름으로 뒤덥힌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계단을 굴러 의식을 잃은 기억이 떠올랐다.

 

난 죽지 않았다! 살인마가 뒤쫓아오고 있었다!

 

 

난 공포가 밀려오자 벌떡 몸을 일으켰다. 도망쳐야 한다! 일어서는 순간 검은 무리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풀밭이 파이는 발굽

 

소리와 울음소리, 그것은 내 근처에서 사방으로 흩어진 검은 물체가 흑염소 떼였다는 것을 알게 했다. 난 분명 거실에서 쓰려졌

 

었다. 그 후의 기억이 전혀 없었다. 혼란스러움이 머릿속을 마구 헝클었다. 내 흐린 기억을 상기시켜 줄 듯이 구름 사이에 달이

 

고개를 내밀었다. 난 믿기지가 않았다. 믿기지가 않아서 원을 그리듯 몇 바퀴나 한 자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구닥다리 트럭이 소나무를 들이박고 찌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서너 마리의 흑염소가 내장이 갈라진 채 죽어 있었다. 난 살인마

 

가 아니야! 난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 내가 내 전부인 명희를 죽일 이유가 없다고! 난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듯 잔나무에 걸려

 

나부끼는 노란 비옷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오, 아니야! 안 돼!”

 

 

난 어떤 것을 발견하고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것은 피묻은 칼이었다. 나는 충격에 휩싸여 비틀거리며 칼을 주웠다. 그 사이에

 

난 십여 미터 전방에 솟아 있는 펜션을 발견했다. 나와 명희가 투숙했던 펜션과 비슷했지만 지붕이 삼각형 모양이 아니었다.

 

 

내 귓전에 정신과의사의 말이 넌 살인자 라고 낙인 찍듯 들려왔다.

 

 

“스트레스 외상 증후군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아직 퇴원하면 안 됩니다. 당신이 수시로 들었다는 비난의 소리들은 환청입니

 

다. 당신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하나 같이 당신을 욕한다고 하셨죠. 그래서 한 동안 집밖 출입을 못 했다고 했잖습니까. 식충이

 

같은 놈이라고 당신 삼촌이나 그의 식구들이 한 번도 당신에게 말한 적 없다고 합니다. 오히러 당신을 안타까워하고 이해도 하

 

고 늘 격려의 말을 했대요. 당신은 소위 헛 소리를 듣고 괴로워하다 손목을 그은 겁니다. 퇴원은 아직 일러요. 당신은 다 나았다

 

고 우릴 속인 겁니다.”

 

 

“전 다 나았어요, 선생님. 내가 환청 때문에 어처구니 없는 짓을 한 것을 이제 압니다. 내 여자친구가 같이 휴가를 꼭 가야한다

 

고 하네요. 여기서 치료받고 퇴원한 김명희 씨가 제 여지친굽니다. 몇 번 면회도 왔었는데, 선생님께선 못 보셨군요. 알콜중독

 

증세로 입원했던 김명희 말입니다. 전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답니다. 삼촌이 와서 보호자 동반 외출도 서너 차례했었죠. 그건 선

 

생님께서 허락했었고요. 그때마다 명희를 만났어요. 난 정말 괜찮습니다. 다 나았다고요…… 절 정말로 못 믿으시겠다면 휴가

 

를 다녀 온 후에 외래로 와서 검사를 받겠어요. 휴가를 같이 안 가 주면 명희가 절 떠나답니다.”

 

 

난 어둠에 싸인 펜션을 휘청거리며 다가갔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펜션 앞마당에 절단된 다리와 팔 몇 개가 핏물에 뒤덥

 

힌 채 나의 잔혹한 만행이 여기에서도 저질러졌음을 느끼게 했다. 3명을 죽인 버스의 살인마도 지명 수배된 40대 후반의 최 모

 

씨가 아닐지 모른다. 나와 명희는 각자의 짐을 챙겨 육지의 부둣가에서 상봉하기로 했었다. 중간에서 만나 오는 것보다 각자의

 

집에서 직접 부두로 오는 것이 휠씬 빠르고 시간 절약도 되었기 때문이었다. 난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에서 인천으로 오는 내내

 

잠들었던 기억밖에 없었다. 종점에서 내 어깨를 흔들며 내리라던 운전사는 내 망상이 만들어 낸 가공의 인물일 것이다.

 

 

잠겨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현관문의 문고리를 돌리자, 역시나 부드럽게 열렸다. 거실에서 피비릿내가 진동했다. 난 망연

 

히 선 채 어둠 속을 바라보다 벽의 스위치를 올렸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광경에 난 무릎이 꺾이며 풀썩 주저앉았

 

다. 대여섯 구는  돼 보이는 시체들이 거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었다. 내장이 갈라지고, 팔과 다리가 잘리고, 목이 없

 

는 시체들. 난 꿈속에서 명희의 목을 톱질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건 꿈이 아니었다. 난 눈을 감고 내가 한 짓을 반추하고 있었

 

던 것이다. 팔목을 그을 때도 그랬다. 내 방 천장에서 들려오던 가혹하고 매몰차던 비난의 소리들. 넌 쓰레기야, 넌 살 가치도

 

없는 놈이라고! 그 목소리의 놈년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내 방에 내려섰다. 입 꼬리를 치켜 뜨고 손가락질을 하며 놈년들이 겁에

 

질린 내게 쉬지 않고 욕설을 퍼부었다. 난 솜뭉치로 귀를 틀어막았다. 소용없었다. 난 내가 정말 쓰레리라고 단정 내렸다. 그래,

 

난 정말 살 가치가 없는 놈이지. 저것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고 싶지만, 나 혼자 죽고 말자고. 난 쓰레기니까.

 

 

난 미쳐서 내가 한 짓을 꿈이라고, 머릿속으로만 수없이 저질렀던 짓을 실행에 옮긴 내가 믿기지 않아, 꿈에서 깨워난 척 굴었

 

던 것이다. 거실의 저 시체들! 한밤중이니까, 모두 자고 있을 것이다. 난 현관문을 따고 소리없이 들어와 방마다 방문했을 것이

 

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칼을 찔렀겠지. 모두 죽인 후에 시체들을 거실에 모아 놓고 토막내면서 히스테리칼하게 웃어젖혔겠지.

 

 

난 내가 정신병에서 완치됐다고 자신감을 가졌었다. 심한 스테레스가 내 몸에 느껴지면 견디지 못하고 근육이 경련을 일으켰

 

다. 하지만 퇴원 무렵엔 안정을 되찾아 경련은 찾아들지 않았고 환청도 사라졌다. 내가 신뢰하고 자부심을 가지라고 격려를 아

 

끼지 않은 명희가 큰 힘이 되었다. 더 이상 세상은 내게 적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날 공격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

 

았었다. 그러나 내 정신병은 잠재되어 있다가 고개만 까딱거리고 입을 봉해버린, 그래서 수줍은 부부라고 애써 흘러 넘기려 했

 

던 그 순간부터 재발이 시작된 것이 분명했다.

 

 

난 죽어야 돼. 죄 없는 사람들을 아무 이유없이 도살하다니!

 

 

난 줄줄 흘러내린 눈물을 닦지 않았다. 난 용서받지 못할 짓을 자행한 쓰레기였다. 난 쥐고 있던 칼을 내 복부에 깊숙이 찔러넣

 

었다.

 

 

 

 

 

                                         * * * * *

 

 



칼을 부여잡은 손을 타고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난 그것을 빼 내 심장을 겨냥했다. 심장을 내리 찍으려는 순간 2층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헐떡이는 소리 같았다. 그런데 낯이 익은 소리였다. 또 환청이 들리는 거야. 난 다시 칼을 치켜 들었다. 그런

 

데 이 번엔 분명하게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환청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카랑카랑하게 들리는 여자 목소리였다.

 

 

“아직 죽지 마, 씹쌔끼야!”

 

 

난 칼을 박은 복부를 한 손으로 누르며 엉금엄금 기었다. 출혈이 심해 현기증이 일었다. 한 계단 한 계단 힘겹게 기어오르며 난

 

마지막으로 내 정신을 시험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죽은 명희가 저 위에서 누군가에게 소리칠 리는 없다!

 

 

너무 깊숙이 찌른 것 같다. 몸을 움직일 적마다 복부와 내장이 불에 지지는 듯 아팠다.

 

 

“이제 퇴원해도 되겠습니다! 기분 좋죠?…… 내가 뭐라고 그랬어요. 조그만 더 치료하면 완치될 수 있댔잖아요. 환자분에겐 자

 

신감 회복이 곧 치료였죠. 당신 삼촌이 같이 식당을 운영하자고 한 것이 당신에게 자신감을 심어 준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다

 

시 만나지 말자고요, 하하하!”

 

 

난 최초 퇴원 신청 후 두 달 후에 퇴원했다. 명희는 날 기다려 주었다. 가고 싶은 곳이 있었는데 가지 않아도 됐다는 소리를 했

 

었다. 퇴원하자 피씨방으로 날 데려간 명희는 펜션을 검색하더니 내게 이 섬의 펜션 홈페이지로 안내했다. 난 우리가 같이 찾은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심한 출혈로 확대경을 들이댔다가 떼었다가 한 것처럼 사물이 제멋대로 보였다. 힘겹게 계단을 올라 복도를 기어갔다. 시체 하

 

나가 복도에 누워 있었다. 발가벗겨진 다리 옆을 엄금엉금 기었다. 난 더 이상 토할 것도 없었다. 젖가슴이 난자당한 시체는 얼

 

굴에 삼지창이 박혀 있었다.

 

 

“씨팔 놈아, 미진이하고 이 짓을 얼마나 했어! 내가 병원에 있으니까 대 줄 년이 필요했냐, 개새끼야! 네가 날 배반하지만 않았

 

어도 난 알콩중독에, 의사새끼가 뭐라고 했더라. 그래, 피해망상 어쩌고 하는 병 따윈 안 걸렸어. 난 널 미치도록 사랑했다고,

 

새끼야!”

 

 

난 소리가 나는 방 앞에서 고개를 들었다. 희미한 달빛에 벗은 명희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침대 위에서 말을 타는 자세로

 

앉아 위아래로 움직였다.

 

 

난 문지방을 짚고 복부를 찢는 고통을 느끼며 간신히 일어섰다. 난 명희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다는 소리를 듣고 뛸 듯이 기

 

뻤다. 피해망상을 알콜에 의지해 극복하려했던 명희는 술 없이는 하루도 견디지 못하는 알콜중독이 되어 버렸다. 그 원인이 무

 

엇인지 난 몰랐다. 그냥 어려서부터 미혼모로 그녀를 키운 엄마 곁에서 날름날름 받아 먹은 것이 성인이 되어 술 없이 살 수 없

 

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알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사귀는 남자와 갈등이 많았는데, 나란 사람을 만나 보니 그 남자가 그렇게 대

 

단해 보이지 않더라고, 그래서 미련없이 헤어졌다고 했다.

 

 

“개새끼! 하필 내 친구와 놀아 놔. 날 버린 것은 좋아. 나도 쿨하게 보내줄 수 있었다고. 그런데 들리는 소문을 들으니 기가 막히

 

더군. 네가 그랬다며? 난 오래 살지 못할 거라고. 겉은 멀쩡해 보이는데, 사겨보니 완전 미친 똘아리였다고. 씹새끼! 그래 나 스

 

물살 때 정신병에 들락거렸다! 우리 엄마 바짓저고리 놈에게 강간당하고……”

 

 

난 방으로 한 발 들여놓고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명희와 정사를 벌이는 남자의 목이 없었다. 명희는 목을 딴 놈과 섹스를 즐기

 

며 중얼대고 있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비명에 명희가 휙 고개를 돌렸다.

 

 

“이게 누구야? 내 신랑님 아니야!”

 

 

명희가 간들어지게 웃었다.

 

 

재혼남이 필사적으로 가발이 떨어져 있는 것을 내게 가리켰었다. 목이 잘려 잔디밭으로 내던져진 시체는 명희가 아니라 관리

 

인아저씨였단 말인가. 자기들 주인을 알아보고 염소떼가 몰려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왜 명희는 자기 옷을 아저씨에게 입혔지?

 

 

“머저리 같은 놈! 내 그럴 줄 알았어! 넌 끔찍한 짓을 네 소행으로 여기고 자살할 줄 알았지! 굳이 내 손으로 죽이고 싶지 않았거

 

든. 그나마 정이 든 놈이니까. 소심덩어리 등신!”

 

 

명희가 도끼 자루를 잡아 들었다.

 

 

“자, 소개할게! 나와 몇 달씩이나 동거했던 민수야! 이 섬으로 휴가를 온다는 소리를 들었지. 너무 보고 싶었어. 그런데 혼자 올

 

수 있어야지, 호호호!”

 

 

“미, 미친 년!”

 

 

나는 소름 끼치는 명희의 히스테리칼한 웃음 소리에 가슴 저 밑바닥에서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뭐, 미친 년! 이 등신 새끼가!”

 

 

명희의 눈동자가 기묘하게 번들거렸다. 난 명희가 휘두른 도끼를 간발의 차이로 비껴났다.

 

 

관리인 아저씨와 덩치가 비슷할 만큼 근력도 센 명희였다. 정신적인 어려움을 운동으로 달래본다고 스물 살 이후부터 쭈욱 권

 

투도장과 헬스클럽을 다녔다고 들었다. 난 나를 만나 정신적인 안정을 찾았다는 명희의 말을 믿었었다. 그녀의 엄마가 병원비가 걱정

 

돼 완치가 안 된 상태에서 퇴원시킨 것을 알았지만, 내가 보기에 명희는 온전해 보였었다.

 

 

명희가 두 번째 도끼를 휘둘렀다. 이번엔 피하지 못하고 어깨의 일부가 잘려 버렸다. 난 의지와는 달리 내 사지가 마음대로 움

 

직이지 않았다. 어깨의 일부가 날카로운 도끼에 잘려 나가자 그 아픔으로 제 멋대로 감기는 눈의 초점이 일시적으로 돌아왔다.

 

 

“민수야, 잘 봐! 이 새끼가 네 대타로 날 즐겁게 해 줬었어! 이제 네가 돌아왔으니 필요없는 놈이지. 저 밖의 내 대타로 널 즐겁

 

게 해 준 년처럼 말야! 호호호!”

 

 

명희가 뛰뚱거리며 벽에 의지하고 선 내 정수리를 향해 이를 악물고 도끼를 휘둘렀다. 난 날 향해 날아드는 도끼를 피해 무릎를

 

굽혔다. 열려진 창문을 가리고 섰던 내가 밑으로 몸을 내리자 명희의 도끼는 창밖 허공을 내리찍었다.

 

 

난 핏물이 흥건하게 고인 방에 주저앉았다. 명희의 단말마 비명 소리가 섬의 밤을 깨웠다. 나는 어느 정도 기운이 돌아오는 것

 

같자 몸을 일으켰다. 잔디밭 가장자리에 깔린 자갈밭에 명희가 허리가 꺾인채 바둥대고 있었다. 난 복도에 누워 있는 여자의 얼

 

굴에서 삼지창을 빼냈다. 신통하게도 불끈 힘이 솟아났다. 난 삼지창을 끌며 아래층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끝-                  

Comments

G 2022.09.11 06:44
혐.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