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 살육의 섬1

(공포) 살육의 섬1

G ㅇㅇ 1 1,544 2022.09.11 01:14

작은 부두에 도착했을 때, 점점 세기를 더해가던 바람은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험악하게 울부짖는 소리로 바뀌었다. 머

 

리채를 휘어잡힌 듯 기묘한 비명소리를 내며 소나무들이 심하게 요동쳤다. 나는 명희의 손을 잡고 새우등을 한 채 거센 바람에

 

실려오는 굵은 빗줄기를 뚫고 내달렸다. 농촌 지역의 버스 간이역 같은 막사는 비를 막아 주었지만 낮은 제방을 삼킬 듯이 날카

 

롭게 부딪쳐대는 파도의 기세는 가히 위협적이었다.

 

 

“미쳤지. 분노한 바다에 제물로 바쳐지지 않은 것이 기적이야."

 

 

명희가 진저리를 치며 신음을 토했다.

 

 

작은 고깃배가 무사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게 통통거리며 달려온 바닷길은 높은 파도가 사납게 포효하고 있었다. 육지에서 출

 

발할 때만 해도 심술궂은 아낙네같던 바다였다.

 

 

비에 흠뻑 젖은 채 배를 정박시킨 아저씨는 낡은 트럭을 끌고 와 우리를 태웠다. 오십 대 초반의 까무잡잡하고 덥수룩한 머리의

 

그는, 조금 큰 키에 뚱뚱한 체구였는데, 인정이 많고 친근감을 주는 후더분한 인상의 사내였다.

 

 

포장이 안 된 가파른 길 한 쪽은 까까지른 절벽이었다. 중고시장에서 구입했음직한 구닥다리 트럭은 위험하게 덜컹거리며 지

 

그재그 길을 힘겹게 올랐다.

 

 

“속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경찰은 어젯밤 인천시 옹진군 노도마을 부근에서 버스기사와 2명의 여성승객을 잔혹하게 살해한

 

용의자로 최 모씨를 긴급수배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최 모씨는 사십 대 후반으로 175센티미터의 키에 앞머리가 벗겨진 넓적한

 

얼굴이며, 사건 발생 12시간 전에 인천시 모 개인 정신병원에서 탈출했다고 합니다. 그는 병원을 탈출하면 자기를 핍박하는 모

 

든 사람을 죽여 버리겠다고 공헌하고 다녔답니다. 그는 심각한 피해망상증 환자로……”

 

 

잡음이 심한 라디오에서 긴급한 어조로 뉴스가 흘러나왔다.

 

 

“이런 데 있으면 저런 미치광이를 만날까 하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지.”

 

 

아저씨가 여름이 다 간 지금에서야 휴가를 온 우리를 배려한 듯 라디오를 꺼버렸다. 그리곤 귀에 벌레라도 들어간 것처럼 새끼

 

손가락으로 귀속을 마구 후벼팠다. 나는 우리가 탄 트럭이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질까 노심초사해야 했다.

 

구닥다리 트럭과는 비교가 안 되는 신식 건물이 평평한 구릉에 자리잡고 있었다. 하얀 색으로 벽을 칠한 2층짜리 펜션은 절로

 

감탄을 자아냈고, 푸른 잔디가 깔린 앞마당 한 켠에 붉은 기와지붕을 머리에 윈 정자가 어미 건물을 뒤에 둔 것처럼 애교스럽게

 

서 있었다.

 

 

트럭에서 내려 펜션으로 뛰어가던 나는 정자 아래서 시커멓게 웅크리고 있는 염소 떼를 보고 적잖게 놀랐다. 수십 마리의 흑염

 

소 떼가 일제히 우리를 쳐다보았다. 길쭉한 수십 개의 뿔들이 일찍 찾아온 어둠 속에서 위협적으로 끄덕거렸다. 나는 엉뚱하게

 

도 저 놈들이 한 꺼번에 공격해 오는 생각을 했고, 내 육신이 찢기고 밟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고깃덩어리로 널부러진 광경

을 떠올렸다. 병원에 너무 오래 입원해 있었던 것 같다. 염소떼를 보고  놀라다니.

 

“이 섬 주인이 방목해 놓은 놈들이라오. 펜션이 들어서기 전엔 저놈들의 섬이었지. 휴양 온 고객들이 밤 산책을 하다 놀라는 경

 

우가 종종 발생해 몇 마리만 남기고 모두 잡아 도살처분했다오. 난 저 놈들을 돌보기도 하지요. 먹이를 주거나 조난을 당해 있

 

으면 구해 주곤 한다오. 그래서인지 영리한 개들처럼 날 잘 따른다오. ”

 

 

관리인 아저씨의 말을 경청하는 명희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번들거렸다. 시꺼먼 야생 염소 떼는 그만큼 우리에게 공포스럽게

 

비춰졌다.

 

 

우리는 아저씨가 끌여준 매운탕을 억지로 비우고 2층으로 올라갔다. 우리를 싣고 오느라 깜박하고 식품 재료들을 사 오지 못했

 

다는 아저씨의 미안해 하는 표정을 보고 차마 중도에서 수저를 놓을 수가 없었다. 휴가철이 끝물이라는 8월 하순이었지만 이

 

섬을 찾는 휴양객들은 더러 있는 모양이었다. 여기 펜션은 올 봄에 재혼했다는 30대 후반의 수줍은 많은 부부와 우리 커플, 이

 

렇게 두 팀이 투숙하고 있었다. 섬 반대편에도 이와 유사한 펜션이 있는데, 우린 낚시에 별 관심없는 터라 남쪽의 이 펜션을 택

 

했었다. 아저씨의 부인되는 분이 그쪽 펜션의 관리를 하고 있다고 하니, 그쪽에도 분명 투숙객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저씨는 궂

 

은 날씨가 아니라면 트럭을 몰고 가 식품 재료들을 가져올 수 있었을 것이다. 명희와 난 생선의 비릿한 맛을 양치질로 씻어내며

 

인터넷에서 찾은 펜션 정보를 의심하기 시작한 서로를 달랬다.  

 

 

 

                            *  *  *  *


 

 

명희는 통통하다는 말을 싫어한다. 180센티미터인 나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명희는 분명 날씬한 축에 들진 않았다. 솔직히 좀

 

통통한 편이다. 그러나 그녀의 귓바퀴를 핥으며 가빠오는 숨 소리로 내가 속삭이는 말은 욕정에 불타서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

 

리는 절대 아니다.

 

 

“널 잘근잘근 씹어 먹고 싶어. 넌 너무 달아.”

 

명희는 병원 휴게실에서 처음 보았다. 마른 체구인 나는 날씬하다는 소리를 듣는 앙상하게 마른 여자들을 탐탁치 않게 바라보

 

는 경향이었다. 난 가슴도 크고 엉덩이도 크고 다리도 좀 굵은 여자를 동경했는데, 명희가 딱 그런 여자였다. 뚱뚱하지는 않은

 

글래머의 여자.

 

 

난 굶주린 늑대처럼 푸짐한 명희의 몸 구석구석에 걸쭉한 침을 바르고 그녀 안으로 내 남성을 밀어넣었다. 명희는 늘상 수동적

 

으로 굴더니, 유난히 달뜬 신음을 토하며 격렬하게 반응했다. 외지에서 사뭇 다르게 느껴지는 친밀감 때문일까. 농축된 성적 욕

 

구를 배설한 뒤에 오는 상쾌함과 노곤함으로 우리는 곧 잠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수면 속으로 내 의식이 가라앉기 전에, 긴급한 어조로 뉴스 속보를 알리던 앵커의 목소리가 가물거렸다. 음산한 조명이 위태롭

 

게 깜박거리는 것이 꼭 공포영화의 세트장 같았다. 맨뒷좌석에서 오른편 둘째 줄의 젊은 여자의 머리는 창에 기울여져 있었고,

 

왼편 일곱번째 줄의 칙칙한 블라우스와 남루한 자켓을 걸친 아줌마는 통로에 반쯤 걸쳐 있었다. 참혹하게 세로로 갈아져 벌어

 

진 그들의 목구멍에서 검붉은 피가 콸콸 쏟아졌다. 운전수는 나지막히 틀어놓은 트로트를 흥얼거리며 산과 논 사이로 난 캄캄

한 길을 저속으로 달렸다. 종점으로 가는 지름길이서 자주 이용하는 코스였다. 맨뒷좌석에서 앞쪽으로 자리를 옮기는 줄 알고

 

운전에 열중하던 운전사는 등 쪽에 기척을 느끼고 룸밀러를 쳐다보았다. 치켜 올려진 목은 북을 찌르는 것처럼 칼이 수월하게

 

박혔다. 가차없었다. 나는 룸밀러에 비친 버스 안의 끔찍한 광경에 비명을 지르러했다. 차가운 것이 목에 느껴진 순간 부서진

 

인형처럼 힘없이 고개가 젖혀졌다. 반사적으로 올라간 손이 벌어진 목구멍 속으로 쑤셔박혔다. 나는 미친 듯이 내장들을 끄집

 

어 내는 내 손을 보고 경악하며 비명을 질렀다.

 

 

나는 목을 부여 잡으며 깨어났다. 꿈이었다. 너무나 생생한 내 몸 속의 끈적끈적한 내장들이 눈 앞에서 둥둥 떠다녔다. 구토가

 

올라왔다. 나는 축축하게 젖은 티셔츠를 몸에서 떼어내며 창문을 열었다. 섬을 날려버릴 것 같던 저돌적인 바람은 기세가 한풀

 

꺾여 있었다. 비도 그쳐 있었다. 쫓기듯이 흘러가는 시꺼먼 구름 사이로 반토막 난 달이 섬의 어둠을 간간히 앗아갔다. 나는 담

 

배를 입에 물고 모로 누워 자고 있는 명희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가늘고 평화로운 숨 소리는 그녀가 내게 가진 애정의 척도를

 

가늠어 보게 했다. 그녀가 내게 연민을 느끼지 않았다면 살을 섞은 관계가 되었다고 해도 퇴원과 동시에 결별을 선언해 버렸을

 

지 몰랐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그녀의 고백 앞에서 나는 바보처럼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나보다 두 살이나 많은 명희였

 

지만, 삼촌 집에서 얹혀 사는 실업자인 내게 그녀의 위로와 격려는 어느 틈엔가 의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창밖으로 담배 연기를 휴 하고 내뱉었다. 명희가 끊으라고 성화지만 타는 속을 달랠 수 있는 것은 담배만한 게 없었다. 백

 

여 통이 넘는 이력서를 간절한 소원을 담아 작성했지만 외향적이지 못한 성격 탓인지 그 결과는 면접으로 끝이었다. 항상.

 

 

늦은 휴가를 끝내고 돌아가면 새로운 각오로 취업 문을 두드릴 생각이었다. 사내새끼가 손목을 그은 것은 창피한 일이다. 명희

 

와 결혼하려면 그녀의 소원을 반드시 들어주어야 했다.

 

 

나는 술 생각이 간절했다. 아래층 거실 냉장고에 캔맥주가 있었다. 음료와 아이스크림, 과자와 술 등을 갖춰 놓고 투숙객들에게

 

판매했다. 돈은 내일 지불해도 괜찮을 것이다. 아저씨를 깨우기엔 적절치 않은 새벽 3시였다.

 

 

목재 계단의 삐꺽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신경쓰였다. 반달이 구름에 가렸는지 거실은 동굴속처럼 어둡고 바닥은 소금알갱이가

 

피어난듯 다소 까칠거렸다. 일반 슈퍼에 비치된 것과  똑같은 냉장고의 문을 열자 불이 켜지며 불빛이 눈을 찔렀다. 나는 캔맥

 

주 하나를 꺼내고 문을 닫았다. 무심코 돌아서다가 난 하마터면 미끄러질 뻔했다. 나는 다시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에서

 

새어나온 불빛에 비춰 본 발바닥은 시뻘건 피로 범벅이었다.

 

 

“뭐야, 이거?”

 

 

때마침 고개를 내민 달빛이 희미하게 거실로 들어왔다. 나는 마당에 무리지어 있는 흑 염소떼를 보고 재차 소스라치게 놀

 

랐다. 놈들은 쳐들어 올 기세로 거실 창 가까이에 밀집되어 있었다. 염소는 초식동물이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난 형광등

 

스위치를 찾았다. 딸깍 하고 올린 스위치에 불은 들어오지 않고 달빛은 그새 사라졌다. 염소때 무리도 암흑 속에 묻혀 버렸다.

 

 

정전이었다.  난 공포에 휩싸였다. 스위치를 더듬었던 벽을 짚고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발바닥이 질퍽거렸다. 상당한

 

출혈이 예상되었다. 누굴까. 누가 다칠 것일까. 거실에 피가 낭자할 정돈데 펜션 안은 너무나 조용했다. 잠시 주춤했던 바람이

 

음산한 휘파람를 불며 섬을 희롱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아저씨 주무세요!”

 

 

난 관리인 아저씨의 방문을 노크했다. 괜히 호들갑을 떠는 것은 아닌지 하는 소심증이 스쳤지만 거실 바닥 여기저기에 낭자한

 

피는 중상을 입었거나 그 이상의 상처를 의미했다.

 

 

아무리 노크해도 응답이 없자 난 문고리를 잡고 돌려 보았다. 잠겨 있지 않았다. 버스 살인사건의 살인마가 거침없이 칼을 휘두

 

르던 악몽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수 십개의 섬을 관광하기 위해 육지 부두까지 오려면 살인사건이 난 도로를 경유하거나 근방

 

의 국도를 거쳐야 했다. 살인마가 수배령이 내려지기 전에 섬에 잠입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난 엄습하는 공포를 억누르며 아

 

저씨를 불렀다. 어느 정도 어둠에 익은 눈은 침대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았다. 아저씨가 없다! 거실에 낭자한 피는 아저씨의 것

 

일까.

 

 

“아앗!”

 

쥐 죽은 듯이 조용한 정적을 찢으며 단말마 비명이 들려왔다. 2층이었다. 나는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살인마가 이 안에 있다!

 

이미 3명의 목을 딴 그 놈은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일 거라고 공헌했다고 했다. 날카로운 비명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여

 

자의 목소리였다. 2층 오른쪽 끝방에 투숙한 여자의 것일까. 난 그러길 바랐다. 명희가 아니기를. 하지만 명희가 아니라고 해도

 

명희는 위험에 처해 있다. 나는 무기가 될만한 것을 허둥대며 찾았다. 주방의 수납장에서 식칼을 꺼내 들고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며 계단을 밟았다. 너무 서두른 탓에 난간 모서리에 복부를 호되게 부딪쳤다. 극심한 통증에 배를 움켜 쥐며 주저앉았다.

 

지체할 수가 없다. 나는 배를 움켜쥐고 왼쪽 복도 벽에 몸을 붙였다. 까치발을 한 채 살금살금 걸음을 옮기며 식칼을 아프게 쥐

 

었다.

 

 

방문이 열려 있었다. 난 아래층에 내려갈 때 문을 닫는 것을 잊지 않았었다. 같은 층에 투숙객이 있기 때문이었다. 심장이 튀어

 

나올 듯이 쿵쾅거렸다. 명희의 벌어진 목에서 피가 솟구치고 고통을 호소하듯 내장을 마구 끄집어 내는 영상에 나는 숨이 턱턱

 

막혔다.

 

 

‘안 돼, 명희야…….’

 

 

나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칼을 처 들고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살인마가 공격할 기회를 주지 말아야 했다. 난 살인마를 향해 마

 

구 칼을 휘두를 것이다. 명희 몸에 손 끝 하나만 댔다면 갈기갈기 찢어 죽일 것이다. 난 독기를 물고 빠르게 눈동자를 굴렸다.

 

 

아무도 없다! 질식할 것 같은 공포가 엄습했다. 눈 앞이 흐려지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까의 비명소리는 명희의 것이었단 말

 

인가. 왜 데려갔지? 아직 죽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나는 뼈속 깊이 파고드는 상실감에서 벗어나며 머리 끝까지 분노가 치밀었

 

 

다. 내 손으로 죽여 주고 말 것이다. 기도에 칼을 깊숙이 박고 사타구니까지 긁어 내릴 것이다. 뱃가죽이 벌어지면 이 두 손으로

 

내장들을 다 파내 네 목에 감아주리라. 네 놈의 두개골을 가루로 만들어 주고 말 것이다.

 

 

나는  부들거리는 손을 배냥에 집어놓고  더듬었다. 분명히 챙겨 왔는데, 후레쉬는 온데간데 없었다. 막 명희의 배냥을 여는데, 쿵 하는 둔탁한 소

 

리가 마치 펜션을 뒤흔드는 것처럼 크게 들렸다. 난 소리가 난 창가로 몸을 숙이고  마당을 두리번거렸다.  구름 사이로 스쳐가

 

는 달빛에 널부러진 형체가 보였다. 나는 터져나오는 비명에 입을 틀어막았다.  몸뚱아리에 걸쳐진 반팔 티와 반바지는 피로 얼

 

룩져 본래 무슨 색이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군데군데 흰색이 엿보였다.  난 엎어진 시체를 눈으로 훑어가다가 다시 한

 

번 입을 틀어막았다. 머리가 있어야 할 부분에 눈을 씻고 쳐다봐도 머리가 보지 않는 것이었다. 난 익숙한 옷가지가 나와 똑같

 

은 것을 떨려오는 공포에 전율하며 알아챘다. 명희와 난  커플 잠옷을 구입했었다.

 

 

명희가, 명희가 죽었다!  금세 눈이 젖었다. 난 망연자실해서 잠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노란 비옷을 머리까지 뒤집어 쓴 살인마

 

가 펜션에서 걸어나왔다. 난 살기에 차서 칼을 움켜 쥐었다. 갑자기 정자 마루 밑에서 흑염소들이 우르르 뛰쳐나왔다. 살인마가

 

무언가를 휙 던졌다. 난 명희의 머리가 그녀의  몸통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고 온 몸이 피가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먹이감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다투기라도 하듯 시꺼멓게 몰려든 흑염소 무리에 명희의 머리와 몸통은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놈들은 명희를 뜯어 먹는 게 아니라 단단한 발굽과 날카로운 뿔로 짓이기고 있는 것 같았다.

 

 

쨍그랑!

 

 

믿기기 않은 광경에 얼이 나간 나는 그만 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찰라, 노란 비옷이 고개를 쳐들었다. 나는 움찔 놀라며 급히 방 안으로 몸을 숨겼다.

 

 

죽은 명희로 인해 애통할 사이도 없이 내 자신에게 엄청난 공포가 닥쳐왔다. 달빛이 드러난 침대 시트에 명희 것으로 보이는 핏

 

자국이 묻어 있었는데, 그것은 방 밖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명희는 살인마에 의해 방 밖으로 끌려 나가 다른 방에서 살해돼 던

 

져진 것이 분명했다. 오른쪽 끝방의 재혼 부부가 먼저 살해됐다는 것은 그 방 부근 밑으로 떨어진 명희의 시신으로 봐서 추정할

 

수 있었다. 칼 외의 살인 도구가 그 방에 있었던 것이다! 살인마는 명희가 혼자 투숙한 줄 알았기 때문에 내 존재를 몰랐다!

 

 

미친 듯이 방에서 뛰어 나와 숨을 곳을 찾는 내 귀 속으로 쿵쿵 올라오는 살인마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Comments

G 2022.09.11 06:3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