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압) 네비게이션

(스압) 네비게이션

G 독과점 1 2,554 2022.03.07 14:15

시골길의 갑작스러운 정체는 역시 사고 때문이었다.

 

우리가 탄 92년식 포텐샤는 15분 동안 꽉 막힌 도로를 슬슬 기다가 마침내 사고 현장을 지나쳤다. 닭장을 가득 실은 18톤 트럭이 한 차선을 온통 막은 채 길게 누웠고, 그 아래 찌그러진 고철처럼 깔린 것이 상대 차인 듯했다. 마티즈나 클릭처럼 보이는 소형차였는데, 사고가 어떻게 났는지 짐작도 가지 않을 만큼 처참한 몰골이었다. 구급대보다 먼저 도착한 견인차 기사가 허탕쳤다는 표정으로 갓길에서 담배를 피웠고, 이 모든 풍경이 꿈이라도 되는 양, 닭 수백 마리가 도로를 어지럽히며 날았다. 누군가가 살아남았다면 트럭 쪽이었겠지만, 썩 기대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정체를 벗어난 차들은 무심히 현장을 떠났고, 개중엔 경적을 울리고 욕설을 내뱉는 이도 있었다.

 

“사고를 내려면 논두렁에나 처박힐 일이지, 길을 막고 지랄이야!”

 

창밖의 사고 현장을 내다보던 현준이 말했다.

 

“한국인들은 그저 운전대나 키보드만 잡으면 미친개가 된다니까.”

 

현준의 표정에 씁쓸함과, 연민과, 황당함에서 나온 헛웃음이 교차했고, 내 감상도 그와 비슷했다.

 

제정신을 논한다면 우리도 썩 칭찬받을 인물들은 아니었다. 그즈음 우리는 대학 생활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날도 소주방에 모인 우리 셋은 내일 볼 선형대수학 시험의 변태성을 성토하다 백지투쟁 안安에 뜻을 모았다. 민중가요와 원더걸스의 노래를 섞어 부르며 학교로 돌아왔을 때 제5공학관 주차장에서 한 해 선배의 차를 발견한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수완은 엉큼한 미소를 지으며 선배가 열쇠 숨겨 둔 곳이 어딘지 안다고 말했다. 나는 반쯤은 장난투로, “강가의 넓적한 바위에 불을 피워서 삼겹살을 구워 먹자.”라고 했고, 우리는 결국 선배의 포텐샤를 멋대로 타고 길을 떠났다. 그때가 오후 4시쯤이었다.

 

끓어오르던 객기도 사고 현장을 지나칠 무렵에는 이미 식어 없어졌지만, 누가 먼저 돌아가자고 말하기도 멋쩍은 상황이었다.

 

하품을 하며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던 현준이 말했다.

 

“할아버지가 해 준 이야긴데……. 젊은 시절엔 고속도로 바로 옆 땅에서 농사를 지었대. 근데 매년 흉작이었다는 거야. 심지어 다른 논은 풍년이라 쌀값 떨어질 걱정을 하던 해에도……. 그래서 어느 해 모내기 철에 굿을 했는데, 며칠 후에 할아버지 논 바로 옆의 고속도로에서 큰 사고가 났대. 논일하던 할아버지가 뭔가 터지는 듯한 소리를 듣고 전쟁이 난 줄 알았을 정도라니까. 몇십 중 사고였는데, 할아버지는 고깃덩어리가 된 사람들이 불타는 도로에 널브러진 광경을 직접 봤대. 풍년은커녕 사람이 죽어나갔다며 무당 욕을 했는데, 신기하게도 그 해 농사는 대풍이었대.”

 

수완이 말을 끊었다.

 

“운명은 대가를 원한다, 뭐, 그런 이야기 아냐?”

 

“비슷한데, 이건 우리 할아버지가 겪은 실제 사건이라니까. 그런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들어 봐. 다음 해에 논을 갈아엎던 할아버지가 흙 속에서 뭔가를 찾아냈는데, 그게 뭐였을 거 같아? ……백골이었대. 다리뼈, 팔뼈, 갈빗대, 거기다 머리뼈까지. 곳곳에서 그런 유골이 나왔다는 거야. 할아버지는 경찰에 끌려가고 난리가 났는데, 결국 지난해 교통사고 피해자들의 유골임이 밝혀졌지. 아무리 큰 사고였고, 도로 바로 옆의 논이라지만, 시체 조각이 그만큼 멀리 날아와서 논 깊숙이 박힐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흥미로운 건, 풍작은 그 해뿐이었단 거야. 다음 해부턴 다시 예년의 황폐한 땅으로 되돌아갔지.”

 

수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람 고기가 보약이라잖냐. 조선시대만 해도 사람을 고아 먹었다는 기록이 있어. 중병을 앓던 어느 마을 사또가 아이를 잡아먹었다던가……. 또 모르지, 여태 그런 미신이 남아 있을지도. 요즘 세상에 코딱지만 한 남한 땅에서 아이가 흔적도 없이 실종된다는 게 믿어지냐, 넌?”

 

닭털 날리는 구간에서 벗어났을 즈음 도로에 서서히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오후 6시 50분. 나는 여전히 술기운이 남아 머리가 아팠지만, 당장에라도 운전대를 엉뚱한 방향으로 돌릴 듯한 위험한 상태는 벗어났다. 때문에, 전조등이 비추는 도로에서 시커먼 물체를 발견했고, 그것을 짓밟기 직전에 차를 멈춰 세우는 데 성공했다. 안전띠를 매는 건 남자로서 쪽팔리는 짓이라 생각하는 수완이 대시보드에 머리를 들이박았다.

 

“저게 뭐지?”

 

내가 말했다. 전조등 불빛이 비치는 도로 위에 정체 모를 시커먼 덩어리가 죽은 고양이처럼 놓여 있었다.

 

“무슨 기계 조각 같은데?”


나는 사이드 브레이크를 당기고 차에서 내렸고, 잠시 후 수완과 현준도 뒤따라 내렸다.

 

지나온 곳을 돌아보니 사고 현장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고, 멀리 차들이 여럿 모인 듯한 불빛이 보였다. 그 위로는 뿌연 먼지처럼 닭털이 날리고 있었다.

 

수완이 그 물건을 발로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야, 이거 그거야. 대시보드 아랫부분…… 센터페시아라고 부르던가? 저 사고에서 부서진 조각이 여기까지 날아왔나 봐.”

 

수완의 말대로 그것은 마티즈에서 떨어져 나온 자동차 실내 부품이었다. 라디오와 에어컨 조작 단추가 온전히 붙었고 아래쪽에는 시거잭 구멍이 있는 센터페시아 조각이었다. 신기하게도, 시거잭에 꼽힌 전원선의 반대쪽 끝에는 부서지지도 않은 내비게이션이 달려 있었다. 심지어 내비게이션을 자동차 앞유리에 고정하는 거치대도 멀쩡히 붙어 있었다.

 

“디자인 보니까 마티즈 거네. 이래서 경차는 안 된다니까. 어떻게 부서졌기에 대시보드 쪼가리가 여기까지 날아와?”

 

“이거 비싼 건데? 블랙박스 일체형이잖아.”

 

내비게이션을 주워들고 유심히 살피던 현준이 말했다. 놀랍게도, 전원 단추를 누르자 문제없이 화면이 켜지는 상태였다. 자세히 보니 겉모양도 그런 사고에서 살아남은 물건이라 보긴 어려울 정도로 말끔했다.

 

“요즘 내비게이션 잘 나온다니까. 업체끼리 경쟁이 붙어서 이 정도 아니면 팔지를 못하겠지.”


“들고 가자.”

 

내가 말했다.

 

“돌려주게?”

 

현준이 물었다.

 

“돌려주긴, 누구한테? 마티즈 주인이 지금 내비게이션 걱정할 처지는 아니잖아.”

 

조금 전까지 차를 몰고 오는 내내, 내 휴대전화는 쉴 새 없이 울었다. 없어진 포텐샤를 찾는 선배의 부재중 통화가 액정화면을 가득 채운 걸 확인하고 휴대전화를 껐다. 도난 신고를 하기 전에 우리를 용의자로 의심한 선배를 칭찬해야 할지 탓해야 할지 애매했지만, 어쨌든 선배에게 늘어놓을 변명거리가 필요했다. 내일쯤 돌아갔을 때, 포텐샤의 허전한 대시보드를 블랙박스 일체형 내비게이션이 장식한 모습을 본다면 선배의 화도 많이 누그러지겠지.

 

“좀 꺼림칙하잖아? 죽은 사람 물건을 들고 간다는 게…….”

 

현준이 내키지 않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차피 보험에 들었을 거고, 가난한 학생들이 유용하게 쓴다면 고인도 좋아할 거야.”

 

나는 그렇게 말하고 두 손을 모아 구급차의 경광등이 번쩍이는 사고 현장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수완은 시거잭에 꼽힌 내비게이션 전원선을 뽑으려 애썼지만, 쉽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사고 과정에서 찌그러졌는지, 마치 내비게이션의 전원 코드가 시거잭에 뿌리를 내린 듯 단단히 박혀 뽑히지 않았다. 결국, 길가에서 주워 온 돌멩이로 연결 부위를 여러 번 내리쳐서야 떼어낼 수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문득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 부서진 센터페시아 조각에 내비게이션이 딸려 온 것이 아니라 그 반대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이었다.

 

내비게이션은 금방 포장을 뜯은 새 제품처럼 잘 돌아갔다. 차가 나아갈 길과 남은 시간을 정확히 알려줬고, 지나는 길마다 그 지역의 특산품을 줄줄 외었다. 반으로 나눈 화면의 오른쪽에는 DMB 방송까지 나왔다. 우리는 별것도 아닌 음악 방송에 군인처럼 열광했다. 걸 그룹 서너 팀의 노래를 미친 듯이 따라 부르며 경적을 울리다가, 5인조 남자 그룹이 나왔을 때에야 그 짓을 멈췄다.

 

수완이 말했다.


“슬슬 배가 고픈데. 빨리 어디 계곡을 찾아서 뭐라도 먹자.”

 

여태 넓적한 바위와 삼겹살을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시골이라고 어디든 계곡과 오두막과 서리할 수박이 있는 건 아니었다. 어딜 달려도 주변은 논뿐이었고, 이따금 옥수수밭이 보였지만 어둠 속에서 봐도 퍼렇게 덜 익은 것 같았다.

"내비게이션 뒀다 뭐해, 찾아봐.”

 

뒷자리에 앉은 현준의 말에 수완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내비게이션이 무슨 네이버 지식인이냐. 내공 걸고 '물 좋은 계곡 좀 알려주셈.' 하면 답글이라도 달릴까 봐?”


“요즘 내비게이션을 뭐로 보는 거야.”

 

현준이 뒷자리에서 손을 쭉 뻗어 내비게이션 메뉴를 능숙하게 만졌다. '추천 관광지' 메뉴에서 '피서지'를 선택하고 화면을 몇 번 넘기니 곧바로 '진광 계곡'까지 가는 경로가 그려졌다. 이어서 길을 안내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안내를 시작하겠습니다. 300미터 앞, 우회전입니다. 목적지까지 27분 남았습니다.

 

라면을 부숴 먹던 수완과 현준은 어느덧 잠이 들었다.

 

7시 55분. 밖은 이미 캄캄한 어둠의 세계였고, 하얀 창처럼 보이는 두 가닥 전조등 불빛이 한적한 도로 위를 찌르듯 비췄다. 고라니나 멧돼지가 아니라, 못생긴 심해의 물고기가 튀어나올 것만 같은 빽빽한 어둠이었다.

 

나는 쏟아지는 잠을 쫓으려 애썼다. 단조로운 목소리로 오른쪽이니 왼쪽이니 길을 안내하던 내비게이션 속 여자 목소리도 조금 전부터는 잠잠히 입을 다물었다. 이제 길은 외길이었고, 가끔 숲이 에워싼 언덕길이 나올 뿐 아무 선택지 없는 직진이 계속되었다. 살짝 열어놓은 창문으로 차가운 밤 공기가 스며들었지만 연방 벌어지는 입을 막지는 못했다.

 

눈이 따가워 잠깐 감았다고 생각했다.

 

순식간에 인식할 수 없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기분에 휩싸여 퍼뜩 눈을 떴다.

 

차는 자갈길을 달리듯 덜덜 떨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고, 정신을 차린 나는 곧바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급히 차를 세우고 주변을 둘러보니 조금 전까지 달리던 길과 전혀 다른 풍경인 듯 느껴졌다. 비로소, 꽤 긴 거리를 졸음에 빠져 정신없이 달려왔다는 걸 깨달았을 때, 온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차 안 앞뒤에서 신음이 쏟아져 나왔다. 잠에 빠졌던 현준과 수완은 갑자기 차를 세웠을 때 미처 대응도 못 하고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앞에 처박힌 것 같았다.

 

나는 뭐라 말도 못한 채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큰 사고가 나기 전에 차를 멈춰 세웠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더 깊이 잠들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전조등은 우거진 나무 사이로 난 길, 차 한 대 지나면 꽉 찰 듯한 좁은 산길을 비추고 있었다. 포장도로는 거기서 끝이었고, 앞에 놓인 산길은 앞서서 지나간 차가 만든 바퀴 자국 빼고는 풀이 잔뜩 돋은 험한 길이었다.

 

뒷좌석에 누워 자다가 좁은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현준이 부스스한 몰골로 일어났다.

 

“무슨 일이야? 사고 났어?”

 

“아냐, 아냐. 이제부터 산길인가 봐.”

 

나는 애써 태연한 척 대답했다. 그러나 식은 땀방울이 등줄기를 타고 주룩 흘러내리는 것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깜빡 졸았다가 계곡이 아니라 황천에 발을 담글 뻔했다는 말로 친구들을 놀래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 보자, 내비엔…… 얼마 안 남았네, 다 와 가. 5분만 더 가면 된대.”

 

다시 자리에 앉은 현준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근대 왜 이리 추워. 히터 좀 틀지 그랬어.”

 

“인마, 벌써 6월이야. 히터라니, 무슨 환자 같은 소리야.”

 

나는 창을 아예 활짝 열며 말했다. 이미 정신은 번쩍 들었지만, 찬 공기라도 쐬어야 운전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차가 산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아찔한 장면이 자꾸 눈앞에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재영이 너, 날 죽일 셈이냐.”

 

그때까지 대시보드에 엎드려 신음하던 수완이 일어나며 말했다. 이마에 불룩한 혹이 생긴 수완의 꼴은 안전띠를 매자는 공익광고에 나오면 적당할 모습이었다.

 

“6월이나 마나, 그놈의 이상기온인지 뭔지 때문에 추워 죽겠다.”

 

현준이 툴툴거리며 말했다.

 

“난 배가 고파. 고프다 못해 쓰려.”

 

찡그린 표정으로 이마의 혹을 만지던 수완도 등받이에 털썩 기대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나 혼자 죽을 고비를 넘긴 듯한 억울한 마음에 화난 듯 말했다.

 

“알았어, 이것들아. 계곡에 도착하면 불도 피우고 거기다 삼겹살도 굽자고, 됐어? 이 편안에 찌든 승객 놈들 같으니라고.”

 

그렇게 쏘아 주고야 불평하던 두 놈도 입을 다물었다.


비포장 산길을 오르는 동안 몇 번인가 바퀴가 구덩이에 빠져 헛돌았다. 놀이공원의 '타가다'라도 탄 듯 엉덩이가 들썩였다. 뾰족한 바위가 차 밑바닥을 긁는 소리가 날 때마다 선배의 얼굴이 환영처럼 눈앞을 지나갔다. 길가론 구름 낀 밤하늘과 맞닿은 듯한 키 큰 소나무들이 빼곡히 늘어서 있었다. 산길을 오른 지 5분쯤 지났지만 길은 갈수록 험해져 더는 차로 못 가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들어봐, 물소리다.”

 

수완이 내게 손짓을 하며 말했다.

 

차를 멈춰 세운 곳은 마침 산길의 끝이었다. 바닥엔 그 지점에서 돌아 나간 차들의 바퀴 자국이 보였다.

 

내가 먼저 내리고, 수완과 현준이 떠나기 전 마트에서 사온 물건을 들고 뒤따라 내렸다.

 

나는 달빛도 자취를 감춘 숲 속에서 희미한 휴대전화 불빛으로 사방을 훑었다. 물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풀숲을 헤치고 나아가자, 제법 너른 공터가 나왔다. 공터 한쪽으론 급한 비탈길이 있고, 그 아래에 상류의 폭이 좁은 계곡이 보였다. 덩치 큰 바위가 계곡 바닥 여기저기에 널렸고, 희뿌연 물이 어둠 속에서 그 바위들을 에워싸며 흐르고 있었다.

 

“여기 좋은 불판 있네.”

 

수완은 어지간히 배가 고픈 모양이었다. 두리번거리며 풀숲을 헤치더니 곧 뭔가를 찾아낸 듯했다.

 

수완이 찾은 돌, 마치 우리의 용도에 맞춰 누가 미리 준비해 놓은 듯한 넓적한 그 돌을 휴대전화 빛에 비춰보았다. 돌의 한쪽 면은 사포로 문댄 나무판처럼 편편하고, 반대쪽은 비스듬하고 울퉁불퉁했다. 비스듬한 쪽의 거친 단면을 보니, 어떤 더 큰 바위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사람이 깎은 돌 같은데? 무슨 대리석 바닥재 같아.”

 

현준이 말했다.

 

“좋지 뭐, 고기 굽기에 딱이잖아? 봐 봐, 기름 빠지라고 홈도 파 놨어. 기가 막히네.”

 

수완이 낑낑대며 바위를 들어 적당한 곳으로 옮겼다. 밑에 작은 돌멩이를 괴어 불 피울 공간을 만들고서 그 위에 편편한 돌을 올렸다. 고기를 놓을 자리는 소주를 들이부어 깨끗이 씻어냈다.

 

현준의 바지에 불이 옮겨 붙는 작은 소동이 있었지만, 그럭저럭 바위가 달아올랐다. 곧, 위에 올린 고기도 지글거리며 맛있게 익기 시작했다. 수완은 거의 육회를 먹듯 다 익지도 않은 고기를 허겁지겁 먹었고, 나와 현준도 씻지 않은 깻잎으로 고기를 싸 먹었다.

 

“거 봐, 역시 깻잎이라니까.”

 

현준이 마침내 자신의 주장이 증명되었다는 듯 말했다. 술에 취해 마트에 갔을 때, 우리는 깻잎이냐 상추냐 하는 문제로 우리끼리 목청을 높여 싸웠고, 결국 보안요원에게 떠밀려 쫓겨났었다.

 

“깻잎이 아니라, 고기가 좋은 거고, 불판이 좋은 거야. 돌이 숨을 쉰다고 하잖아. 이거 봐, 기름만 빨아들이고 수분은 그대로지? 텁텁하지도 않고 아주 환상이지 않냐?”

 

수완이 입에 한가득 넣은 고기를 우걱우걱 씹으며 말했다.

 

우리는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서로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심전심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 모닥불 빛을 받아 벌겋게 빛나는 얼굴들이 누가 쑤셔 넣듯 묵묵히 삼겹살을 삼키는 꼴이라니.

 

“산에서 밥을 먹으면 더 맛있는 이유가 나무에서 나오는 그 뭐라더라, 알파파 때문이랬나? TV에 나왔잖아.”

수완이 말했다.

 

“내 생각에, 알파파니 뭐니가 아니라, 우리 뱃속에 똬리 튼 거지 때문일 거야. 6년 전쯤에 들어와서 도통 나갈 생각이 없는 거지 말이야.”

 

내가 말했다.

 

“난 12년.”

 

현준이 출렁이는 뱃살을 두드리며 말했다.

 

수완도 따라 킥킥대다가 괴로운 표정으로 가슴을 쳤다.

 

“물.”

 

나는 수완의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낄낄대다가 옆에 놓인 마트 봉지를 뒤지며 물었다.

 

“우리가 물은 안 샀나?”

 

현준이 대답했다.

 

“아니. 샀는데 수완이가 마트 보안요원한테 집어던졌잖아. 거시기에 정통으로 맞던데.”

 

소주도 동났고, 새 고기를 밀어 넣어 막힌 가슴을 뚫으려는 시도도 실패로 끝났다. 수완이 가슴을 문지르며 답답하다는 듯 계곡 쪽을 가리켰다. 생각해보니, 염전에서 소금을 찾는 격이었다.

 

결국, 내가 빈 소주병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친 길을 내려가는데 술기운이 돌아 다리가 휘청거렸다. 까딱 잘못하다간 비탈을 굴러 계곡 바닥에 처박힐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무언가가 내 신경을 긁었다. 조금 전부터 왠지 모를 위화감이 들었고, 그 느낌은 물가로 내려갈수록 더 심해졌다.

 

계곡의 물소리. 적당히 차가운 바람. 어둠 속에서 군데군데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며 풍성한 머리칼처럼 부드럽게 흐르는 계곡물.

 

……부드럽게?

 

물이 아니었다.

 

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계곡 바닥을 빈틈없이 하얗게 메운 갈대였다. 물은 문자 그대로 단 한 방울도 보이지 않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밑에서 퍼석퍼석 마른 소리가 났고, 계곡 바닥의 큰 바위들도 바싹 말라 있었다. 일시적으로 수량이 준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물이 흐르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분명히 물소리를 들었는데…….

 

그때, 바람이 불어와 셀 수 없이 많은 갈대가 서로 몸을 부대끼며 춤을 췄다. 쏴 하는 그 소리는 영락없는 물소리였다. 갈대들의 파도 속에 선 나는 문득, 뭐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공포심이 뱃속에서부터 솟아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물이 흘러야 할 자리를 대신한, 마치 살아 있는 듯 파도 치는 갈대 무리. 유혹하는 듯한 가짜 물소리.

 

소주병을 그대로 팽개치고 왔던 길을 되돌아 허겁지겁 비탈길을 올랐다. 몇 번 미끄러질 때마다 등 뒤가 근질거렸다. 뭔가가 잡아끄는 기분마저 들었다. 내려왔던 길을 휴대전화 빛에 의지해 찾아 헤맸지만, 얼른 눈에 띄지 않았다. 희미한 빛이 겨우 디딜만한 자리를 찾아내 비추었고, 나는 쫓기듯 그 길을 올랐다. 곧 수완과 현준이 앉은 자리가 보였다…….

 

나는 입을 딱 벌리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수완과 현준의 형체가 불빛을 받아 일렁이며 내게 손짓을 했다. '뭐 해, 빨리 안 오고.' 잘 들리진 않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수완은 모닥불에서 조금 뒤로 물러나, 봉곳하게 솟은 땅에 비스듬히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그것은…… 무덤이었다.

 

헛것을 볼 만큼 마시지도 않았고, 오히려 소름끼치는 한기가 온몸에 내려앉아 정신이 또렷했다.

 

귀퉁이가 허물어지고 다듬지 않은 풀이 무성했지만, 그것은 분명히 무덤의 봉분이었다. 그 앞에 선 네모난 물건이 비석이라면 말이다.

나는 네발로 기듯이 나머지 비탈을 올랐다. 모닥불 앞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헉헉대다가, 도로 일어섰다


수완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물은?”


“너, 너희……. 헉헉. 당장 일어나. 헉.”

 

현준이 의아한 표정으로 젓가락을 놓으며 물었다.

 

“왜? 멧돼지라도 봤어?”

 

나는 말 대신 휴대전화를 들어 우리가 앉은 자리 뒤쪽을 비췄다. 수완이 기댔던 곳은 풀이 무성히 자란 무덤이었고, 그 앞의 오래된 비석은 한 귀퉁이가 납작하게 떨어져 나간 채였다. 더군다나, 하나가 아니었다. 옆으로 비슷한 크기의 무덤이 하나 더 있었고, 그 사이에 아주 작은 무덤도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어른의 무덤은 아닌 듯한 크기였다.

 

현준은 경기를 일으키듯 고함을 질렀고, 수완도 욕을 내뱉었다.

 

“뭐야, 여태 무덤 앞에서 밥을 먹은 거야? 젠장, 왜 아깐 못 봤지? 그냥 공터였잖아.”

 

수완이 말했다.

 

현준은 어둠 속에 떠오른 달처럼 하얗게 핏기가 가신 얼굴이었다.

 

“빨리 여길 떠나자. 재수 없게, 이게 뭐야…….”

 

내가 벌려 놓은 쓰레기 따위를 대충 치우는 동안 옆에서 발로 모닥불을 비벼 끄던 수완이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나는 영문 모를 상황에 놀랐다. 그러나 수완을 부축하던 현준까지 따라서 토하는 걸 보니 덜컥 겁이 났다. 그리고 곧, 무엇이 둘의 속을 뒤집어 놓았는지 깨닫고는 나 역시 참을 수 없는 욕지기가 치밀어 옴을 느꼈다.

 


희미한 온기와 삼겹살 냄새가 감도는 불판이 처음과는 달리 보였다.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돼지기름이 고인 홈이 일정한 유형으로 정교하게 파낸 모양이라는 것을. 마늘을 올려놨던 홈이 십자가 모양이라는 것을. 오목새김으로 쓰인 ‘김金’이라는 익숙한 한자를.

 

“망할 묘비에 고기를 구워 먹은 거야?”

 

내가 헛구역질을 하며 소리 질렀다.

 

“몰랐어. 너희도 몰랐잖아, 미친.”

 

수완이 변명하듯 말했다.

 

우리는 남은 음식을 챙길 여유도 없이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숲 속에 공터가 있는 것부터 곰곰이 생각해 봤어야 했다. 방치된 가족묘 앞에서 술판을 벌였으니, 제사를 지낸 셈인지도 모른다…….

 

다시 구역질이 났다.

 

차를 돌리다 작은 나무를 들이받았지만, 아무도 그런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수완과 현준은 숨을 몰아쉬다가도 문득 다시 생각난 듯, 창문을 열어 남은 음식물을 쏟아 냈다.

 

산길을 빠져나와 다시 포장도로로 접어들 때까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모두 충격이 가시지 않는 모양이었고, 잊을만하면 하나가 구역질을 시작해, 곧 전염병처럼 나머지 둘에게 퍼졌다.

 

시각은 9시 45분. 한층 깊어진 어둠이 도로를 뒤덮고 있었다. 가끔 안전운전을 당부하는 내비게이션의 목소리만이 적막을 깼다.

 

- 300m 앞, 우회전입니다.

 

구불구불 이어지던 길 끝에 갈림길이 나왔고, 나는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쪽으로 차를 몰았다……. 그랬다고 생각했다.

 

“야, 뭐 하는 거야!”


수완이 소리 질렀다.


“브레이크!”

 

위험을 감지한 내 판단이라기보다는 수완의 고함에 반사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러나 차는 한참을 더 미끄러졌고, 길바닥에서 자갈이 튀는 소리가 들렸다. 차 안은 비명으로 가득찼고, 수완은 쥐어짜듯 내 어깨를 붙들었다.

 

차 밑바닥이 큰 충격과 함께 땅에 부딪히는 느낌이 나면서 겨우 차가 멈춰 섰다. 비로소 정신을 차린 나는 차 앞유리 밖으로 내다보이는 광경을 믿지 못했다. 저 멀리 산 아래에서 점처럼 빛나는 마을의 불빛이 내려다보였고, 거기까지 내려가는 길이…… 없었다.

 

그저 허공이었다.

 

“이 미친놈아! 운전을 어떻게 하는 거야?”

 

수완이 소리 질렀다.

 

운전석 창문으로 밖을 내다본 나는 발바닥에 찌릿한 전기가 흐르는 기분을 느꼈다. 차는 절반쯤 절벽 밖으로 튀어나가 아슬아슬하게 걸린 꼴이었고, 앞바퀴가 허공에서 힘없이 헛돌았다. 바람이 흔들릴 때마다 차가 시소처럼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분명히 멀쩡한 길이었어. 분명히 봤는데…….”

 

내가 자신 없이 중얼거렸다.

 

“나, 난 내릴래.”

 

현준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미처 말릴 새도 없었다. 어, 어 하는 순간 현준이 뒷문을 열고 내렸고, 곧바로 무게중심이 급격하게 앞으로 쏠려 차가 기울었다.

 

“미친놈아! 네가 내리면 어떡해.”

 

수완이 악을 썼다.

 

수완과 나는 무너지는 균형을 맞추려 의자 등받이에 몸을 최대한 붙인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차는 벼랑 너머로 떨어지기 직전이었고, 보닛 위에 새똥만 떨어져도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슬아슬한 균형이 깨어질까 숨쉬기조차 어려웠다.

먼저 제정신을 차린 수완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정신 바짝 차려, 까딱만 잘못해도 우린 뒈져. 내가 뒷자리로 넘어갈 테니까, 너도 등받이를 최대한 뒤로 젖혀.”

 

나는 치과 의자처럼 등받이를 젖히며 조심스럽게 뒤로 누웠고, 덕분에 차가 조금 균형을 되찾은 듯했다. 수완도 나와 똑같이 의자를 눕히고, 철조망 아래를 지나는 군인처럼 ‘등포복’으로 슬금슬금 뒷자리로 넘어갔다.

 

수완이 최대한 차 뒤쪽으로 무게를 싣자 지면에서 떨어졌던 뒷바퀴가 땅에 닿는 느낌이 났다.

 

“젠장, 돌아가면 선배 발이라도 핥아야겠다. 포텐샤가 후륜구동이 아니었다면 우린 벌써 죽었어.”

 

수완이 반쯤 흐느끼듯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신호하면 천천히 액셀을 밟아. 절대, 한 번에 콱 밟으면 안 돼.”

 

몇 번 심호흡을 한 수완이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내 어깨를 건드려 신호를 줬고, 나는 발끝에 온 신경을 모아서 액셀을 밟았다. 세게 밟으면 깨지는 유리인 양 조심해서…….

 

엔진의 힘이 서서히 뒷바퀴로 전해지고, 조금씩, 조금씩 차가 뒤로 움직였다. 그러다가 굉음을 내며 바퀴가 헛돌 때는 그대로 숨이 멎는 듯했다. 영겁 같은 찰나가 몇 차례 지나고, 마침내 앞바퀴까지 땅에 닿는 느낌이 났다. 우리는 맥이 풀려 한참을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이 빌어먹을 자식아.”

 

수완이 주먹을 휘두르자 현준이 길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만 해.”

 

내가 수완을 잡아 말렸다. 현준은 우리만큼이나 낯빛이 하얬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를 멍한 표정이었다.

 

수완은 다시 차에 올라타고도 분을 못 이겨 씩씩댔고, 현준은 죄인같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상해……. 분명히 오른쪽으로 난 길을 봤어. 게다가 내비게이션도 그렇게 안내했고. 너흰 못 들었어?”

 

수완이 빈정대듯 말했다.

 

“술을 처먹었으니 헛것이 보였겠지. 괜찮아? 운전할 수 있겠어? 이번엔 어디 저수지에 꼴아박는 거 아니야?”

 

나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술기운은 망할 묘지를 봤을 때 깨끗이 달아났다. 어두운 길에 집중하느라 내비게이션 소리는 잘못 들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길이라 생각했던 곳이 거짓말처럼 허공으로 변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내비게이션은 전과 다름 없이 낭창한 목소리로 길을 안내했다.

 

- 500미터 앞, 좌회전입니다.

 

“그 내비게이션 때문이야.”

 

잠자코 있던 현준이 불쑥 말했다.

 

룸미러에 비치는 현준은 의혹과 두려움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나는 내 표정도 그럴 거란 생각에 겁이 났다.

 

나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물었다.

 

“무슨 소리야?”

 

“재수 없게, 죽은 사람 물건을 주워 와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그렇게 말한 현준이 고개를 들어 내비게이션을 노려봤다.

 

나는 아직 그런 현준의 헛소리에 덜컥 동의할 정도로 이성의 끈을 놓지는 않았다.

 

“진정해. 죽을 뻔했지만, 그냥 사고였잖아? 한밤중에 초행길을 가다가 겪은 일일 뿐이야. 아무 계획도 없이 와서 그래, 무덤도 그렇고……. 그러니까, 네가 선배한테 차가 어떻게 망가지고 긁혔는지 해명할 게 아니라면, 내비가 뭐 어쨌다느니……그딴 소리는 집어치워.”

 

그때, 잠자코 있던 수완이 끼어들어 말했다. 조금 갈라진 목소리였다.

 

“야……. 너희 방금 봤어?”

 

“뭐 말이야?”

 

“……경광봉 흔드는 경찰 인형 말이야. 그 왜, 길가에 진짜 경찰 대신 세워 놓는 거.”

 

나는 그런 걸 본 기억이 없었지만 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 봤어. 속도지키라고 세워 놓은 거 아니야? 근데, 그게 왜?”

수완이 땀이 밴 듯, 손바닥을 무릎에 문지르다 현준을 돌아봤다.

 

“그거…… 방금 처음 봤어?”

 

현준이 대답했다.

 

“……아니, 예전에 어디서 한 번.”

 

“바보야, 내 말은…….”

 

수완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오늘 이 길에서 그 인형을 처음 본 거냐고.”

 

현준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그저 고개만 저었다. 수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물었다.

 

“넌 그걸 두 번 봤단 말이야?”

 

수완의 미간이 깊게 팼다.

 

“그래, 두 번……아니, 똑같은 인형을 세 번 본 것 같아.”

 

“시골이잖아.”

 

내가 말했다.

 

“이런 한적한 길엔 미친 듯이 달리는 놈들이 꽤 많아. 일일이 단속하기엔 돈이 드니까 저런 걸 여러 개 세워 두는 거지.”

 

그러나 수완은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언성을 높였다.

 

“내 말 못 들었어? 비슷한 인형이 아니라…… 똑같은 인형이랬잖아.”

 

나도 현준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내가 자신 없는 투로 말했다.

 

“착각이겠지…….”

 

“왼쪽 팔이 떨어져 나가고, 뒤로 돌아간 머리, 경광봉이 부자연스럽게 허리 아래쪽에서만 까딱거리는 경찰 인형을 두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본 게 착각이라고?”

 

수완의 말에 나는 점점 머리가 아파져 오는 듯했다.

 

“정신없는 일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겪었잖아? 나도 그래, 전조등 불빛 너머에서 뭔가 자꾸 튀어나올 것 같단 말이야.”

 

내 딴엔 달랜다고 한 소리에 수완이 거칠게 반응했다.

 

“내가 술 취해서 헛소리나 하는 거 같아? 네가 낭떠러지로 차를 몰았을 때만큼이나 제정신이 아닌 것 같으냐고.”

 

머쓱해진 나는 아무런 대꾸를 못 했고, 어색한 정적이 흐르는 차 안에는 내비게이션의 안내 멘트만이 도도히 흘렀다.

 

- 500미터 앞, 좌회전입니다.

 

결국, 나도 짜증을 섞어 말했다.

 

“모르겠어. 인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고 싶단 생각밖에 안 들어. 그러니까 그런 얘긴 그만…….”


“잠깐!”

 

현준이 소리 질렀다. 현준은 눈을 크게 뜨고, 차가 나아가는 길 저 앞쪽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뭐라 말하려다 막힌 나는 현준이 가리킨 곳을 봤다. 어둠에 싸인 길가에, 수완이 설명한 그대로의 경찰 인형이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머리가 등 뒤로 돌아갔고, 왼팔은 알맹이 없이 옷만 나풀거리고, 경광봉을 든 오른팔은 뭐에 걸린 듯 원래의 움직임을 다 하지 못하고 좁은 간격으로 오르내렸다. 우리는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그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인형과 스쳐 지나가면서 등 뒤로 돌아간 얼굴이 보였다. 소름끼치게도, 우리를 비웃는 듯한 표정이었다.

 

“네 번째야.”

 

수완이 더는 두려움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이번이 네 번째라고. 저 빌어먹을 인형이 날 보고 웃은 게 벌써 네 번째라고.”

 

나는 눈으로 보고도 이 상황을 믿기 어려웠다.

 

“이 마을 사람들이 괴팍한 취미삼아 완벽하게 똑같은 팔 병신 인형을 대여섯 개나 세워 둔 게 아니라면…….”

수완이 말했다.

“우린 지금 똑같은 장소를 빙빙 도는 거야.”


일곱 번째에서 세는 걸 그만뒀다. 우리는 분명히 조금 전과 같은 곳을 지나고 있었다. 조금 전, 그 조금 전, 그보다 더 조금 전……. 모두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으니까. 갈림길에서 내비게이션이 지시하는 것과 다른 방향으로 달려도 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인가라곤 보이지 않는 길이었고, 그렇다고 누구 하나 이 어둡고 외딴 도로에 차를 세우자는 말도 못했다. 그러기는커녕 누가 말이라도 걸면 울음이 터질 듯한 분위기였다.

 

- 500미터 앞, 좌회전입니다.

 

“야, 근데 재영이 너…….”

 

현준이 정적을 깨며 말했다. 나는 바짝 긴장했다가 움찔 놀라 대답했다.

“응, 뭐?”

 

“……내비에 뭘 찍긴 찍었어?”

 

창밖으로 막, 열…… 네댓 번째 경찰 인형이 지나갔다.

 

현준이 고쳐 물었다.

 

“내비에 목적지를 어디로 찍었느냐고. 네가 내비 만지는 걸 못 본 것 같아서 묻는 거야. 너 잘 다루지도 못했잖아?”

 

나는 지난 기억을 되새겼다. 절벽에서 차를 끌어올리고,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 없었다. 분명히, 돌아가는 길을 내비게이션에서 찾은 기억이 없었다.

 

수완이 내비게이션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럼 이게 지금 어딜 안내하는 거야?”

 

모두 할 말을 잃었다. 내비게이션 화면으로 뻗는 현준의 손이 눈에 띄게 덜덜 떨렸다.

 

- 딩동, 목적지까지, 300미터, 남았습니다.

 

우리는 그 새로운 안내 문구에 서로 약속한 듯 마주 보다가, 내비게이션을 보고, 다시 전방을 바라보았다.

 

어둠만이 자욱하던 도로 위에 뭔가가 보였다.

 

거대한 무언가가 도로 한가운데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것은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차츰 제 모습을 드러냈다. 도로에서 흔히 보던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길게 멈춘 화물 트럭. 한쪽 바퀴가 허공에서 헛돌았고, 운전석 지붕과 화물칸의 무수히 많은 철창이 정면으로 보였다. 옆으로 쓰러진 화물 트럭 아래엔 원래 형체도 짐작 못 할 자동차가 사고의 흔적처럼 납작하게 깔려 있었다.

 

낮에 봤던, 바로 그 사고 현장이었다.

 

나는 홀린 듯 그 앞에 차를 세웠고, 현준은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중얼거렸다.

 

“저게 왜 여태, 저게 왜 여태, 저게 왜…….”

 

내가 겨우 목소리를 짜내, 나조차도 수긍하지 않을 말로 떠들어댔다.

 

“시, 시골이잖아. 치울 장비가 없었을 거야. 태평스런 시골의 일 처리란 게 원래 그렇잖아?”

 

아무도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때, 하늘에서 뭔가가 나풀나풀 떨어져 자동차 유리창 위에 내려앉았다. 나는 곧 그것이 뭔지 깨달았다. 연이어 몇 개가 더 떨어진 그것은…… 닭털이었다.

 

문득, 내비게이션에서 잡음이 흘러나왔다.

 

- 치직치직, 치직.

 

차 안은 한겨울처럼 싸늘한 공기가 감돌았고, 숨을 쉬면 입김이 나올 것만 같았다. 우리의 눈길이 일제히 내비게이션을 향했다.

 

- 전방에, 치직치직.


내비게이션은 신호 없는 주파수를 오가는 라디오처럼 지직거리는 잡음을 쏟아냈다. 그러더니 곧, 여자 성우의 목소리가 늘어져 굵은 남자 목소리로 들리는 소리가 튀어 나왔다.

 

- 전방에, 치직, 길이, 치직, 없습니다. 치직, 길이, 치직, 없습니다. 치직, 길이, 치직, 없습니다…….

 

“이, 망할!”

 

수완이 주먹으로 내비게이션을 후려쳤다. 앞유리에서 떨어져 나간 내비게이션이 대시보드 위를 세차게 뒹굴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되풀이해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빨리 이 개 같은 걸 창문 밖으로 집어던져!”

 

수완이 소리쳤다.

 

나는 창문을 내리고, 떨어진 내비게이션을 주워 던지려 했지만, 시거잭에 꼽힌 전원선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안 빠져!”

 

시거잭 구멍에 꽂힌 코드는커녕, 내비게이션 본체 쪽에 연결된 코드도 뽑히지 않았다. 전원선 그 자체가 마치 양쪽을 잇는 단단한 밧줄이라도 되는 양, 내비게이션과 시거잭을 연결한 채 좀처럼 뽑힐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잘라 버리면 되잖아! 망할! 선을 잘라 버리라고.”

 

수완이 글로브 박스를 뒤지며 말했다.

 

“여기 날카로운 게 있어!”

 

현준이 소리쳤다. 뒷자리 바닥의 잡동사니 중에서 뭔가를 주운 모양이었다.

 

그 혼란 속에서 나는 문득, 내비게이션에서 되풀이되던 소리가 멈췄다는 걸 깨달았다. 내비게이션을 차에서 떼어 내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아무도 깨닫지 못했지만, 더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내비게이션을 들어 화면이 보이게 돌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화면이 바뀌며 어떤 영상이 흐르기 시작했다. 지도 화면이 아니라 동영상이었는데, 차 안에서 전면 유리창을 통해 전방을 찍은 화면이란 걸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이거…… 블랙박스 영상 같은데?”

 

현준이 말했다.

 

화면은 대낮의 시골길을 비추고 있었다. 차는 달리는 중이었고, 카오디오에서 경쾌한 음악이 흐르는 듯했다. 아이의 목소리가 그 음악에 맞춰 노래를 불렀고, 어른 남자 목소리는 누군가와 전화로 대화 중인 듯했다. 우리의 눈엔 화면 저 끝에서 마주 오는 화물차가 중심을 잃고 비틀대는 광경이 보였지만, 차 안의 누구도 그 일을 깨닫지 못한 듯했다. 한번 크게 휘청거린 트럭이 비스듬히 기운 채 미끄러지듯 중앙선을 넘었고, 곧 화면을 가득 메우며 이쪽으로 닥쳐왔다. 뒤늦게 여자가 비명을 질렀지만, 큰 충격음을 끝으로 화면이 어두워진 뒤로는 그마저도 들리지 않았다.

 

내비게이션 화면에서 천천히 고개를 든 나는, 창 밖에서 그 화면의 결말을 보았고, 백미러에 비친 현준의 모습에 경악했다.

 

“그, 그게 뭐야?”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 왜, 그걸 들고 탄 거야?”

 

현준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제 손에 든 것을 내려다보곤 펄쩍 뛰었다.

 

“뭐야! 이 게 왜 여기 있어?”

 

현준이 뒷자리 바닥에서 주워 내비게이션의 줄을 자르라고 내게 건네주려던 것은 처음 내비게이션을 발견했을 때 거기 붙어 있었던 센터페시아 조각이었다.

 

“네가 들고 탄 거야?”

 

“미쳤어? 이걸 내가 왜?”

 

그때, 전선을 이로 물어뜯던 수완이 현준의 손에서 그 조각을 낚아챘다. 센터페시아 조각의 날카로운 부분을 톱 삼아 내비게이션의 전선을 썰기 시작했다. 미친 듯이 긁어대자 그제야 그 단단하던 전선의 피복이 벗겨져 구리선이 드러났고, 곧 완전히 끊어졌다. 수완은 내 몸 위를 지나 열린 운전석 창문으로 내비게이션과 센터페시아 조각을 집어던졌다. 그것들은 도로에 떨어져 구르다가 화물차 밑의 틈새로 사라졌다.

 

“밟아!”

 

수완이 소리 질렀다.

 

나는 속도계의 바늘이 100을 넘을 때까지 엑셀에서 발을 떼지 않았다. 절대 백미러를 보지 않고 오로지 전조등이 비추는 전방만 보려 애썼다. 뒤를 보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게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몇 차례 갈림길에서 아무 기준도 없이 차를 몰았다.

내비게이션이 사라진 지금, 어디로 가야 할지 아무도 몰랐다.

Comments

G 2022.03.08 10:32
한밤중 오지 산악도로에서 네비가 안내해주는 경로를 벗어나면 혼비백산을 경험할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