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효도와 충(忠)과 효(孝)에 대한 잘못된 상식

부모님 효도와 충(忠)과 효(孝)에 대한 잘못된 상식

G 너나들이 0 3,911 2021.06.24 04:29

정신과든 상담소든

폭행, 언어폭력, 방임, 수탈하는 부모를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볼 수 있다.

폭력 수준은 아니더라도

번번히 멘탈을 털고 조각내 버리는 부모!

그러나 떠날 수도 없는 그들의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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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많은 문화권에 영향을 주고 있는 사상은

서양은 헤브라이즘과 헬리니즘 동양은 음양오행이다.

헤브라이즘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원형이며

음양오행은 유교, 도교의 바탕이 되며 오랜 세월을 흐르며

불교와도 결합되었다.

헤브라이즘은 르네상스 이후 많이 약화되긴 했지만

아직 많은 문화의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헤브라이즘의 지표라고 할 수 있는

모세의 십계명은

1~4까지는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정의하고

5~10까지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정의하고 있다.

그 인간관계의 첫 번째인 5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다.




유교는 ‘충효’가 중심이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현존하는 대분의 종교에서 가장 중요

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주군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 이다.

주군은 때로는 임금, 때로는 신, 때로는 신의 대리자 이지만

이름만 다를 뿐 절대 권력을 상징한다.




왜 절대 권력을 부모와 동일 시 했으며

이에 대한 충성(효)를 왜 이렇게 강조해 왔을까?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이렇게 강조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본성을 거스르는 복종이며

즉,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통치 수단이었던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에 대한 두려움

내 보호자인 부모에 대한 사랑 이것을 결합하고

잘 포장하면 권력자에 대한 복종과 충성을

쉽게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천년간 인류에게 강요되어

온 ‘효’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래서 폭행, 언어폭력, 방임, 경제적, 신체적 수탈하는

부모를 떠나지 못하며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역사방 게시판만 보아도 이것을 주제로 수많은 상담이

올라온다.




그럼 ‘효’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

예수의 비유 중 모두가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예수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한 후

누가 이웃인가의 정의를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내린다.

'강도를 만나 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 혈족이라

굳게 믿은 레위인과 사제는 그냥 지나쳤다.

그러나 이민족, 이교도라 적대. 무시했던 사마리아인은

그를 적극적으로 구해준다.

강도 만난 사람에게는 이민족인 사마리아인이 이웃이다.'



그럼 누가 내 부모일까?

당연히 나를 낳아 준 사람이 아닌 내게 사랑을 베푼

사람이다. 그러나 예수의 비유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가서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로 끝을 맺는다.




다시 가족관계에 대입을 하면

나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에게 연연하지 말고

내 자식에게 사랑을 베풀면 되는 것이다.

입양이 가능한 배경이기도 하다.




서양이 동양 보다 먼저 발전을 시작한 이유는

헤브라이즘 이데올로기에 사로 잡혀있는 것이라 아니라

예수의 사상을 받아드리고,

르네상스로 헬레니즘의 인간중심 사상도 받아드려

다양성을 인정했기 때문은 아닐까?





유교에도 폭력이 된 효에서 벗어날 논리가 있다.

身體髮膚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신체발부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

부모에게서 받은 몸을 소중히 여겨 함부로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바로 효도의 시작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

(입신행도 양명어후세이현부모 효지종야)

몸을 세워 도를 행하고 후세에 이름을 날림으로써

부모를 드러내는 것이 효의 끝이다




효경의 첫장에 실려있는 구절이다.

내 몸과 정신을 건강하게 해서 사회 구성원으로써

바르게 사는 것이 효도이지, 맨탈 부서져 가며, 부부싸움

해가면서 그 자녀들까지 불행하게 만들며

부모 봉양하는 것이 효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두 사상 모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나의 건강이고 행복이다.”

내가 건강해야 이웃도 돌보고 가족도 돌보며,

부모도 돌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내가 건강해 질 수 있을까?

건강과 행복의 비결 = 부모와의 관계 정립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기도 하지만

정신이 건강하지 못하면 신체도 병든다.




무서우면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소름이 끼치며

동공은 확대되고 심장은 빨리 뛴다.

이렇게 심리적 요인으로 뇌가 움직여 신체가 반응하는데

쉬운 예로 스트레스성 위염이 있다.

스트레스라는 심리적 요인으로 신체에 염증이 실제로

발생한다. 이런 현상이 심해지면 ‘신체형 장애’가 된다.

더 흔하게 보는 예로 등교하기 싫어 배가 아픈 것이다.

절대 꾀병이 아니며 실제 통증을 느낀다.

화병도 이에 한가지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만병의 근원이라고 하는 것이다.




보통 심리 상담은 부모와의 관계를 조사하고

그 관계에서 원인을 찾는다.

그 관계가 건강하면 웬만한 문제는 이겨낼 수 있고,

쉽게 해결방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수많은 복잡함을 가지고 있는 부모자식의 관계를

어떻게 하면 새롭게 정립할 수 있을까?




명제를 다시 세우고 그 기준을 가지고 보면

아주 간단하게 해결 된다.




모든 부모가 자식을 사랑할 것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고

내 부모가 나를 사랑해줄 것이란 믿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내 부모도 그저 자신의 안위가 최우선인 이기적인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부모이기 때문에 모든 걸 희생해서 자식에게 주고

자식이기 때문에 그걸 당연히 받아야 한다.“ 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것을 전제로 케이스를 보자




case1.

방임 또는 냉정한 부모

"낳았으니 먹여주고, 재워주고 의무교육 받게 했으면

됐지! "하는 유형




위에 말한 기대가 있기 때문에 주지 않는 부모에게

서운함과 원망과 갈구하는 마음이 생기고,  그 마음

때문에 심리적 갈등이 생기고 병이 되는 것이다.

따뜻한 보살핌, 희생이 부모의 역할이라는 환상을 버려라

그건 권력자들이 인구를 늘릴 방편으로 세운 책략일 뿐!

나는 나 스스로 돌본다.

그리고 나를 보살펴 줄 따뜻한 사람을 원한다면

댓가를 기대하지 말고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 줘라’

그것만으로 충분히 따뜻해질것이다.

사랑은 하는것이 더 행복할 수 있다.



case2.

폭언, 폭행, 학대하는 부모

자식을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생각하는 부모

낳았으니 책임은 져야하는데 이런 동물적 본능도

져버리는 부모는 과감하게 손절해라

손절= 손해 보더라도 빨리 버리는 게 이익

미성년이면 학대의 증거를 모아 고발하고

성년이면 빨리 집을 떠나 인연을 끊어라.

경제적인 이유로 참고 있다면 내 정신을 깎아 돈으로

바꾸는 어리석은 짓이다.




case3.

끊임없이 효도를 강요하는 부모

“내가 너를 키우느라...........” 로 시작하는....

낳은 것은 부모의 선택, 키우는 것도 부모의 선택

희생도 부모의 선택이었다. 거기에는 자식의 의견은

단 0.0001%도 없었다.

그러니 부모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지

그걸 자식에게 강요할 수 없다.

그리고 강요하는 순간, 자식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은 부모가 아닌 채권자일 뿐인 것이니

자신의 선택에 책임진 것뿐인데 빚쟁이처럼 군다면?

마치 교통사고 가해자가 치료비 등 보상해주고 나서

이제 건강해졌으니 갚으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러니 자식 입장에서는 무시해도 된다.







그럼 효도는 안 해도 되나?

결론만 말하면 안 해도 된다!


그래도 효도가 하고 싶은가?

그럼 해라!

그 대신 나의 선택이니 댓가는 바라면 안 된다.




case4. 그래도 효도가 하고 싶어요.

그런데 우리 부모는 내가 하는 것으로는 절대 만족

못하는데 어떻게 해요...




내가 주는 것으로 만족 못해 불행한 건

그들(부모)의 문제지, 내 문제가 아니다.

그들의 욕심이 과하고, 그들의 마음이 삐뚤어진 것이지

내 잘못이 아닌 것이다.



부모와 나는 일심동체가 아니고, 부속물도 아니고

독립된 인격체이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나의 최선을 다 하면 되는 것이고

그들의 만족과 행복은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인 것이다.





세상이 위의 사례처럼 단순하면 좋겠지만

너무 복잡하다고요?

그렇지 않아요.

나와 부모를 분리하고 그것을 전체로 상황을 판단하면

해결방법이 나옵니다.

물론 그 해결방법을 실행해서 완전히 해결되기 까지는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그 때 사주가 필요한거에요.


어떤 사람은 멀리 떨어져야하고

어떤 사람은 붙어서 싸워야하고

어떤 사람은 배우자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어떤 사람은 병원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 외에도 원인과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죠...


모성환상

“모성 환상” 이란 말이 있다.

모성은 본능이다. 모성은 위대하다. 모성은 절대적이다.

등등 여러 가지 말로 모성을 찬양하는 듯 얄팍하게

포장하여 시대와 문화를 가리지 않고 엄마의 희생을

강요해 왔다.




모성은 본능일까?

모성은 자신의 생명을 지키려는 본능에 우선할까?

본능에 충실한 것이 인간다움일까?




그동안 연구되어 온 사실을 이야기하자면 끝이없으니

그냥 결론만 말하자면


-모성은 유전자를 남기기 위한 생존전략이다.

-모성은 자신의 생명에 우선하지 않는다.

  단, 유전자를 남기기 유리한 쪽을 택한다.

-본능에 충실한 것은 동물다움이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엄마의 희생은 사회적

산물일 뿐, 본능이 아니라는 것이다.




갓 태어난 아이를 보고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고 내가

이상한 것은 아닌지 불안해 할 필요가 없다.

모성이 강하지 못하다고 비난을 해서도 안 된다.

사람은 그렇게 태어났고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희생적으로 자녀를 돌보는 어머니들이

칭송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본능을 거슬러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어머니의 사랑을 칭송하기 시작했는데

언젠가부터 그걸 엄마를 옥죄는 족쇄로 사용하기 했다




그 피해는 자신의 삶을 희생하지 못해서 비난당하는

어머니와 지나치게 희생해서 나 자신을 잃은 어머니만

입는 게 아니라 그 자녀들이 더 크게 입는다.




엄마의 희생을 받지 못한 자녀들은 허전함에

허덕이고, 타인과 비교하여 질투와 불만에

시달린다. 희생을 받고 자란 자녀들은 과도한

부채감에 시달리게 된다.




그럼 뭐, 아이를 낳아 놓고, 모성 없이 어쩌라고???




낳은 건 누구의 선택인가?

아이의 선택이 아니라 부모의 선택이다.

아무리 생명이 신의 섭리라고는 하나

중세도 아닌 현대에는 결국 부모의 선택이다.




모성이 아닌 인간다움으로 자신의 선택에 대해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내 판단과 행위의 결과로 한 생명을

세상 밖에 내 놓았으면, 온전히 사회 구성원으로서

바르게 살 수 있도록 기르고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동물도 자신의 새끼가 스스로 먹이를 구하고

살아나갈 수 있을 때까지는 보살핀다. 또, 집단 생활을

하는 동물들은 먹이 해결 외에 그 집단에 잘 적응하는

기술도 가르친다. 그러니 인간이  그 책임을 다했다고

칭찬을 받을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서 때로는 생명을

걸고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며. 너무나 힘든 것들을

겪어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안위롤 포기하는, 본능에 반하는

행동을 했을 때 우리는 위대하다고 하며

위인, 의인이라고 칭송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희생에 대하여 감사와 보은을 해야 하는 것이다.




반대로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그냥 본능에 충실한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위대하지 못하다고 원망도, 비난할 필요도 없지만

대신 보은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왜 우리 엄마는 날 버리고 갔을까?

왜 우리 아버지는 가족을 돌보지 않을까?

원망하거나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그냥 본능에 충실했을 뿐이다.




본래 희생은 고대 제례에서 나온 말이다.

산 동물을 죽여 신께 바치는데 그 동물을 희생이라

부른다. 그 희생을 받치는 이유는 신에게 원하는 게

있기 때문에다. 즉, 희생에는 댓가가 따른다.




댓가를 지불해야 하는, 나를 위해 희생한 부모가

없으니 오히려 자유롭지 않은가....

그들에게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살면 된다.




지금 부모이거나 부모가 되실 분들은

다음 말만 기억하자.

* 내 선택에 책임을 지지 않는 인간은 사회에서 배척이 된다.

* 과도한 희생은 자녀에게 채무를 지우는 일이다.

* 위인은 댓가를 바라고 희생하지 않았기에 칭송받는다.

요점만 정리하면




- 희생적 모성은 환상이다.

  부모는 신이 아닌 부족한 인간일 뿐이다.


- 효는 권력자들의 필요에 의해 충과 결합되며

  과장되고 변질되었다.

- 자식에 대한 사랑은 내 선택에 대한 책임과 의무

  내 선택에 따른 의무를 다 한 것을 생색내지 말자.

- 효는 희생적인 사랑에 대한 보은

  자신을 희생한 의인에게 존경과 감사를 해야 함





‘모성환상’, ‘지배체제 강화 수단인 효’는

제가 처음 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여러 나라의

여러 학자들이 연구한 주제이니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찾기 귀찮으신 분들을 위해 짧게 이야기하면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을 눈동자 같이 지키신다.’

‘자신의 생명을 받쳐 죄에서 구원하신다.’

‘독생자를 희생제물로 주셨다. ’

등등의 표현이 나옵니다.

그리고

‘너희도 이와 같이 서로 사랑하라’ 했습니다.




신의 희생적 사랑을 받았으니

이를 본받아 가족, 이웃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간혹 사랑을 받았으니 복종해야 한다고 착각하는 분들이

계신데 이게 충성에 이용되며 변질된 부분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받았으니 복종하라’는 말은 없습니다.

다만 '다 너희 잘되라고 하는 일이니 제발 말 좀 들어라

전지전능하신 분이 어련히 알아서 할까. 그러니 믿고

맡겨라.' 라는 뜻의 이야기가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인간 부모는 전지전능하지도 않고, 한치 앞도

못 보고, 때론 이기적이기도 하니 ‘절대복종’을

할 필요는 없죠.

효경이나 불경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어요.

더 궁금하신 분을 위해 추천 드릴만한 책이 있나 찾다

보니 효경을 도올선생이 쉽게 풀어놓은 것이 보이고

‘폭력의 기억,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란 책도 있어요.




부모라는 본능만으로는

자식을 눈동자 같이 살피지 못합니다.

그건 신의 능력이지 나약한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나의 부모의 무능함을 너무 원망하지 마세요.




그렇다고 신도 아닌데 절대 복종을 할 필요는

없지요. 신도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줬는데...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안위가 우선되는 권리입니다.

내 안위와 행복을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사례~

부모님을 만나거나 전화 통화만 해도 몇 날 며칠 동안

속이 메슥거리고 머리가 아픈 분들!

심하면 진상 고객에게 사과 전화를 해야만 하는 직원과

같은 심리상태가 됩니다.

이런 분들은 어려서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을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자식을 위해서’라는 미명하에

‘부모의 만족을 위해서’였을 확률이 높아요.

그래서 자존감이 낮고, 그래서 부모를 끊어내지도 못하고

그래서 부모의 말 한마디의 영향이 크죠.




부모님을 만나거나 전화를 받으면 화, 짜증이 나는 분.

부모님께 줘야 하는 게 내 능력 밖일 때가 많죠.

그게 돈일 수도, 시간일 수도 그 외 무엇이든

받은 것보다 줄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때로는 받은 것이 학대, 폭력뿐인 경우도 있죠.




위 두 경우 모두

심신이 건강한 상태가 아니라는 겁니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타인을 돌볼 수 없습니다.

제때 치료하지 못하면 점점 중병이 됩니다.

내가 병들면 부모와 배우자. 자식도 슬프고 힘들어집니다.

내 건강의 회복이 우선입니다.




병을 치료하는 방법은 화학요법과 물리치료 심리치료

등이 있습니다. 화학은 약, 방사선 등이고, 심리치료 중

으뜸은 환자의 의지죠. 더불어 식이요법을 비롯한

생활환경 개선도 꼭 필요하고요.


어떤 병이던지 위의 모든 방법을 적절하게 함께 써야지

한 가지만 가지고 치료되지 않아요.




병의 기준은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는가?”입니다.

같은 증세도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으면 치료를 안 하고

있으면 치료를 권합니다. 물론 향후에 지장을 줄 것을

예측해서 치료를 시작합니다.




치료는 병의 원인을 제거하고 회복이 되게 합니다.

총상이면 총알을 제거하고, 꿰매어 새살이 나도록 하고,

PTSD면 현재는 그 외상에서 벗어나 안전한 상태임을

인지시키는 게 치료의 시작입니다.




부모로 인하여 심신이 괴로워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다면

치료가 필요한 상태입니다.

치료가 시작되려면 부모로부터 거릴 두고 내 마음의

상태를 돌보아야 합니다.

부모에게 계속 찔리고, 다치고, 착취당하면서 내 마음이

건강해지고 제대로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저는 위염을 30년이 훨씬 넘는 세월을 달고 살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낫는지 방법도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매운 음식, 카페인, 스트레스, 불규칙한 생활

이걸 모두 끊을 수는 없지요.

하지만 심해지면 약도 먹고, 저런 모든 것도 끊고

정시에 정량을 먹으려 노력하죠.

한동안 그렇게 생활하면 괜찮아져요.

하지만 통증이 가시고, 아픔의 기억이 희미해지면

다시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고

잠시 후면 병도 돌아오죠,  




부모와의 관계도 비슷한 것 같아요.

정 힘들면 마주치는 횟수를 줄이세요.

그걸로 해결이 안 되면 관계를 단절하세요.

그래도 해결이 안 되면 상담 치료도 받아 보세요.

심하면 정신과 약도 도움이 돼요.

그렇게 지내면서 내가 건강해지고 일상이 돌아오면

나와 부모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만큼

마음의 여유가 생겨요.

그렇게 회복이 되면 그때 부모님과 다시 만나세요




사례 1

제 지인은 어머니가 독설 가에요.

이 사람은 너무 착해 엄마 감정의 쓰레기통 역할이었죠.

그런데 이 사람도 힘든 일이 생겼어요.

그러니 엄마를 받아 줄 수 없었죠.

너무 힘들어하기에 이사를 권했어요.

이사할 형편이 안 돼서 저랑 작전을 짰어요.

직장을 옮겼다. 그래서 이사를 했다.

낮에는 상사 눈치 때문에 연락이 어렵다.

거짓으로 알렸죠.

어쩌다가 통화가 연결되면 바쁘다고 후딱 끊어

엄마가 말씀할 틈을 안 주었어요.

방문은 올케나 제부가 있는 시간에만 하라고 했고요.

엄마가 저 두 사람 앞에서는 체면상 말을 조심하니까

그렇게 한 3년 피해 다녔죠.

그 사이 그 사람의 상황은 해결되고 엄마를 어느 정도

심리적으로도 감당할 만큼 회복이 되었죠.




사례 2.

또, 다른 사람은 아버지가 알코올중독이에요.

성인이 되자, 엄마에게 ‘난 인연을 끊을 것이다.

같이 하던지 나와도 인연을 끊자’ 했데요.

어머니와 아버지를 이혼시키고,

본인은 물론 어머니 이름도 바꿨답니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가 스스로 중독치료시설로

들어가셨데요.

시설에서 나오면 바로 잠수탈 거라 경고 하고

가끔 찾아뵙고 용돈도 드리지만 절대 전화번호와

이름은 안 가르쳐 드린답니다.

연락할 일이 있으면 공중전화로 한다네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중독과 폭력은 인연을 확실하게

끊어야 합니다. 남편이든, 자식이든, 부모든

아니면 다 같이 침몰하는 겁니다.




부모와의 관계를 바로 세우고 효도하는 방법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방법의 시작은

나의 마음과 일상의 건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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