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압) 부산 해운대

(스압) 부산 해운대

G 미나래 1 6,839 2021.06.04 21:23

세상에는 우리의 상식이나 과학적 지식만으로는 명쾌히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적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것이 언제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느냐 하는 것일 뿐, 우리가 가진 사고의 틀 안에서 그것이 적절히 해석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애당초 고려의 가치가 없는 문제다. 지금 내가 꺼내고자 하는 이야기 역시 이러한 종류의 것으로서 보통의 기준에서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기이한 경험담이다. 지금은 각자의 위치에서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나의 세 친구들은 이 일을 까맣게 잊고 지내는 듯싶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전모를 알 수 없는 그 미스터리한 사건에 대한 기억을 생생히 가지고 있다. 때는 2006년. 우리나라가 독일월드컵 16강 진출에 실패하고, 롯데월드에서 놀이기구 추락사고가 발생했으며, 북한이 처음으로 핵실험을 강행한 해였다.
 

 그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사람들은 저녁이면 근처 공원이나 개천으로 피서 아닌 피서를 나가곤 했다. 몇 주째 타들어가는 듯한 날씨가 이어져 폭염주의보가 내리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야외활동을 하다 열사병으로 사망하는 사례도 급증하는 추세에 있었는데, 당시 대학생이던 나는 이미 기말고사를 마치고 달콤한 방학을 즐기는 중이었다.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냉방이 잘 돼 있는 술집에서 맥주나 들이키며 추억을 안주 삼는 것. 이것이 나와 내 친구들이 그때 할 수 있는 모든 일이었으며, 어쩌면 그때 했어야 할 유일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사건의 발단은 여느 때와 같이 네 명이 모여 단골술집 <부리부리>에 간 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 중 유일하게 지방으로 대학을 간 동민은 치킨을 집어먹던 중 갑자기 바다에 가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한창 지루한 나날을 보내던 우리는 섞어 먹은 소주와 막걸리의 취기에 힘입어 단번에 “가자!”라고 의기투합 했다. 목적지는 바다 하면 금세 떠오르는 해운대. 그때는 지나가는 말로 툭 던지고 아무 생각 없이 휙 동의한 것이었지만, 막상 얘기를 꺼낸 이상 여행계획 수립은 모두 동민의 몫이었다. 교통편과 숙소에서부터 유명 관광지에 이르기까지 나는 물론이고 세 명 모두 부산에 가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이었다. 어영부영 지내다 보니 출발날짜는 어느새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8월의 어느 월요일, 우리는 각자 배낭을 챙겨 메고 서울역 승강장에 모였다.
 

 서울을 출발해 해운대 근처에 미리 예약해 둔 펜션까지 찾아가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경비를 아낀다고 장장 여섯 시간에 걸쳐 무궁화호를 타고 온 것만 제외하면 지하철과 택시를 이용하여 중간에 헤매지 않고 비교적 편하게 도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다에 가까워지자 조금 내린 택시 창문 사이로 짭짤하고 비릿한 바람이 밀려들어왔다. 아무래도 남쪽이라 그런지 서울보다 더 덥고 습한 듯했지만 눈앞에 펼쳐진 백사장과 시퍼런 바다에 우리는 이미 넋을 놓고 있었다. 사전에도 없을 법한 희한한 감탄사를 연발하며 빨리 물에 들어가고 싶다고 설레발을 치는 우리 모습이 유치해보였는지 기사 아저씨는 허허 웃을 뿐이었다. 마침 택시의 내비게이션이 <해운비치펜션>에 도착했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안내를 종료했다.
 

 요금을 지불하고 택시에서 내린 우리 앞에 우뚝 선 건물은 도저히 ‘펜션’이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았다. 그건 그냥 5층짜리 여관이었고,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해운비치모텔>로 족했다. 성수기라는 명목으로 하루 육만 원씩이나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인가 하는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기대와 현실이 다른 데서 오는 혼란과 실망감을 뒤로하고 204호실 열쇠를 건네받은 명진을 따라 우리는 층계를 올라갔다. 방 번호가 붙어 있어야 할 자리엔 그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 본드를 덧칠했으리라 짐작되는 곳엔 검은 자국이 흉하게 드러나 있었다.
 

 「야, 이게 뭐냐? 이게 바다가 보이는 전망 좋은 방이냐?」
 

 문을 열고 처음으로 숙소에 들어간 명진의 불만 섞인 토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바다를 보기 위해 창문 밖으로 고개를 쭉 내밀어봤자 방파제 끄트머리의 파도 거품이 보일 듯 말 듯 했던 것이다. 언덕 변에 줄줄이 늘어선 벽돌집이나 보이는 방이 전망이 좋다니….
 

 「예약을 해도 꼭 지 같은 데로 해요. 여기 지은 지 이십 년은 된 것 같다, 야.」
 

 지석도 방을 슥 둘러보더니 애꿎은 동민을 나무랐다. 사실 낡고 낡지 않고를 떠나 건물의 구조와 층수 표기법이 헷갈리긴 했다. 경사로에 지어져서 그런지  일층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횟집은 B1로, <해운비치펜션>의 로비와 객실이 시작되는 이층은 1F로 표기돼 있던 것이다. 물론 입구는 횟집과 펜션이 따로 있었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언덕 위에 걸쳐져 있는 펜션 입구보단 횟집 옆의 것을 사용하는 편이 가깝고 좋았다. 어찌됐든 시간은 오후 세 시가 다 되어갔고, 우리는 해가 저물기 전에 일 초라도 더 오래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자 짐을 풀고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이게 영국식 건물이라 층 표기가 이렇다는 둥, 이런 곳이 펜션이란 간판을 달고 영업하는데 동사무소에선 뭐하냐는 둥,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반바지로 갈아입으려던 찰나였다.
 

 「철컥! …똑똑똑」
 

 갑작스런 문고리 돌리는 소리와 노크에 우리는 일제히 하던 행동을 멈추고 문을 바라봤다. 다행히도 방에 들어오며 우리 중 하나가 잠근 모양인데, 밖에 있는 게 누가 됐든 옷 갈아입는 걸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스쳐갔다. 누굴까 하는 궁금증은 그 다음으로, 내가 문에서 제일 가까이 있었기에 나는 도어룩을 통해 누가 온 건지 보려고 했다.
 

 「야, 누구야? 주인아저씬가?」
 

 성질 급한 명진이 물어왔다.
 

 「좀 기다려봐. 어… 이거 고장난 것 같은데?」
 

 나는 도어룩을 통해 밖을 보려고 했지만 정말 고장이 났는지 아니면 반대편 구멍이 무엇엔가 덮여 있는지 보이는 거라곤 시커먼 어둠뿐이었다.
 

 내가 그렇게 도어룩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나야. 문 좀 열어줘.」
 

 하는, 젊은 여자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문을 열어달라고 하는 목소리의 억양이 마치 자기 방이라도 되는 양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그래서인지 나는 누구냐고 물어보기에 앞서 문을 먼저 열어줬고, 거기에는 또래로 보이는 가벼운 차림의 아가씨가 서 있었다. 그녀는 날 보더니 꽤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나 역시 바지 벨트가 풀어져 있다는 걸 깨닫고 적잖이 당황해 고개만 배꼼 내민 채 물었다.
 

 「누구… 시죠?」
 「아, 죄송한데, 혹시 여기 방 번호가 어떻게 돼요?」
 「300… 아니 204호요.」
 

 나는 잠시 이 빌어먹을 건물의 층수를 착각해서 304호라고 대답할 뻔했다가 바로 정정했다. 그 여자는 처음 몇 초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 있다가,
 

 「아… 제가 위층인데 잘못 찾아왔나 봐요. 하하, 헷갈려서… 실례했습니다.」
 

 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돌아가는 것이었다. 나 역시 충분히 그럴 수 있겠구나 싶어 예, 하고 문을 닫았다. 확실히 이 건물은 특히 숙박업을 한다는 점에서 이런 일이 종종 있을 것 같았다. 멍청한 건물주 같으니라고. 아니나 다를까 방금 걘 어땠냐는 친구들의 빗발치는 질문이 쏟아졌고, 나는 그냥 그랬다고 시큰둥하게 답하며 다시 반바지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렇게 채비를 갖춘 후 우리는 다투듯 펜션을 빠져나와 바다로 달려나갔다. 잔뜩 데워진 백사장에 발이 따갑긴 했지만 그런 데 신경을 쓸 겨를은 없었다.
 

 바다에 몸을 담근 건 오후 네 시경이었다. 바다에 와서도 달리 특별한 일은 없었다. 사실 우리가 하는 짓이란 그렇게도 뻔했다. 당시 수영을 못했던 나와 동민은 한가로이 튜브에 매달려 있었고, 지석과 명진은 서로 수영실력을 겨루겠다면서도 파도 때문에 제자리에서 자맥질만 하고 있는 중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남자 넷이서 여자도 안 꼬시고 뭔 놈의 물놀이냐고 한심해 할 법도 하지만, 당시 우리로서는 너무나 재밌게 놀았기에 다들 바다에 오길 잘 했다고 난리였다. 그렇게 한참을 애들처럼 낄낄대며 놀던 중 지석이 먼 바다를 가리키며 말했다.
 

 「야, 야, 저기 저 사람들 뭐 하는 거지? 저기 안전선 밖 아닌가.」
 

 튜브를 놓쳐 허우적대는 동민을 제외한 모두가 고개를 돌려 바다 쪽을 돌아봤다. 거기엔 정말로 서른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안전선 밖에서 손을 흔들거나 육지 쪽으로 헤엄쳐 나오려고 애쓰고 있었다. 개중에는 아직도 먼 바다 쪽으로 떠밀려가는 피서객도 있었다. 그렇게 무슨 일인지조차 파악이 안 돼 물위에 둥둥 떠 있으려는 찰나, 전시에나 날 법한 요란한 사이렌소리가 울리고 안전요원의 말이 이어졌다. 이안류가 발생했으니 수영을 자제하고 어서 뭍으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우리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어기적어기적 물에서 빠져나왔다.
 

 「아, 추워 죽겠다. 오늘은 다시 못 놀겠지?」
 

 큰 덩치와는 안 맞게 유달리 추위에 약한 동민이 부르르 떨며 말했다. 우리는 물놀이를 시작한 백사장 끝에서 어느새 반대편 끝으로 밀려와 있었다. 다시 펜션 쪽으로 되돌아가려는데 시간은 벌써 여섯 시가 넘어 있었다.
 

 「저기 왜 저렇게 모여 있지?」
 

 흠뻑 젖은 셔츠를 쥐어짜며 지석이 턱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시선이 향한 곳엔 사람들이 바글바글 댔는데, 모래사장까지 들어온 앰뷸런스를 보니 아까의 이안류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누구 죽은 거 아냐? 잘 놀았는데 기분 더럽게….」
 「누가 물먹었거나 저체온증 때문이겠지. 것보다 빨리 가서 밥이나 먹자.」
 

 명진의 불길한 말에 나는 화제를 돌리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야, 뭘 그렇게 서둘러? 우리도 가보자. 시체 같은 거 있을 수도 있잖아.」
 

 춥다면서도 어느 새 따라붙은 동민이 등을 떠밀며 인파 쪽으로 밀어붙였다. 애써 싫은 듯한 표정을 하면서도 약간은 호기심이 생긴 나는 까치발까지 들어봤지만 역시 헛수고였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다만 어떤 여자가 익사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이안류에 밀려간 모두가 무사히 구조됐지만, 유독 재수 없던 그 여자만이 물 밑에서 소용돌이치는 파도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불편해진 마음을 뒤로한 채, 그리고 이름 모를 희생자의 사체를 뒤로한 채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바닥에 신문지를 펴고 앉았다. 허기를 참을 수 없어 바로 저녁을 해결할 생각이었다. 버너에 프라이팬을 올린 동민은 준비해 온 스팸을 무식하게 썰어 얹었다. 조촐하지만 그런대로 먹을 만한 저녁상이 마련됐다. TV에선 마침 뉴스가 나오고 있었는데, 왼쪽 위에 <피서객 안전주의보>라는 딱지를 단 리포트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오늘 해운대에서 이안류가 발생, 파도에 휩쓸려 해수욕 중이던 여성 한 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하는, 기자의 멘트가 상당히 무겁게 들려왔다.
 

 「우와… 이거 내일부터 조심해야 되는 거 아냐? 특히 너네 둘, 수영도 잘 못하잖아.」
 

 지석의 물 조절 실패로 질게 된 밥을 꾸역꾸역 입에 넣으며 명진이 말했다.
 

 「또 그 얘기냐? 그 여잔 튜브나 구명조끼도 없었고, 우린 튜브 있잖아.」
 

 괜히 수영 못 하는 게 부끄러워진 나는 톡 쏘아 붙였다.
 

 「그래, 이안류가 맨날 생기는 것도 아니고… 우린 그냥 물귀신만 조심하면 돼.」
 「하하하….」
 

 동민의 썰렁하고 조금은 무서운 농담에 우리는 어색하게 웃었다. 저녁 식사를 조용히 마치고 내일은 뭘 할지, 어딜 가면 좋을지에 대해 얘기했다. 아무래도 친구들 모두가 바다는 피하고 싶은 눈치였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우리 모두는 부산 시내를 구경하자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내일 할 일이 생겼으니 지체 없이 이불을 펴고 드러누웠다. 얼른 자고 일어나야지. 오늘 일은 다 잊고… 그래, 다 잊고 내일 또 신나게 놀아야지…. 에어컨을 켜고 혹시 몰라 창문을 조금 열어둔 채 방 불을 껐다. 동민이 창틀에 걸어둔 체크무늬 남방이 깃발처럼 펄럭이고 있었다.

「으음… 뭐야… 지금 몇 시지….」
 

 온몸을 감싸는 한기에 나는 몸을 오슬오슬 떨며 잠에서 깼다. 시계는 잘 보이지 않았고 방안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여전히 펄럭이는 체크무늬 남방… 그러고 보니 얼어 죽을까 봐 창문만 열어놨지 에어컨의 시간예약 기능은 사용하지 않았다. 아침엔 그렇게 덥더니 지금은 한 겨울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추웠다. 리모컨이 고장 나 있었으므로 나는 에어컨의 전원을 끄기 위해 꾸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똑… 똑… 똑…」
 

 어디선가 물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가지가지 하네… 썼으면 잘 좀 잠가놓지….」
 

 나는 화장실 수도꼭지에서 나는 소리인 것으로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아까 바다에서 돌아와 샤워할 때 친구들 중 하나가 제대로 잠그지 않았으리라. 어둠속에서 더듬거리며 에어컨 전원을 찾아 누른 다음, 다시 자리로 돌아가 누우려고 했다.
 

 「똑… 똑똑…」
 

 다시 물 떨어지는 소리.
 

 「…… 응?」
 

 뭔가 이상했다. 자세히 들어보니 그건 물 떨어지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건….
 

 「똑똑… 똑똑똑…」
 

 그건 분명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나무로 된 방문을 작게 두드리면 바로 저런 소리가, 잠결에 들으면 물 떨어지는 소리로 착각할 만한 소리가 났다. 나는 어제 오후에도 소리가 조금 클 뿐 저와 비슷한 노크소리를 듣고 문을 열었던 것이었다.
 

 「똑똑똑… 똑똑…」
 

 같은 리듬으로, 문을 열든 안 열든 자기는 계속 두드릴 거라는 듯 힘을 싣지 않고 약하게 노크하는 소리가 어쩐지 불쾌하게 느껴졌다.
 

 「누구세요?」
 

 문 앞으로 슬금슬금 다가가 도어룩을 들여다보며 나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밖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아니, 원래 고장이 나 보이지 않는 건가…. 잠깐이었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그냥 문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 기다리다 지쳐 어디로 가버렸는지 저쪽에서는 더 이상 노크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후.
 

 「나야… 문 좀 열어줘…」
 

 나는 그대로 눈을 꼭 감았다 떴다. 대관절 이게 어느 나라 장난이란 말인가? 아무리 자다 일어나서 어렴풋한 상태라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어제 노크하던 여자의 목소리임에 틀림이 없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조금은 힘없고 느린 어조랄까. 여하튼 그냥 자러 돌아갈 수도 없었기에 밀려오는 화를 억누르며 문을 조금 열어젖히고 대꾸했다.
 

 「저기, 304호 찾으시는 거 맞죠? 여기 204호에요. 아까 낮에도 오셨잖아요….」

 
 묵묵부답.
 

 「후우… 304호는 4층에 있으니까… 아니 그러니까 3층인데… 어쨌든 한 층 더 올라가세요.」
 

 정적.
 

 「헷갈리는 거 이해하는데… 그래도 지금 시간이 몇 시에요? 다음부턴 제대로 찾아가세요.」
 

 쿵-
 

 어쩐지 내 할 말만 하고 문을 닫은 것 같아 미안했다. 하지만 사람이 정도란 게 있는 법이다. 상황을 보니 대충 알 만했다. 그녀는 술을 떡이 되도록 퍼마셔서 정신이 없었거나, 편의점 같은 델 나갔다 와서 잠결에 세 번째 버튼을 누른 것이다. 망할 펜션 같으니라고…. 나는 문을 잠그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누웠다. 더 이상 펄럭이지 않는 체크남방을 보며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실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자 나만 빼고 모두 깨어 있었다. 동민은 아직도 마르지 않아 축축한 남방을 들어 보이며 누가 에어컨을 껐냐고 한바탕 난리를 치고 있었다. 나는 씻으려고 일어서며 어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밤중에 찾아온 불청객 얘기도 덧붙였다. 그러자 오히려 젯밥에 관심이 더 많은 지석과 명진은 왜 그녀를 그냥 보냈냐고 아쉬워했다. 나가서 부축이라도 해줬으면 그걸 인연으로 우리랑 그쪽 일행이랑 술이라도 마실 수 있지 않았겠냐는 것이었다. 같잖은 농담에 피식거리며 나는 옷을 갈아입었고, 동민은 살이 탄다고 엄살을 부리면서도 그냥 반팔을 입고 나가기로 했다. 벌써 점심때가 다 된 시간이었다. 우리는 근처에서 돼지국밥으로 끼니를 해결한 후 시내구경에 나섰다.
 

 용두산 공원과 부산타워에 올라가고 자갈치시장을 둘러봤다. 남은 시간동안은 시내 곳곳을 쏘다니며 떡오뎅 같은 길거리 음식을 먹었다. 저녁까지 해결하고 숙소 근처로 돌아오니 벌써 여덟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우리는 한마음으로 “이대론 아쉽다”며 편의점에서 맥주 두 캔씩과 과자 몇 봉을 집어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소위 노상을 하기 위해서였다. 모래바닥에 벌렁 드러눕기도 하고 지석이 화장실에 간 사이 맥주를 다 파묻어버리기도 하는 등, 우리는 낄낄대며 해운대에서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캬, 진짜 시원하다! 바다 보면서 마시니까 더 시원한 것 같아.」
 「시원하긴, 난 덥구만. 맥주가 마실 땐 시원해도 마시고 나면 열 난다는 거 모르냐?」
 

 동민과 명진이 또 티격태격했다. 다들 자기 몫의 맥주를 다 마셔 얼근히 취한 상태였다. 혹시나 해서 사온 1.5리터짜리 패트 맥주는 한두 잔쯤 먹고 더 이상은 배불러서 못 먹겠다고 방치해두고 있었는데,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야야, 그만 싸우고 우리 게임할까? 삼육구 같은 거 해서 지면 맥주 마시기.」
 「오, 좋다 그거! 그럼 꼴등한 사람이 이걸로 세 컵씩 마시는 거다?」
 

 어지간히 술 좋아하는 지석이 종이컵을 들어 보이며 말했고, 술도 약한 게 괜찮겠냐고 비죽대며 동민과 명진도 합세했다. 게임은 나무젓가락을 이용한 깃발 쓰러뜨리기, 신발 벗고 이십 미터 달리기, 종이컵 제기차기 등 간단하게 할 만한 것들이었다. 대부분 몸집이 크고 둔한 동민에게 불리한 경기였는데, 덕분에 혼자서 반 이상을 마신 동민은 게임이 끝나갈 무렵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취했다.

 
 「더 해…. 야! 맥주 사와서 한 게임 더 하자고.」
 「돈 없어 인마. 그럼 마지막으로 그거 할래? 진 사람이 저기로 내려가서 땅 찍고 오기.」
 

 내가 바다 쪽을 가리키며 짓궂은 제안을 하자 지석과 명진은 그거 좋다면서 바람을 잡았다. 사실 우리 셋으로선 몸으로 하는 게임을 고르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했던가? 동민은 몸으로 하는 게 아니면 재미가 없다는 우리의 의견에 그렇다면 닭싸움을 하자고 역으로 제안했다. 결국 모두가 신발을 벗고 모래사장 위를 방방 뛰며 닭싸움에 임하게 되었는데, 발에 밟히는 조개껍질도 조개껍질이었지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져 괜스레 부끄러워졌다.
 

 「어… 어어… 악!」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동민이 고꾸라졌다. 우리가 협공을 한 것도, 그렇다고 조개껍질에 발을 베인 것도 아니었다. 단지 취해서 균형감각을 잃었기 때문에 지석이 한번 툭 치는 걸로 자기 혼자 껑충거리다 나자빠진 것이었다. 우리는 그 꼴을 보고 옷이 더러워지든 말든 모래사장을 뒹굴며 미친 듯이 웃어재꼈다.
 

 「생각해보니 내가 불리하잖아! 내가 맥주를 얼마나 많이 마셨는…」
 「꺼져, 꺼져. 네가 하자고 해서 한 거잖아. 빨리 땅이나 찍고 와라. 큭큭큭….」
 

 처지를 하소연 하는 동민의 말을 싹둑 자르고 명진은 악마 같은 웃음을 흘리며 벌칙 수행을 재촉했다. 만약 타이밍이 안 좋아 파도에 휩쓸린다면 외출할 때 입을 옷이 젖는 건 물론 숙소에 들어가기 전 샤워까지 해야 할 터였다. 동민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툴툴거리면서도 젖을지도 모르니 신발은 그냥 벗은 채로 가겠다고 했다. 우리는 제대로 안 하면 다시 해야 한다며 꼭 육지와 바다의 경계를 찍어야 인정해 주겠다고 강조했다.
 

 타다다닥- 첨벙!
 

 「왓… 와… 아 차거!」
 

 바다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내달리던 동민은 땅을 짚으려고 몸을 숙이려다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우리는 뒤이어 덮친 파도에 허우적대는 동민의 꼴사나운 모습을 보며 땅을 치고 웃었다. 취기도 있었겠지만 질척질척 거리는 모래바닥도 한몫 했을 거라는 말엔 숨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렇게 한바탕 낄낄대고 났는데도 동민은 아직 욕지거릴 내뱉으며 뭍으로 나올 생각을 않았다.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나는 소리 질렀다.
 

 「야, 거기서 뭐해! 바다가 그렇게 좋냐?」
 「어풉… 하압… 살… 어풉… 살려줘!」
 「미친놈. 얼마나 마셨으면 지 몸도 제대로 못 가누냐.」
 

 명진은 딱하다는 표정으로 양팔에 붙은 모래를 털어내며 일어나 바다 쪽으로 향했다. 어둠에 휩싸인 바다에 떠있는 동민의 모습이 흡사 뭍으로 밀려온 고래 같다고 농을 치며 나도 지석과 함께 비탈을 따라 내려갔다. 여전히 첨벙거리며 사방으로 물을 튀기고 있는 동민이 안쓰러워 보였는지 명진은 옷이 다 젖어가는 데도 불구하고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동민은 헛소리를 내뱉으며 주저앉았고, 그것도 모자라 점점 깊은 쪽으로 빠져들어 갔다.
 

 「장난하냐? 내 손 잡으라고. 허리까지도 안 오는 물에서 뭐 하냐?」
 「어… 어풉… 소… 손… 살려… 어풉…」
 

 이 모습을 본 지석은 수영도 못하는 앤데 진짜 일 생길지도 모른다며 얼른 가서 끌어내자고 했다. 밤바다에 들어간다는 게 영 꺼림칙했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으므로 나도 거기에 동의했다. 우리는 이윽고 동민이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 갔다. 가까이 가보자 이미 명진이 동민의 손을 이끌며 고군분투 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 시발… 이 새끼 진짜 무거워! 나 좀 도와줘.」
 「맥주에다 바닷물까지 먹었으니 좀 무겁겠냐.」
 

 이제는 심지어 일 미터도 안 되는 깊이에서 가라앉았다 떠올랐다를 반복하는 동민이었다. 나는 반대편 손을 잡아 중심을 잡아주려고 애를 썼다. 구십 킬로그램 정도 나가는 동민의 몸무게만 아니었다면 정말 물밑에서 누가 끌어당기고 있다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십여 분 간의 사투 끝에 우리는 그 애물단지를 밖으로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동민이 얼마나 세게 잡고 늘어졌는지 손에 자국이 다 남고 옷도 흠뻑 젖었지만 긴장이 풀려서인지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하… 이거 한 십 년짜리 안주감인데.」
 「근데 넌 대체 거기서 뭐 한 거냐? 반쯤 오니까 혼자서도 잘만 걷던데.」
 

 명진이 한심하다는 듯 동민에게 물었다. 동민은 아까부터 얼빠진 표정으로 덜덜 떨고 있었다.
 

 「너 혹시 우리 엿 먹이려고 장난친 거냐?」
 「헐… 대어 낚은 줄 알았더니 오히려 우리가 낚인 거였네.」
 

 지석과 내가 이렇게 농을 주고받고 있던 중 갑자기 동민이 웅얼거렸다.
 

 「손….」
 「뭐라구?」
 

 예상치도 못한 말에 벙 찐 우리는 동민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동민이 내리깔고 있던 눈을 서서히 들어 우리를 쳐다보았다. 눈동자에는 두려움 같은 게 서려 있었다. 목소릴 가다듬지도 않고 동민은 천천히 입을 땠다.
 

 「처음에 허우적대던 건 솔직히 장난이었어. 아무나 도와주러 오면 빠뜨리려고…. 그런데 네가 일어나서 다가오는 순간 갑자기 손이… 그… 확실하진 않은데 손 같은 게 다리를 잡더니 날 바다 쪽으로 끌고 들어갔어….」
 

 보통 때면 거짓말을 해도 좀 그럴듯하게 하라며 한바탕 욕을 퍼부었을 테지만, 동민의 무서울 정도로 진지한 얼굴과 무엇엔가 질려 있는 듯한 눈빛에 압도돼 우리는 좀처럼 대꾸할 수 없었다. 아무 말 없는 우리에게서 눈을 돌려 검게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보며 동민은 말을 이었다.
 

 「아무리 일어서려고 해도 한쪽 다리가 잡혀 있어서 제대로 서있을 수조차 없었어. 뭐랄까… 누가 다리 하나를 완전히 감싸고 안 놔주는 느낌이라서…. 손으로 잡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누가 매달려 있는 것 같기도 했어. 너희들이 끌어주는 와중에도 물밑에서 끌어당기는 힘이 더 세서 계속 가라앉는 거야…. 반 정도 빠져오니까 힘이 스르륵 풀리더니 걸을 수 있겠더라.」
 

 나는 이 믿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시해버릴 수도 없는 얘기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지 난감했다. 말인 즉 물귀신 같은 게 자기를 끌어당겼다는 소린데, 적어도 그 옆에 있던 나는 미역줄기조차 보지 못했던 것이다. 쥐난 것도 아니라고 하고 그렇다고 취해서 몸을 못 가눈 것도 아니라고 하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요즘 세상에 물귀신이라니. 숙소에 도착한 우리는 기나긴 대화 끝에 이번 일은 단지 파도의 영향으로 벌어진 해프닝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어제 일도 있고 하니 동민이 운 나쁘게 이안류 비슷한 것에 휘말렸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번 일이 어제 죽은 어떤 여자와 하등의 관련도 없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고 싶었던 걸지도 몰랐다.

부산에서의 세 번째 날. 비라도 토해낼 듯 꾸물거리는 회색하늘이 영 찝찝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피서 온 기분을 한껏 누렸다. 오전에는 미처 둘러보지 못한 부산의 명소를 돌아보고, 오후에는 그제 일도 잊은 채 바다에 들어가 힘이 빠지도록 물놀이를 즐겼다. 밤에는 오늘이야말로 여행의 절정이 아니겠냐며 근처 횟집에서 광어와 오징어 회를 포장해 왔다. 술도 잘 못하면서 잔뜩 들뜬 지석은 편의점에서 마른안주 몇 개와 소주를 열 병이나 샀다. 나는 다 못 마실 거라며 만류했지만 지석은 내일도 날인데 무슨 걱정이냐고 고집이었다. 어쩔 수 없이 품에 한가득 술과 안주거리를 사든 우리는 펜션으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에 버튼을 누르고 잠시 기다리자 땡-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삐걱대는 철문이 열렸다. 나와 지석은 우리 방 앞에서 문을 두드리려다가 말았다. 거기엔 푯말이 없는 대신 <304>라 적힌 조그만 플라스틱 막대기가 한쪽 구석에 붙어 있던 것이었다.
 

 「야, 우리 잘못 온 거 같은데?」
 「아… 아까 모르고 삼층 누른 것 같다. 미안.」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 세 번째 층에 있는 204호였다. 다시 엘리베이터로 되돌아가려는데 지석이 팔을 덥석 잡았다.
 

 「그런데 304호에 여자들 놀러온 거 맞지? 왜, 저번에 우리 방에 잘못 왔던 걔 있었잖아.」
 「아마 그럴걸. 그런데 있으면, 같이 술이라도 마시자고 하게?」
 「가위바위보 어때.」
 「됐네. 그냥 가 인마.」
 

 우리는 궁상맞게도 남의 방 앞에서 같이 술을 먹자고 하니 마니 하는 문제로 티격태격 했다. 결국 참다못한 내가 노크를 하는 조건으로 지석이 부족한 안주나 술값을 다 부담하라고 제안했다. 지석은 흔쾌히 승낙했고, 나는 숨을 가다듬고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

 「계세요?」
 「……」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놀러 나가서 아직까지 안 돌아왔거나 우리보다 먼저 올라가 버린 모양이었다. 도어룩에서도 빛이 새어나오지 않았기에 우리는 하릴없이 발길을 돌렸다. 지석은 어제나 그제 진작 왔어야 할 걸 잘못했다고 아쉬워했고, 나는 회 한 접 더 사야 할 것 같은데 돈은 충분하냐며 속을 긁어댔다. 이미 엘리베이터는 지하 일층에 서 있었기에 우리는 층계로 내려와 우리 숙소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거의 자정이 될 때까지 술판을 벌였다. 한 사람당 소주 한 병씩을 마셨을 때쯤 지석은 한계를 맞아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한바탕 여자타령을 하며 난리 부르스를 추고 난 뒤였다. 우리는 그러든 말든 계속 술을 들이켰다.
 

 「근데 지석이 들어간 지 삼십 분 넘지 않았냐? 가봐야 되는 거 아냐?」
 「그러고 보니 그러네. 화장실에서 자는 거 같은데….」
 「못 말리겠다 진짜. 이불 펴고 먼저 재우자.」
 

 그렇게 우리 셋은 지석으로 화제가 옮겨 가서야 그가 너무 오랫동안 자릴 비운 걸 깨닫고 화장실로 향했다. 지석은 변기에 기대어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같은 대학에 다니고 집도 가까워 지석과 자주 어울리던 내가 이번에도 그 뒤치다꺼리를 맡게 되었다. 소주 한 병에 나가떨어졌다는 증거로 삼기 위해 사진을 찍은 후 나는 지석을 이불로 옮겨 주었다. 텅 빈 스티로폼 회 접시에 쏟아놓은 해물맛 과자가 동나고 빈 소주병이 방바닥을 나뒹굴 때까지 우리는 계속 마셨다. 그리고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명진이 노래방에 가자고 했고, 나와 동민은 좋다며 벌써부터 노래를 흥얼거렸다. 코까지 골며 자는 지석을 데리고 갈 순 없었기에 우리는 그냥 문을 잠그고 숙소를 나섰다.
 

 「그런데 여기 근처에 노래방이 있었나?」
 「몇 개 있었지. 근데 지금 벌써 새벽 두 시가 넘었는데 열려 있을지 모르겠다.」
 

 동민과 명진을 따라 노래방을 찾아 헤매면서도 나는 그냥 두고 온 지석이 마음에 걸렸다. 술에 잔뜩 취해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도중에 깨 우리가 없는 걸 확인하면 기분이 상할 게 분명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시간은 벌써 세 시를 가리켰고, 마땅한 노래방을 발견하지 못한 우리는 아쉽지만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한창 유행하던 대중가요를 음정박자 무시하고 불러대며 바닷가를 걸으니 술도 좀 깨고 기분도 풀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덕분에 적막한 바다 속 어딘가에서 시선이 느껴진다거나, 모래사장에서 손이 튀어나와 발목을 잡을 것 같은 막연한 공포감이 되살아난 듯도 했다. 게다가 어제 동민이 했던 이야기가 꾸며낸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니 팔뚝에 소름이 돋고 뒷머리가 비쭉 서는 것이었다. 다른 친구들도 나와 같은 심정이었는지 숙소가 보일 때쯤 우리는 무엇에라도 쫓기듯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아우, 피곤해 죽겠다…. 얼른 들어가자.」
 「동감. 근데 열쇠 누가 가지고 있지?」
 「너 아냐?」
 「난 네가 챙긴 줄 알았지….」
 

 그제야 우리는 노래방에 가려고 서두르느라 열쇠를 가지고 나오지 않은 걸 눈치 챘다. 문이 워낙 구식이라 안에서 버튼을 누르고 닫으면 잠기는 간단한 구조였으므로, 우리 중 누구도 감히 열쇠를 챙겨올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안에 지석이 자고 있다는 점이었다. 졸음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었기에 나는 힘없이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똑똑똑… 똑똑…」
 

 두세 번의 노크에도 아무 응답이 없었다. 명진은 그렇게 해서 술 취한 애가 깨겠냐며 부술 듯 문을 두드렸고, 동민은 안 그래도 큰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를 쳐댔다.
 

 「쾅쾅쾅! 쾅쾅쾅쾅!」
 「지민아, 문 좀 열어봐. 백지민!」
 

 한바탕 소란에도 방에서는 별다른 기별이 없었고, 대신 아래층에서 로비를 보고 있던 주인아저씨가 놀라서 뛰쳐나왔다. 우리는 사정을 설명하고 마스터키로 문을 연 다음에야 방에 들어설 수 있었다. 처음에는 꿰뚫어볼 수 없을 만큼 짙은 암흑이었으나, 이윽고 어둠에 눈이 적응하자 방 안의 모든 게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현관에서부터 바지를 벗으며 잘 준비를 하던 명진이 갑자기 내 어깨를 툭툭 치더니 씩 웃으며 방 한 구석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지석이 웅크린 채 자고 있었다.
 

 「쟤도 가만 보면 참 특이해. 아까 눕혀놨더니 또 저러고 있네.」
 「그런데 이거, 우리끼리 나간 거 들킨 거 아냐?」
 「나도 몰라. 어쨌든 빨리 자자. 일단 쟤부터 다시 눕히고….」
 

 이왕 한 거 끝까지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나는 지석을 자리에 눕히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지석은 자고 있는 게 아니었다. 다만… 겁에 질려 웅크린 채 떨고 있는 것이었다.
 

 「야,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나는 내 목소리에조차 반응하지 않는 지석을 다짜고짜 흔들어댔다.
 

 「부… 불 좀 켜줘….」
 

 지석은 나를 보더니 넋 나간 표정으로 전원 스위치를 가리켰다. 동민이 그런 지석을 보고 얼른 불을 켰고, 우리는 그 주변에 둘러앉았다.
 

 「뭐 때문에 그래?」
 「문은? 방문… 잠겨 있어? 확실하지?」
 

 명진의 질문에 지석은 대답대신 문이 잠겼는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해 달라고 거듭 요구할 뿐이었다. 손을 덜덜 떨고 얼굴이 하얗게 질린 걸로 봐서 보통일은 아닐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뭐 때문에 그러는지 똑바로 말해봐. 깨어 있었으면서 문은 또 왜 안 열어 준건데?」
 「나, 봤어…. 위층에 그 여자, 그 여자가 찾아와서… 그런데 다시 올까봐….」
 「위층 여자? 아까 가봤는데 아무도 없었잖아. 그리고 그 여자가 왜?」
 

 어제 물귀신 얘기에 이어 이번엔 또 무슨 얼빠진 소린가 싶었지만, 도저히 장난으로 보이진 않았기에 나는 한껏 진지한 태도로 물어봤다. 명진이 부랴부랴 떠준 물 한 컵을 마시고 잠시 안정을 취한 지석은 숨을 가다듬었다. 조금 진정이 됐는지 자세를 바로잡은 지석은, 피곤한 얼굴로 아까까지 있었던 일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저번에 태훈이 네가 그랬잖아? 새벽에 위층 여자가 와서… 노크하고 갔다고.」
 「그랬지. 그땐 그냥 술 취해서 방을 못 찾나 생각했는데… 그런데 그 여자랑 이 일이랑 무슨 상관이라도 있어? 왜 자꾸 그 여자 얘길 하는 거야.」
 

 지석은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답했다.
 

 「있어…. 아까… 그 여자가 찾아왔거든.」
 

 나는 그때까지도 당최 그게 무슨 소린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나도 너처럼 중간에 깼어. 잠결에 노크 소리가 들리더라고…. 너무 취해 있어서 확신은 못하겠는데… 뭐라더라? 문 좀 열어달라는 그런 말도 들리는 것 같았어. 너희들이 자리에 없길래 나는… 나는 당연히 너흰 줄 알고 문을 열어줬지….」
 

 나는 그 말을 듣고 머리칼이 쭈뼛 서는 느낌을 받았다. 그를 홀로 두고 간 것을 들켰기 때문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 다음에 지석의 입에서 나올 소름끼치는 말이 어느 정도 예상됐기 때문이었다. 지석은 유독 놀란 표정의 나를 슬쩍 보더니 찬찬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문을 열었더니, 그 여자가 있더라…. 나보고 304호가 어디냐고 묻길래 당연히 위층이라고 알려줬지. 그렇게 다시 문을 닫고 자리로 돌아오는데… 그런데 뭔가 이상했어. 분명히 새벽인데… 새벽인데 그 여자는, 방금 바다에서 나온 것처럼 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거든….」
 

 지석은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자기가 잘못 본 것이냐고 묻기라도 하는 듯 떨렸다. 아직까지도 파랗게 질려 있는 입술을 뻐끔거리며 지석은 덧붙였다.
 

 「거기다 아까 우리가 갔을 땐 그 방에 아무도 없었잖아…. 아무도 없는 방에 다 젖은 채로 찾아가는, 그런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 그것도 새벽에….」
 

 우리는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믿어야 하고 어디서부터 과장으로 봐야 하는지조차 짐작하지 못했다. 확실한 건 내가 지석과 비슷한 일을 이틀 전에 겪었다는 점뿐. 사소한 일엔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명진조차 짐짓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동민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쩌면 어제 자기가 겪은 사건과의 연결고리를 찾고 있는 중일지도 몰랐다. 새벽 네 시에 불을 환하게 켜놓고 애들한테나 먹힐 법한 귀신 얘기를 검토하는 꼴이라니…. 결국 지석이 깨어 있었으면서도 문을 열지 않은 까닭만큼은 밝혀진 셈이었다.
 

 「오늘은 그만… 잘까?」
 

 얼마동안 이어졌는지 모를 침묵을 깨며 나는 말했다. 시간도 늦었고 가뜩이나 피곤한 하루였다. 시간을 더 끈다고 해서 무언가 뾰족한 해답이 나올 것 같지도 않았다. 지석은 우리에게 방불을 끄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낸 후 눕자마자 바로 잠에 들었다. 동민과 명진도 이윽고 자리를 몸을 뉘였으며, 나는 한참을 뒤척이다 피곤함에 휩쓸려 겨우 잠들 수 있었다.

「태훈아, 일어나봐.」
 「으음… 몇 시야, 지금?」
 

 나는 명진이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 별로 잔 것 같지도 않았는데 시간은 벌써 오후 두 시였다. 진석은 어제 일 때문인지 계속 자고 있었고 동민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제야 하루가 시작했는데 오늘은 또 뭘 하면 좋을지가 고민이었다. 더 이상 가볼 곳도 마땅치 않았고 바다에만큼은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PC방에라도 갈까 생각하던 찰나 명진이 벽에 등을 기대며 말을 걸어왔다.
 

 「야, 이건 너만 알고 있어.」
 「응? 뭔데 그래.」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비밀 얘기를 꺼내려는 명진의 모습에 나는 당황함과 동시에 궁금증이 일었다. 원체 숨기는 게 없는 명진이 조심스레 말하는 데다 우리 네 명 사이에서도 꼭 나만 알아야 할 이야기란 무엇일까. 어쩌면 어제 일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노크 소리 있잖아. 그거… 사실 나도 한번 들었어.」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 덮쳐왔다. 이래서야 동민을 제외한 우리 모두가 동일한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었다. 세 명이 우기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 낸다지만, 이젠 단순한 착각이나 허풍으로 넘길 만한 단계가 아니었다. 나는 자세히 좀 말해 보라며 명진을 닦달했다.
 

 「그게 아마, 그제 새벽 세 시쯤이었나? 하루 종일 돌아다니고 밤엔 동민이 때문에 고생했는데 이상하게 그때쯤 되니까 눈이 떠지더라. 그래서 다시 자려고 이불을 뒤집어썼는데, 현관 쪽에서 똑똑 거리는 소리가 나더라고….」
 

 명진의 얘기는 내가 겪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새벽에 들리는 노크 소리와 문 좀 열어달라는 힘없는 목소리. 명진은 곧바로 304호는 한 층 더 올라가야 된다고 전해주었다고 한다. 전날 나한테 새벽에 있었던 얘기를 듣고 나무랐던 자신이었지만, 막상 자기가 그 상황에 처하자 너무 귀찮아 문조차 안 열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다시 자리로 돌아와 잠을 잔 명진은 어제까지만 해도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어제 지석의 얘기를 듣고 나자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나마 충격을 덜 받을 만한 나에게 털어놓는다는, 말하자면 그런 얘기였다.
 

 「그래서… 결국 넌 뭐라고 생각해? 그 여자….」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명진은 인상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자기도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솔직히 귀신 같은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동민이 건을 빼고 생각하더라도 이건 너무 이상하단 말이야. 우리 세 명이 다 겪은 일이라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래, 잠결에 잘못 들었다고 하기엔 너무 똑똑히 기억나. 차라리 악몽이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 그래서 말인데…」
 

 명진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잡아끌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러니까 매일 새벽 세 시쯤에 그 여자가 오는 거라면, 아마 오늘도 찾아와서 문을 두드리지 않을까.」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당연히 전말을 밝혀내야지! 우리 둘이 그때까지 깨어 있다가 노크 소리가 들리면 바로 뛰쳐나가는 거야. 그럼 그게 귀신인지 사람인지 알 수 있잖아.」
 

 나는 이 대담한 계획에 혀를 내둘렀다. 겁 없는 놈이란 건 알았지만 그래도 직접 문을 열고 나간다라니. 솔직히 그 어두운 새벽에 그럴 짓을 할 만한 용기는 안 났다. 아무리 두 명이라 해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니까. 하지만 명진은 다가오는 새벽이 벌써부터 기다려지는지 혼자 들떠서 그 계획을 검토하는 듯했고, 만일 내가 안 한다면 자기 혼자서라도 하겠다는 말에 나도 어쩔 수 없이 돕겠다고 했다.
 

 「좋아. 그럼 오늘은 너무 무리하지 말고 충분히 쉬자. 새벽까지 안 자려면….」
 

 명진이 말을 맺으려는 찰나 편의점에 라면을 사러 간 동민이 돌아왔고, 우리는 지석을 깨워 늦은 점심을 먹었다. 뭘 하면 좋겠냐는 질문엔 다들 말을 아꼈다. 여기까지 와서 PC방에 가자고 하기엔 좀 그렇고 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펜션 가까이에 달맞이 길이 있다는 정보를 넌지시 건넸다. 오후 일곱 시. 땀을 뻘뻘 흘리며 언덕을 오르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던 우리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벤치에 걸터앉았다. 해는 이미 서편 바다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이렇게도 평화롭고 멋진 곳인데…. 눈앞에 펼쳐진 풍광을 보니 괜스레 의문의 노크소리 때문에 이번 여행 전체를 망친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 빌어먹을 펜션이 상식적으로만 생겨먹었더라도 이런 일은 애초에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즐거웠다면 충분히 즐거운 여행이었는데, 도대체 그건 뭐냐구…. 해가 수평선에 닿자 바다 위로 새빨간 불이 번졌다. 그리고 그 불이 완전히 꺼진 후에야 우리는 숙소로 돌아왔다.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좀 아쉽네.」
 「뭐, 이 정도면 잘 놀았지. 내일 기차 출발 시간이 언제라고 했지?」
 

 동민과 지석은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수 있도록 부랴부랴 짐을 챙겼다. 불과 얼마 전 있었던 일들은 다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나는 잠들면 안 된다는 명진의 당부에 따라 편의점에서 사온 드링크제를 마신 후 TV를 켜고 누웠다. 명진은 이미 자리를 잡고 벌렁 드러누워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뭐 하냐?」
 

 채널을 돌려도 볼 만한 프로그램이 나오지 않자 나는 심심함을 못 이기고 물었다.
 

 「어두워도 사진이나 동영상이 되는지 보고 있었어. 혹시라도 찍을 수 있으면, 이거 정말 대박이잖냐.」
 

 내 친구지만 정말이지 속편한 놈이었다. 어두운 데선 잘 찍히지도 않을 뿐더러 조금만 흔들려도 사진이 망가지니 포기하라고 일러줘도 명진은 들은 체 만 체했다. 그래, 사람이면 어떻고 귀신이면 또 어때? 죽어도 갈 데가 있다는 뜻이니까 오히려 안심은 되겠네….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TV를 껐다. 깍지를 껴서 베개를 만든 후 반쯤 열린 창밖을 응시하는 게 오히려 덜 졸릴 것 같았다. 동민과 지석은 불을 끄고 잘 채비를 했고, 명진은 여전히 휴대폰 삼매경이었다. 세 시라…. 이상하게 졸음이 밀려왔지만 눈을 감을라치면 노크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깜짝깜짝 놀랐다.
 

 「이상하네… 이제 세 시 다 됐는데.」
 「벌써?」
 

 그때까지 자고 깨고를 반복하던 나는 반쯤 몽롱한 정신으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두 시 오십칠 분쯤 됐다. 피곤함에 그냥 자고 싶어 명진에게 한 마디 툭 던졌다.
 

 「어쩌면 둘이 깨어 있어서 안 오는 걸지도 몰라.」
 「쉿. 조용히 해봐.」
 

 명진은 어둠속에서 작은 눈을 빛내며 가만히 누워있으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나는 올 것이 왔나 싶어 숨소리마저 죽인 채 귀를 기울였다.
 

 「……」
 

 그러나 오 분 넘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나는 다리가 근질거리는 걸 참다못해 이불을 걷어내려다 그대로 굳었다.
 

 「똑… 똑… 똑…」
 

 정확히 그 소리였다.
 

 「똑… 똑똑…」
 

 맨 정신에, 그것도 그 정체를 알고 들으니 두려움이 가슴 깊은 곳까지 밀려드는 것 같았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이 들며 식은땀이 흘렀다. 그 와중에도 명진은 살금살금 이불을 빠져 나오더니, 이윽고 나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똑똑… 똑…」
 

 힘없이 손으로 툭툭 치는 듯한 소리. 두 번째로 듣는 이 노크 소리는 첫 번째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불쾌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된 기분으로, 나는 어쩔 수 없이 휴대전화를 손에 든 명진의 뒤에 바짝 붙었다. 이윽고 우리는 문 앞에 기대섰다. 오 센티 남짓한 두께의 나무판자를 사이에 두고 미지의 존재와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에 떨리기도 하고 묘한 흥분감이 들기도 했다.
 

 「문 좀… 열어 줘…」
 

 감정이 실려 있지 않은, 깨질 듯 차갑고 피아노 줄처럼 얇은 여성의 목소리가 문 너머로 들려왔다. 방금 전까지의 감정은 싹 사라지고 그 자리를 후회와 공포가 메워버렸다. 목소리를 듣고 나니 다리마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자존심 따윈 갖다 버리고 덜덜 떨리는 몸을 가까스로 추스르며 나는 명진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시발… 너 진짜 문 열 거야?」
 「모… 몰라. 장난 아니네, 미친….」
 

 아무리 명진이라도 이런 상황에선 어쩔 수 없는지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우리는 마땅한 대상도 없이 욕을 내뱉으며 초조함을 달래고자 노력했다. 일 초가 마치 한 시간처럼 느껴졌다.
 

 「얘들아 나야… 문… 열어 줘…」

 「철컥 철컥」
 

 급기야는 반대편에서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했다. 상상조차 못한 일에 나와 명진은 거의 펄쩍 뛸 뻔했다. 가슴팍과 등은 이미 땀으로 흥건했고 이젠 턱이 딱딱 부딪히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무너져 내리는 다리를 간신히 부여잡으며 아무에게나 닥치는 대로 기도했다. 하느님 부처님, 아니 주인아저씨라도 좋으니까 제발 이년 좀 사라지게 해주세요, 제발….
 

 「안에… 아무도 없어…?」

 「똑똑똑… 똑똑똑…」
 

 계속해서 이어지는 노크 소리에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았다. 아무도 없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순간 우리는 끝장날 터였다. 휴대전화를 꼭 붙들고 얼어붙은 채 눈동자만 요동치고 있는 명진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손에서는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는데, 외부버튼이 눌려 떠오른 전자시계가 세 시 사 분을 나타내고 있었다. 노크가 시작된 지 일 분밖에 안 지난 것이었다.
 

 그런데… 잘만 하면….
 

 순간 기막힌 생각이 떠오른 나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최대한 벙긋거리며 힘주어 말했다.
 

 「여… 여긴 204호에요!」
 

 호흡이 너무 거칠어서 연이어 말하기가 힘들었다.
 

 「3… 304호는… 하… 한 층 더 올라가야 돼요!」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다.
 

 「똑똑… 똑…」
 

 마지막 세 번의 노크로 방안은 조용해졌다. 밖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심지어 발걸음을 돌리는 기척조차 없었기에 나와 명진은 한 시간 이상을 제자리에서 꼼짝 않고 주저앉아 있어야만 했다. 우리의 셔츠는 비라도 맞은 것처럼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나는 너무 오래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던 탓에 종아리에 쥐가 났다. 하지만 혹여나 그 여자가 밖에 있을까 찍 소리도 내지 못하고 끙끙댔다. 새벽 네 시가 훨씬 넘어서야 이불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 우리는 아직도 송글송글 맺혀있는 이마의 땀방울을 훔치며 눈빛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벌써 동이 트는지 푸르스름한 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왔고, 나는 부산에서의 마지막 새벽을 등진 채 스르르 잠들어버렸다.
 

 「위이이이이이잉-」
 

 다음 날. 아침부터 요란한 소리에 잠을 깨니 먼저 일어난 지석이 헤어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동민은 벌써 옷까지 다 갈아입고 갈 채비를 마친 모양이었다. 명진은 어제 일 때문인지 아직도 곯아떨어져 있었다.
 

 「야, 너넨 뭘 했길래 그렇게 늦잠을 자냐.」
 「어제 우리 몰래 술이라도 마셨나본데?」
 

 지석과 동민의 떠보기를 나는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대충 얼버무렸다. 어제 있었던 일이 꿈만 같이 느껴졌다. 머리를 감으면서도 세수를 하면서도 좀처럼 실감이 안 났고, 멍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며 일어나는 명진을 보니 더 그랬다. 바지를 갈아입으려다 희미한 노크 소리가 들린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몸서리가 쳐졌다. 진짜였나? 아니면… 지독한 악몽?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었다. 반듯한 새 셔츠를 입는 것으로 집에 올라갈 준비를 마친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입고 있던 검은색 셔츠를 펼쳐보았다. 가슴팍과 등판에 남은 희뿌연 소금기만이 절박했던 그날의 새벽을 증언해주고 있었다.

Comments

G ㅇㅇ 2021.06.06 18:07
필력 좋네요 ㅎ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