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에 대한 불교의 철학적 고찰

나는 누구인가? 에 대한 불교의 철학적 고찰

G 칼리아 1 42 05.01 13:34


짤은 화성 탐사선에서 보내온 지구의 모습이다. 지구가 마치 작은 점처럼 보인다.
인류 역사 300만년간, 모든 사람들이 저 작은 점 안에서 태어났고 죽었다.

위대한 지도자들도, 부자들도, 가난한 사람들도, 모두 저 점 안에서 태어났고 죽었다.
그리고 현재 저 작은 점 안에서 먹고 살기위해 아둥바둥 치열하게 싸우는 우리들도 언젠간 죽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그렇다면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토록 치열하게 사는 것일까?
우리는 태어나기 전에 어디에서 왔으며, 죽고 나서는 어디로 갈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옳게 사는 것일까?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까?

이런 질문들은 아마 인류 등장 이래로 끊임없이 되풀이되었을 것이며, 우리가 아는 한 아직까지 여기에 대해 밝혀진 정답이 없다.
정답이 없는 질문일지라도, 몇몇의 천재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연구해왔으며, 자신들이 생각하는 정답에 대해 나름대로의 "썰"을 풀어왔다.

오늘은 수천년 전 인도의 지식인들이 이 질문에 대해 어떠한 나름대로의 썰을 풀어왔는지 다루어 보겠다.
불교 철학은 애초에 그 뿌리를 힌두교, 혹은 브라만 교에 두고 있으므로 먼저 브라만 교에 대한 내용으로 시작할까 한다.

1. 브라만 교 (후일 힌두교)

현재 힌두교의 모태가 되는 브라만 교에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나 자신은 도대체 누구인가?"

현대과학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인간의 몸은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우리 몸의 세포들은 약 7년을 주기로 모두 교체된다.

즉, 7년 전 내 몸속의 세포들 중에서 오늘 내 몸에 남아있는 세포는 한 개도 없다.
그렇다면 오늘의 나와 7년 전의 나는 다른 사람인가?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를 알고 있는 지인은 7년동안 나를 보지 못했더라도 나를 알아볼 것이다.
왜 그러한가? 그렇다면 그 지인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오늘의 나와 7년 전의 나를 동일한 인물이라고 판단하나?

브라만 교에서는 여기에 대한 해답을 바로 아트만이라는 개념에서 찾으려 했다.
아트만이란 물질에 구애되지 않는 나의 본질, 가장 순수한 나 자신을 의미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영혼의 개념과 비슷하다.

내 몸을 구성하는 세포는 7년마다 바뀌지만 나를 이루는 나의 아트만은 변하지 않는다.
이로인해 사람들은 7년만에 나를 보더라도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죽더라도 나를 알던 사람들은 여전히 나를 추억할 것이다.
아트만은 물질적인 내 육체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완전하고 순수한 아트만은 불완전하고 열등한 신체에 갇혀있다.
그러므로 브라만 교에서는 육체를 괴롭히는 고행을 통해 순수한 아트만을 불완전한 육체에서 벗어나게 하라고 가르쳤다.

실제로 눈을 감고 조용히 명상을 하며 내 호흡을 관찰하다보면,
마치 나의 존재가 거대하고 크나큰 우주를 이루는 일부분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다.

혹은, 우주의 은하나 행성들과 같은 사진을 보면서 나도 모를 경외감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이러한 경험들은 (브라만 교에 따르자면) 모두 우리의 순수한 아트만이 육체를 초월할 때에 나타나는 것들이다.
이러한 경험들로 인해 우리는 고된 삶의 고통에서 잠시나마 해방되는 기분을 느낀다.
아트만이 육체를 초월해,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법칙에 한발짝 더 다가갔기 때문이다.
지구보다 훨씬 거대한 행성들과 더욱 거대한 항성들이 수천억 개씩 모여있는 우리 우주의 물리법칙에 내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인도 사람들은 이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법칙"을 브라만이라고 이름붙였다.
따라서 브라만 교에서는 끊임없는 명상과 수행을 통해 나 자신은 거대한 우주의 일부분임을 깨달으라고 강조한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아트만은 곧 브라만"이다. 한문으로 번역하면 범아일여. 범(브라만)과 아(아트만)은 같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행을 통해 범아일여의 진리를 깨닫고 미개한 육체가 호소하는 삶의 고됨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나의 육체에 집착하지 말고, 나의 아트만을 똑바로 직시해라.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아트만은 우주의 일부분임을 깨달아라.
그럴 때에 우리 인생의 고달픔이 사라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대 인도 철학 (브라만 교 철학)의 가르침이었다.

하지만 과연 브라만 교의 가르침이 삶의 고됨을 이겨내는 데에 충분할까?
조용히 명상을 하다보면 내 스스로가 거대한 우주의 일부분이라는 생각으로 삶에 대한 고난이 조금 해소되는 느낌이 들기는 한다.

하지만 명상을 끝내고 눈을 떠보면 다시 우리는 복잡한 일상의 소용돌이에 던져진다.
다시 바쁘게 일을 해야하고, 빚이 있다면 갚아야하고,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야한다.

즉, 범아일여의 효과는 명상을 그만두는 즉시 효력을 잃게 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나는 누구이고 우리는 어떻게 행복한 삶을 찾을 수 있을까?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 인도 변방에서 태어난 고타마 싯다르타는 브라만 교의 범아일여 사상을 반박하며 새로운 가르침을 설파한다.

이것이 바로 초기 불교의 모습이다.

브라만 교의 아트만 사상에 대해서 다루어보았다.
브라만 교에서는 절대불멸하는 나의 순수한 영혼을 아트만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려 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나의 아트만은 세상의 모든 질서를 아우르는 브라만이라는 개념과 합치시키려 했다 (아트만 = 브라만, 범아일여).

브라만 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불완전한 육체를 가진 개개인은 명상과 수행을 통해 아트만을 직시하고,
또 아트만이 브라만과 동일하다는 브라만과 동일하다는 깨달음에 이르러서 행복해질 수 있다고 했다.

즉, 삶을 고단하게 만드는 원인인 집착과 욕망은 불완전한 육체에서 비롯된 것이니,
명상을 통해 순수하고 맑은 영혼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명상의 이로움은 현대 과학에서도 깊이 연구하는 분야이다.
명상을 수행하는 도중에 우리는 편안함과 스트레스의 해소를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뿐이다.
명상을 그만두는 즉시 우리는 삶의 고됨과 고통에 직면하게 된다.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을 때는 평안했던 정신세계가,
눈을 뜨고 흘러내리는 코인 가치를 마주하거나 갚아야 할 대출 이자를 바라보면 다시 혼란 속으로 빠져든다.

따라서 아트만과 브라만의 합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해탈이나 번뇌로부터의 자유라고 말할 수 없다.

이를 바탕으로 불교의 창시자인 고타마 싯다르타는 브라만 교에 대한 반박과 자신의 철학을 전파했다. 


 

2. 초기 불교의 무아론

초기 불교의 "자아"의 개념으로는 현대 생물학적인 현상 설명이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평소엔 아무리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라도, 호르몬을 비롯한 내분비계의 이상을 겪고 있거나
혹은 알코올이나 마약 등 화학 물질의 중독 상태라면 멀쩡한 정신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현대 과학의 가르침에 친숙한 우리는 브라만 교의 아트만 개념이 얼마나 비과학적인지 알고 있다.
자아와 정신과 육체는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인데, 어떻게 육체와 분리된 "순수한 영혼"이 존재할 수 있는가?

만일 "순수한 영혼"이 존재한다면, 뇌를 다쳐도 인지능력과 감정을 비롯한 정신적인 작용이 손상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브라만 교에 따르면 뇌는 한낱 미개하고 불완전한 육신의 일부일 뿐이고, 정신적인 작용은 영원불멸한 순수 자아인 아트만에 속하는 영역이 아니던가?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진 주장인지 잘 알고 있다.

바로 이것이 싯다르타의 "무아론"의 핵심이다.

실제로 브라만 교를 수행했던 싯다르타는 아무리 수행해도 만족스러운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 했다.
싯다르타는 그 이유를 "아트만의 존재에 대한 집착"으로 보았다.

즉, 싯다르타의 이론에 따르면 애초에 아트만이란 없다는 것이다.
불완전한 육체에 대비되는 순수하고 완전한 자아란 존재하지 않았다 (이를 한자로 무아론이라 지칭).

그렇다면 지금 당장 키보드를 두드리는 나는 무엇이고, 또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아트만이 없다면 너는 도대체 누구냐?

싯다르타는 이에 대답하기 위해 오온(5온) 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바로 우리가 "나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실제로 다섯 가지 개념 (다섯 온 = 오온)으로 이루어진 그 무언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다섯가지란, 색, 수, 상, 행, 식으로, 이는 각각 다음을 의미한다.
색: 물질적인 신체
수: 내가 물질 세계를 인지하며 느끼는 감각
상: 물질 세계에 대한 나의 인식
행: 행동과 그 행동의 결과
식: 의식

이를 좀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 기원전 2세기 초기 불교의 철학자 나가세나의 기록을 참고해 보자 (나선비구경 참조).
나가세나는 오온과 "자아"의 관계에 대해 수레의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수레라는 것은 없다. 수레라고 하는 것은 결국 따지고 보면, 손잡이, 의자, 바퀴, 바큇살 등등으로 이루어진 "무언가" 일 뿐이다.
하지만 손잡이를 수레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다.
의자를 수레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다.
바퀴를 수레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다.
바큇살을 수레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손잡이와 의자와 바퀴와 바큇살을 모두 합한 것을 수레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수레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이런 부품들을 합한 것이 아니다.
각자의 부품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야만 수레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수레라고 부르는 무엇인가는 실제로 수레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수레가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수레는 실제로 내 눈앞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수레가 "영원불멸한" 수레의 모습이 아닐 뿐이다.
언젠가 낡아서 부서지고 깨지면 손잡이, 의자, 바퀴, 바큇살과 같은 부품으로 갈라질 찰나의 존재에 불과하다.
물론 손잡이, 의자, 바퀴, 바큇살 또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수레가 "있다"고 말할 수도 없고,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영원불멸한 수레의 이미지는 타당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수레가 "비어있다 (공하다)"고 표현한다.

자아와 오온의 관계도 이와 비슷한 것이다.
애초에 인간에게 (브라만 교에서 주장하는) 영원불멸한 자아 (아트만)와 같은 것은 없다.
다만 그 자아를 구성하는 색, 수, 상, 행, 식 (5온)의 개념이 존재할 뿐이다.

이렇듯 고타마 싯다르타는 아트만으로 비롯된 브라만 교의 모순을, 아트만 그 자체를 해체하면서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싯다르타에 따르면, 고통스러운 나 자신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가 자아라고 인식하는 그 무엇인가는 그저 우주의 법칙에 의해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일 (공한 존재일) 뿐,
그 어디에도 "영원불멸한 자아"와 같은 것은 없다.

싯다르타의 가르침에 따르면, 고통을 느끼는 주체인 "나"가 실존하지 않는다 (공하다)는 개념을 이해할 때,
우리의 고통은 사라지게 된다.
한낱 우주의 먼지에 불과하고, 살아왔던 기간보다 죽어있던 기간이 훨씬 더 긴 인간의 삶이 어떻게 고통스러울 수가 있겠나.

Comments

먼지 속에서 났기 때문에, 먼지 속에서 살다가, 먼지 속으로 가는것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