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 중국 바둑기사 섭위평 3명의 아내

(사주) 중국 바둑기사 섭위평 3명의 아내

G 별바다 0 4,267 2021.03.25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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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위평(聂衛平)

 

시 일 월 년

丁 乙 戊 壬

亥 未 申 辰


丁 丙 乙 甲 癸 壬 辛 庚 己 대운: 순행

巳 辰 卯 寅 丑 子 亥 戌 酉

87 77 67 57 47 37 27 17 7.2


1981년 바둑기사 공상명과 결혼

1991년 공상명과 이혼 후 배우 왕정과 재혼

2001년 4월에 왕정과 이혼, 8월에 란리아와 3혼.


바둑대왕 섭위평의 세 부인 2010년 03월 21일 작성자: 人和


바둑대왕 섭위평의 세 부인


바둑대왕 섭위평(聂卫平)은 두 번 결혼했지만 모두 실패하면서 감정세계가 한때는 진공상태였다. 그러나 최근 들어 한 공개적인 행사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그의 곁에 나타났다. 그녀가 바로 섭위평의 세 번째 부인인 란리아이다. 란리아는 섭위평보다 23살이나 어리였다. 섭위평은 란리아와 결혼한 것은 “금덩어리를 주은것”이라고 표현했다. 섭위평과 세 명의 부인들간에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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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부인 공상명


공상명은 일찍 여러 번 바둑대회에서 전국1위를 차지하였고 일본의 직업9단 바둑기사를 물리친바 있다. 그러나 결혼 후 그녀는 점차 자신의 바둑사업을 포기하고 “내조”에 전념했다. 그녀는 전심전력을 다하여 섭위평을 돌봐주었고 남편이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내조했다. 결혼한지 3년 만에 그들에게는 아들이 있었다. 세 식구의 가족이 섭위평에게 가져다준 것은 생활상의 안정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의탁이었다. 그것은 섭위평이 밖에서 성과를 거두게 하는 원천이 되였다. 이때 섭위평의 기력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섭위평의 성공은 첫번째 부인인 공상명의 도움이 아주 컸다고 바둑계인사들이 보고 있다. 공상명도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를 부인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 자신도 바둑에 대해 많은 꿈이 있었지만 그래도 섭위평의 기력이 나보다 훨씬 높다고 생각했기에 그를 도와 그가 품었던 꿈을 꼭 실현해주고 싶었다. 나는 내가 도와주면 그가 꼭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달콤했던 혼인생활이 1990년에 이르러 큰 변화가 나타났다. 섭위평은 호남 텔레비죤 방송국에서 조직한 행사에 참가했다가 우연하게 배우 왕정을 알게 되였고 두 사람은 서로 눈이 맞았다. 섭위평은 당시의 일을 이렇게 회억했다. “그때 나와 공상명의 결혼은 이미 깨여지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나는 왕정에 관하여 아내에게 전혀 말하지 않았다. 나는 말해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우리는 결혼10돐 기념행사를 조직했는데 많은 친구를 초청했다. 사실 결혼10돐 기념행사는 우리의 ‘고별연회’였다. 그러나 당시 행사에 참가했던 많은 친구들은 그 진상을 모르고 있었다. 그날 왕정과 그녀의 오빠인 왕강도 행사에 참석했었다. 녀자의 감각은 아주 뛰여났다. 당시 수백명이 있는 로비에서 나는 왕정과 거의 말을 하지 않았는데 공상명은 나와 왕정의 관계를 눈치챘던 것이다.”


후에 왕정이 임신을 했지만 아이를 지워버리지 않겠다고 우겼다. 섭위평은 어쩔수 없이 정식으로 공상명에게 이혼을 제기했다.


“여보, 우리 이혼하기요. 왕정과 같이 있으면 난 남자다왔고 너무나 행복했소. 그러는 왕정이 지금 임신을 했소. 난 아직 태여나지 않은 아이에게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오. 그러니 당신과 이혼한 후 왕정과 결혼하려 하오.”


이렇게 섭위평은 한때 동료였고 자신의 사업을 아낌없이 밀어주고 지지해준 첫 번째 부인 공상명과 이혼했다. 공상명은 이혼한 후 아들의 이름을 공령문(원 이름은 섭운총이였음)으로 고치고 한동안 일본에서 생활했다. 그녀는 아들에게 바둑에선 아버지를 따라배워야지만 다른 면에서는 절대 아버지를 따라배우지 말아야 한다고 항상 일깨워주었다. 공상명은 재혼한후 상해에서 열린 바둑대회에 참가하여 섭위평과 대적한 적도 있었지만 두 사람은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다. 지어 둘은 상대방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확실히 공상명의 마음은 섭위평의 배신을 아직도 용서하지 않은 것 같다고 외부에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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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부인 왕정


1991년, 섭위평은 첫 번째 부인 공상명과 이혼한후 인차 두 번째 부인 왕정과 결혼했다. 결혼하여 3개월만에 왕정은 아들 섭운청을 낳았다. 섭위평은 왕정을 알게 된 과정을 이렇게 기억했다.


섭위평과 왕정


“우리는 호남텔레비죤방송국에서 조직한 행사에서 서로 만났다. 행사가 끝나자 우리는 북경으로 돌아갈 때 같은 기차를 탔으며 한 침대칸에 들었다. 헤어질 때 서로 전화번호를 남겼다. 북경에 도착한 이튿날 왕정이 전화를 해서 우리는 함께 가라오케로 갔다. 우리는 가라오케에서 술을 마시면서 재미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가라오케에 갔다는것은 이미 그녀를 받아들였다는 말이다.”


섭위평과 왕정은 서로 사랑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말밥에 오를까봐 걱정되여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당시 왕정은 중국인민해방군총정치부 부근에서 살았는데 섭위평은 왕정을 만나러 갈 때마다 모자를 꾹 눌러쓰고 사람들의 눈치를 피해 다녔다. 왕정도 섭위평을 만날 때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종이로 불을 감쌀수 없듯이 두 사람의 관계를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였다.


섭위평에게 왕정과 그만두라고 조언해주는 사람들도 많았다. 왕정의 상급에서도 그녀를 찾아서 섭위평과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을 내놓았다. 심지어 그만두지 않는다면 그녀를 신강으로 보내겠다고 했다. 섭위평은 당시 왕정과 그다지 깊은 애정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완전히 정신적인 공허감으로 잠시 그녀와 접촉한 것이다. 나중에 사람들이 압력을 가하자 섭위평은 오히려 강해졌다. 섭위평은 자신의 선택이였지만 나중에 자신이 아주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섭위평과 왕정의 결혼생활은 그다지 순조롭지 못했다. 섭위평자신도 두 번째 결혼을 이렇게 평가했다.

“우리 둘은 전공이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사업적으로 서로 도와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녀는 자주 공연을 떠났고 나는 자주 시합을 했기에 둘이 진정으로 감정을 교류할 시간이 너무나 짧았다. 일상생활에서 나는 의존형이였는데 왕정의 도움이 필요했다. 하지만 왕정은 사업형 여자이므로 집안일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우리는 각자의 전공에서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지만 집안일을 서로 돌보지 않았다. 당시 나는 아주 짜증났다. 사람이 짜증이 나면 사람들의 간섭을 받지 않는 조용한 곳에서 살고 싶어한다. 이것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짜증이다. 난 너무나 짜증이 났다.”


2001년에 섭위평은 자신의 두 번째 10년간의 결혼생활을 결속지었다. 왕정은 섭위평과의 사랑을 이렇게 회억했다. “처음에는 우리도 신혼부부들처럼 참 행복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서로 감정이 멀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바둑시합에서 졌을 때 아주 기분이 나빴다. 기분이 나쁠 적마다 아내에게 화를 냈다. 우린 애호가 서로 달라 낭만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아왔다. 하여 결혼하여 생활한지 10년이 되지만 순탄하지 않은 10년이었다.”


2001년 4월, 섭위평은 상해로 가서 섭위평바둑(棋牌)구락부를 꾸렸다. 거기서 그는 처음으로 구락부의 고객담당부장인 란리아를 만났다. 섭위평은 비록 이미 두번이나 혼인에서 실패했고 이미 50에 가까운 나이였지만 아름답고 서글서글한 란리아에게 마음이 동했다. 섭위평은 이런저런 구실을 대고 자주 그녀를 만나 사랑의 공세를 들이댔다. 두 달후 두 사람은 련애 관계로 발전했다. 2001년 8월, 섭위평은 란리아와 그녀의 고향인 귀주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섭위평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것이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나이가 20여세나 차이난다. 모든 면에서 차이가 너무나 크므로 때론 세대 차이를 느낄 때도 있다. 그러나 서로 아주 잘 어울리고 즐겁게 지낸다. 결혼할 때에도 나는 꼬물만치도 망설이지 않았다. 나는 마치 금덩어리를 주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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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부인 란리아


세 번째 부인에 대하여 섭위평은 아주 만족해했다. 란리아는 예쁠 뿐만 아니라 생활을 아주 잘 운영하는 여인이였다. 란리아는 매일 집에서 남편의 입맛에 맞는 밥상을 준비했다. 하여 섭위평이 집안에 있는 시간이 자연히 많아졌으며 술 마시는 것도 절제했다. 이런 아내가 있음으로 하여 섭위평이 옷 입고 분장하는 것도 과거보다 훨씬 깔끔해졌다. 섭위평은 세 번째 부인을 늘 자랑했다.


“세 번째 결혼은 먼저 번 결혼과는 확실히 다르다. 그와의 결혼은 장애가 있었고 세속적인 압력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난 모든 것을 이겨내고 그녀와 결혼을 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공동언어도 많았다. 하여 나는 일이 없으면 늘 집에 머물렀다. 좋은 아내를 두었기에 나는 거의 밖에 나가지 않는다. 그리고 집에 있으면 핸드폰도 켜놓지 않는다.”


섭위평은 세 번째로 만난 부인 란리아에 대해 확실히 만족해하고 있으며 끝까지 살아갈 동행자라고 자랑했다.


<육친풀이>


丁 乙 戊 壬

亥 未 申 辰


丁 丙 乙 甲 癸 壬 辛 庚 己 대운: 순행

巳 辰 卯 寅 丑 子 亥 戌 酉

87 77 67 57 47 37 27 17 7.2


공개가 된 아내 3명에 맞추어 <단순육친물상법>으로 아내의 품평을 감정해 보려고 합니다.


첫번쩨 아내 공상명은 년지의 진토이고

두번째 아내 왕정은 월간의 무토이고

세번재 아내 란리아는 일지 미토입니다.


진토 공상명은 임진년주의 진토로써 임수의 뿌리가 되면서 임수의 생장을 도와 임수가 을목일간을 생하는데 공헌하는 물상입니다. 곧 현모양처의 상입니다.

 

월간 무토는 을목옆에 첩신하여 바로 안착이 가능하고 토생금하여 신금 정관을 생하는데 이 신금은 을목에게는 정관이므로 명예와 관록을 안겨줄 수가 있는 것이지만 을목을 자르는 도끼물상도 되므로 위태한 여자가 될 수가 있겠죠.

 

세 번재 여자 란리아는 일지에 안착이 되고 미토는 을목의 고지이니 뿌리도 되고 묘고지도 되므로 공처가의 상이 될 수가 있겠습니다. 시지 해수와 합하여 해을미(亥+乙+未)합의 준합국을 하는 것이므로 만년에 귀록이 되는 여자로 합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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