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비우스의 띠

뫼비우스의 띠

26 아르테미시아 0 6,295 2020.06.27 14:38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이런 경험이나 기억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가령, 누군가와 어떤 장소에서 대화를 했는가는 생생히 떠오르지만 대화 내용이나 시기가 떠오르지않는 기억.


혹은, 분명 어디선가 한번쯤 겪었던 것 같긴 하지만 그게 도대체 언제인지 떠오르지 않는 기억.



내 경험을 말해보자면 이렇다.



그게 언제인지 어느 장소인지는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다만, 붉게 노을이 지는 한적한 공원에서 나 혼자

그네를 타고 있었다는 것정도는 확실하게 기억이 난다.


기억속에서의 나는 확실히 어렸던 것 같다. 일단 놀이터의 그네를 타고 있었다는 점도 그렇지만...



"꼬마야, 안녕? 이름이 뭐니?"



"....."



"꼬마야?"



"....엄마가 낯선 사람이랑 이야기하지 말랬어요."



"허허..아저씨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에요."



"....난 엄마 말 잘들어요. 아저씨랑 이야기 안해요."



"흐음..곤란하게 되었네..좋다 꼬마야. 그러면 아저씨가 여기에 서서 혼자 이야기할테니 너는 듣기만 하거라. 어때?"



"..맘대로 하세요."



그렇게 그 아저씨는 나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채로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해주었던 것 같다.


분명 중요한 내용이었겠지만, 그 당시의 어린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었기에 지금에 와서는 전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물론 그 이야기가 기억이 나서 이해하기 힘들었다는 것을 안다기보단 어렴풋한 느낌만 남아있었기에..)



가끔씩 멍하니 앉아있을때면 어김없이 그 때의 기억이 떠올라서 내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곤 했지만

설마 지금에 와서도 이 기억이 내 머릿 속을 맴돌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래, 지금 내 눈 앞에 트럭의 범퍼가 떡하니 놓여있는 이 상황에서 말이다.









#









"그...그게 정말인가요..?"



"당연하지. 난 당신같은 망자에게까지 거짓말을 하면서 등쳐먹을 정도의 위인이 아니거든."



"그러니까 당신 말은..내가 트럭에 치여서 즉사를 했고, 지금 여기는 이승도 저승도 아닌 중간 세계의 영역이고,

당신은 나 처럼 억울하게 한방에 골로간 사람들에게 한번의 기회를 더 주는 역할을 하는 인도자란 거요?"



"대충 뉘앙스는 그런거지."



"그리고 지금 나에게 한번의 기회를 더 주겠다고요? 살아갈 수 있는?"



"물론."



"대..대가는?"



"이봐이봐. 이승에서 굴러먹던 썩어빠진 자본주의의 논리로 날 몰아세우지마."



"대가가 없다는 겁니까?"



"이사람아. 죽은 사람들에게까지 등골을 빼먹을 만큼 나쁜사람처럼 보이나, 내가?"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트럭에 치여서 한순간 골로 갔다기엔 내 몸상태는 평소와 다름없이 말끔했고,

내가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영화에서나 나오는, 구멍난 검은 날개의 악마 혹은 백의의 천사가 아니고

그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깡마른 노인이라는 것 자체가 신빙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리있는 그의 설명과 내 아래로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지금 이 상황을 알아 챈 이후로는 그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당신이 태연하게 하늘 위로 날고 있다면 안 믿을 수 있겠는가?)



"그...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하는 겁니까?"



"간단해. 당신의 기억 속에서 가장 강하게 박혀있는 그때로 내가 당신을 돌려보내줄거야. 그러면 당신은

그 시대에 존재하던 '과거의 당신'을 죽이고 그 세계를 차지하면 되는거지."



".....?!"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런거지.


사람들은 자각하지 못하지만, 세상은 수백개 혹은 수천개의 동일 시간대를 가진 여러 세계로 구성되어있어.


예를 들어 지금 이 밑을 걸어다니고있는 저 수많은 사람들은 수백,수천개의 평행한 자신을 가지고있는거야."



"전..전혀 간단하지 않아요."



"흐음..그래. 도플갱어라고 들어봤지?"



"예.."



"그래, 도플갱어가 바로 그런거지. 나와 똑같은 나."



"흐음..."



"거참 엔간히 이해를 못하는구만..잘 들어봐. 예를 들어 1990년의 자네는 한명이 아니란거야.


수백명, 아니 수천명에 이르는 1990년의 자네가 존재하는거지.


다만 그 수천명의 자네는 시간의 균열 속에서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는거야.


시간의 축이 다르단거지. 결국 같은 시간이지만 다른 세계에서 존재한단거고."



"아..."



"하지만 지금의 자네는 죽어버렸기에 자네가 살던 세계에서는...아 자네 이름이 뭔가?"



"이..종혁..이라고 합니다."



"그래. 이종혁. 지금 자네가 살던 세계에서 '이종혁'이란 존재는 사라져버린거야. 소멸된거지."



"..."



"하지만, 소멸된 건 겨우 하나의 '이종혁'에 불과한거지. 그렇기때문에 자네는 시공간의 축을 비틀어서

다른 세계의 이종혁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여.."



"이동하여.."



"그를 죽이고 그 자리를 자네가 차지하면 되는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아..."



"휴, 겨우 이해가 끝났나보군."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을 수 없다기보단 기뻤다.


당연하지 않은가? 한번 죽었던 내가 또다른 삶을 영위하게 된다는데..



거절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무조건 받아들이고 새로운 기회를 얻고 싶었다.


그러한 내 맘을 알았는지, 그가 되물었다.



"자, 자네의 기억 속에서 가장 강력한 기억은 무엇인가?"



기억해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죽은 사람은 원래 살아생전 가장 강했던 기억만이 원념으로 남는다고 했던가?



죽기 바로 직전까지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그 때의 기억은 무엇보다도 빠르게 내 뇌리에 파고들었다.



"호오..꽤나 특별한 기억이구만..보통은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순간, 가장 억울했던 순간을 기억해내기 마련인데..."




"그런가요..?"




"뭐 아무렴 어떤가. 좋아, 돌려보내주겠네."



"정..정말인가요?"



"다만."



"다만...?"



"주의할 것이 하나 있지. 아, 뭐 자네가 몰라도 살아가는데에는 지장이 없었겠지만 양심에 찔려서말이지."



"그..그게 뭐죠..?"



"기회는 평등하다."



"...예?"



"이해가 안되도 상관은 없네. 그렇다면 이제 시간을 비틀어볼까?"



순간이었다.



내 눈 앞에 보여지던 파란 하늘과 그 속에서 나를 바라보던 노인의 모습이 아지랑이처럼 비틀어지기 시작했고, 이내 내 눈앞은 깜깜해졌다.









#










점멸된 내 시야가 다시 밝아 온 것은 얼마 지나지않아서였다.



내 눈앞에는 내 기억 속에서 그토록 지워지지 않았던 바로 그곳이 펼쳐져 있었다.


바알갛게 노을이 지는 하늘.


한적한 공터


그리고....



"꼬마야, 이름이 뭐니?"



"....."



"꼬마야...?"



"....엄마가 낯선 사람이랑 말하지 말랬어요."



뭔가가 굉장히 익숙한 상황..



왠지모를 찝찝함이 내 등을 훑고 지나갔지만, 살고싶다는 원념만이 남은 나는 그런 감 때문에 기회를

잃고싶지는 않았다.



"하하. 종혁이 이녀석! 정말 똑부러지는구나!"



"어..?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요?"



"당연하지. 아저씨가 엄마 친구거든!"



"정말요..?"



"그래. 아니면 아저씨가 종혁이 이름을 어떻게 알겠니!


오늘 엄마가 일때문에 늦으신다고 종혁이 좀 집에 데려다 달라고 아저씨한테 부탁하셨거든."



간단했다. 저 꼬마녀석은 어렸을 때의 나.


어렸을 때 우리집은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어머니께서 생계를 유지하고 계셨다.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우리집은 맞벌이가 되었고, 일주일에 한번 집에 돌아오시는 아버지와

밤 늦게까지 일을 하셔야만 하던 어머니 사이에서 난 혼자이기 일쑤였다.



어쩌면 지금 이 기억이 내 뇌리에 강하게 박힌 이유는

항상 외로움 속에 노출되어있던 그 때의 나에겐

모르는 아저씨의 그 작은 호의가 따듯하게 느껴져서 였을지도 몰랐다.



"종혁이 이제 아저씨랑 집에 갈까?"



"네! 아저씨는 착한 것 같아요. 헤헤."



...차마 그 아이와 눈을 마주칠 수는 없었다.











#











일을 끝낸 내 얼굴은 온통 젖어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렀던 걸까?



막연한 미안함..?


아니면

내 기억 속에서 되살아난 유년시절의 외로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옴과 동시에 느껴지던 두통이 너무나도 마음에 걸렸다.



뭔가 해서는 안될 짓을 해버린 느낌이었고,

그 해서는 안될 짓이라는 것이 내 기억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었던 행위라서

더욱 아팠다.



"됐어..다시 살았잖아..다시 돌아왔잖아..이제 된거야."



그렇게 나를 위로했다.



"어짜피 내가 날 죽인거잖아? 자살한거나 다름없는거야. 그 것도 꿈 속에서..난 살아있으니까."



그렇게 나를 합리화시켰다.



흐르는 눈물과 멈추지 않는 심장박동이 '넌 살인을 저질렀어!'라고 소리치고 있었지만

이성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사기수단으로써 난 나를 합리화시키고 있었다.



"살아있으면 된거야..살아있으면..."











#









뫼비우스의 띠...라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아마 세상을 살다보면 여러가지 비유로, 혹은 그 원리 자체로써 우리 주위에 많이 떠도는 뫼비우스의 띠를 접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뫼비우스의 띠라는 것을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교 만들기 시간이었던 것같다.



그날은 유난히도 비가 많이오던 한여름이었기 때문에 체육시간이 만들기 시간으로 바뀌어버렸고,

워낙 체육을 좋아하던 천방지축의 나로써는 그 상황이 무척 원망스러웠었다.



"자, 오늘은 이 길쭉한 색종이를 가지고 뫼비우스의 띠라는 것을 만들어볼거에요!"



뫼비우스의 띠...


무한하게 연결된, 끝이 없는 루프...무한궤도..



아마 어린이들에게는 뫼비우스의 띠라는 것이 굉장한 재미로 다가왔을 것이다. 손을 짚어서, 아니면 눈으로라도

쭈욱 따라가보면 끝이 나올 것 같았는데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신비의 끈...



물론 호기심이 강했던 나에게 있어서도 뫼비우스의 띠라는 것은 굉장히 재미있는 무언가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 만들기 시간이 하필 체육시간과 바뀌지 않았더라면...



"종혁아~이거봐,이거봐! 막 따라가도 안끝난다! 자 봐봐....어?"



"이딴 종이가 뭐가 재밌다고!"



호기심에 가득차서 나에게 자랑하러 왔던 친구 녀석의 작품을 나는 그대로 찢어버렸던 것같다.


물론 친구 녀석은 두 눈에 눈물을 가득 채운 채로 선생님에게 쪼르르 달려갔고,

그날 나는 선생님에게 엄청 혼났다.



억울했다.


애초에 잘못한 것은 체육시간을 마음대로 바꿔버린 선생님 잘못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끝을 알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


그 딴건 끊어버리면 그만이었다.



끊어버리면, 잘라버리면..


더이상 이어지지 않을테니까.










#










"너..넌 누구야..? 나한테 왜이러는건데..?"



사필귀정..


모든 것은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된다.



아..지금 이 상황에는 그닥 맞는 속담은 아닌 것같지만...그냥 이 단어가 떠올랐다.



주위는 어딘지 알 수없는 커다란 밀실..그리고 내 앞에 칼을 들고 서 있는 남자.



조금전까지만해도 가족들과 단란한 저녁식사를 끝내고 그들을 집으로 보낸 뒤에 회사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가벼운 접촉사고로 인해 시간이 지연되고, 짜증이 날대로 난 나는 차에서 내려 앞 차 쪽으로 다가갔고

순간 정신을 잃었다.



"나..나한테 왜이러는거야?"



"뭐..당신에게 악감정은 없어. 오히려 고맙지."



"돈..돈이 필요한거야? 돈이라면 얼마든지 줄게. 난 죽으면 안돼. 가족이 있단 말이야."



"그래 그건 고맙게 생각해. '내 가족'을 그렇게 사랑해주는거 말이야."



"..무슨 소리야..?"



"돈?? 크큭..이봐이봐. 돈도 생명이 있어야 좋은거 아니겠어? 그딴 썩어빠진 자본주의의 논리로 이제 겨우

새 생명의 기회를 잡은 나를 희롱하는거야?"



분명...어디서 들었던 소린데...자본주의...



"원..원하는 게 뭔데..?"



"니 목숨."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방금 기절상태에서 깨어난 나로서는 나와 닮은, 아니 나와 똑같은 저 사내에게 이길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회는 평등하다.』



생각해보면 간단한 이치였다.


수백 수천개의 평행세계 속에서 내가 또다른 나를 '죽이고' 다시 태어났다면,


죽임을 당한 또다른 나에게 있어 그 죽음은 '억울한 죽음'.



결국 또다른 나 역시 그 빌어먹을 영감탱이를 만났을테고,


평행이론이니 자본주의니 하는 엿같은 사탕발림에 놀아나서 또다른 세계의 나를 죽이게 되겠지.



그렇게 모두 이어지는 거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대가? 빌어먹을 자본주의?



확실히 그 노인에게 대가는 필요 없을 것 같았다.



내가 그 노인의 꾀임에 넘어가서 나를 죽인 바로 그 시점부터

나는 노인에게 '재미'라는 대가를 선물로 주었을 테니...










#









"꼬마야, 안녕? 이름이 뭐니?"



"....."



"꼬마야?"



"....엄마가 낯선 사람이랑 이야기하지 말랬어요."



"허허..아저씨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에요."



"....난 엄마 말 잘들어요. 아저씨랑 이야기 안해요."



"흐음..곤란하게 되었네..좋다 꼬마야. 그러면 아저씨가 여기에 서서 혼자 이야기할테니 너는 듣기만 하거라. 어때?"



"..맘대로 하세요."



"꼬마야. 지금 너는 이해 못하겠지만 나중에라도 니가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한 할아버지를 만나게 될지도 몰라.


그 할아버지는 너한테 짜잔!하고 나타나서는 다시 살아날 수 있게 해준다면서 너를 유혹할거야. 그래, 마치 슈퍼용사처럼 말이야.


하지만 그런 꾀임에는 절대로 속아넘어가서는 안돼. 

세상에는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기 마련이고 자신의 행동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거든."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요."



"그냥 듣기만 해. 나중에라도 니가 이 기억을 떠올릴수만 있다면 그걸로 된거니까. 아저씨는 살해당했어.

아저씨 자신에게. 

그리고 아저씨를 죽인 그 사람도 자신에게 살해당했고, 그 전에도, 그 전에도 마찬가지야.


뫼비우스의 띠라고 알고 있니? 무한하게 이어지는 궤도..그래. 그저 무턱대고 따라가기만 한다면 절대 끝을 볼 수 없어.


끊어야해. 그래서 아저씨가 너에게로 온거야. 이 아저씨는 나를 마지막으로 이 빌어먹을 뫼비우스의 띠를 끊어버릴거야.


하지만 걱정되는건 이 아저씨가 끈을 끊어버려도 또 다른 곳에서 뫼비우스의 띠가 만들어지는 거야.

그래서 너한테 온거고."



"뫼비우스의 띠 오늘 학교에서 만들었는데...내가 다 찢어 버렸어요."



"그래 그거야. 뫼비우스의 띠는 절대 따라가서는 안돼. 끊어야해. 알았지? 절대 뫼비우스의 띠를 이루는 선이 되지마."



"....이상한 아저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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