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지곤 - 서리를 밟으면 굳은 얼음에 이른다

중지곤 - 서리를 밟으면 굳은 얼음에 이른다

G 미리내 0 2,937 2021.02.17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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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2대왕 정종은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드라마에서는 흔히 권력의지가 없는 나약한 군주로 묘사되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정종은 조선 개국 전 아버지 이성계를 따라 전장을 누비던 전형적인 무사였다.

 

아버지를 수행해 지리산의 왜구를 치기도 했으며 황산대첩과 위화도 회군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체격도 곰을 닮아 제법 우락부락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방원(태종)이 정몽주를 척살할 때도 정종은 조영규(이방원의 심복), 이화(이성계의 이복동생), 이제(경순공주의 남편) 등과 함께 거사에 가담했다. 아버지 이성계가 정몽주 제거를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방원 편에 선 걸로 볼 때 나름의 정치적 계산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정몽주가 살해된 후 총대를 멘 인물도 정종이었다. 정종은 공양왕을 찾아가 거사 사실을 알린 후 자신들을 처벌하든지 정몽주 측근들을 처벌하든지 양자택일하라고 공양왕을 압박했다.

 

뿐만 아니라 정종은 조선 개국 후 정도전과 남은 등 일부 재상들에게 권력이 지나치게 쏠리자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정종에게는 나름의 권력의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종은 왕자의 난을 계기로 현실주의자로 돌아서 권력과 거리를 둔다.

 

서열로 보면 자신이 이방원보다 위였지만 세력으로 볼 때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에 오른 것도 그의 의지와는 무관했다. 조선의 2대 왕위는 이방원이 정치적 숨고르기 차원에서 형에게 잠시 자리를 맡겨 둔 것이었다.

 

정종은 실권이 없는 명목상의 왕에 불과했다. 세종 때 발간된 <용비어천가>에서도 정종은 왕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정종이 왕으로 인정됐더라면 ‘해동 육룡이 나르샤’가 아니라 ‘해동 칠용이 나르샤’가 되었어야 했다. 그 후로도 그에 대한 조선 왕들의 인식은 변하지 않았으며 그가 정식 왕으로 묘호를 받은 것은 숙종 때였다.

 

정종에게 현실감각이 없었다면 왕위에 오른 후 헛된 욕망을 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종은 냉철했다. 한시적인 왕이라는 사실을 한 시도 잊지 않았다. 재위 2년 동안 정종은 정치적인 문제와 관련 자신의 목소리를 거의 내지 않았다.

 

신하들이 올리는 문서에 형식적으로 결재만 했을 뿐 국정 운영에 특별한 리더십을 발휘하지 않았다. 자연히 여가 시간이 많아졌고 그 시간을 때우기 위해 그가 전념한 것은 격구였다. 요즘의 골프 비슷한 격구는 무료한 왕이 시간을 때우는 데 제격이었다.

 

재위 2년간의 조선왕조실록 공식 기록에 격구 관련 기사가 무려 19번이 나올 정도로 정종의 격구 사랑은 대단했다. 하루는 사관이 격구 현장에 나타나 기록으로 남기려 하자 "격구 하는 일도 사책에 쓰는가?" 하며 제지하려 했다.

 

사관이 "인군의 거동을 반드시 쓰는데, 하물며 격구 하는 것이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자 정종은 고려시대 때도 사관들이 왕들의 여가시간을 기록으로 남겼는지 알아보겠다며 <고려사>를 올리라고 명하기도 한다.

 

조정의 신하들 가운데는 격구를 즐기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보니 24시간 그의 곁을 지키는 환관들이 격구의 주된 파트너가 되었고 격구를 하는 도중 환관들은 왕을 상대로 각종 로비를 했다.

 

신하들은 환관정치의 부활이라며 왕을 격하게 성토했다. 하지만 정종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건강상 이유로 격구를 즐기는데 신하들이 왈가왈부하는 것이 부당하다며 오히려 신하들을 나무랐다. 그러자 신하들은 정식으로 상소문을 올려 임금을 견제하려 했다.

 

정종 1년(1399년) 12월 1일 사헌부에서 올린 상소문이다.

 

"대저 환관의 해는 사책(史冊)에 실려 있어서 밝게 알 수 있습니다. 모조리 들기는 쉽지 않으니, 우선 근래의 이목(耳目)에 미친 것을 가지고 논(論)하겠습니다. 김사행(金師幸)은 기이하고 교묘한 것으로, 조순(曹恂)은 아첨하고 간사한 것으로 모두 총행(寵幸)을 받아, 서로서로 의지하여 그 세력이 중외(中外)를 기울게 했습니다. (중략) 《주역(周易)》에 말하기를, ‘서리를 밟으면 굳은 얼음에 이른다.’고 하였으니, 국가를 가진 자가 기미를 막고 조짐을 막는 데에 있어서 그 시초를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상소문에 인용된 구절은 주역 64개 괘 중 두 번째 괘인 곤괘(坤卦)에 나오는 말이다. 땅을 상징하는 가 아래위로 겹치게 놓여 있어 중지곤(重地坤)괘로도 불린다. ‘서리를 밟으면 굳은 얼음에 이른다.’는 문장의 원문은 이상견빙지(履霜堅氷至)다.

 

서리는 일의 시작 단계에서 나타나는 조짐을 뜻하고, 굳은 얼음(堅氷)은 장차 닥칠 큰 환난을 상징한다. 환란은 그것이 더 커지기 전에 미리 싹을 잘라야 한다는 의미로 쓰이며 유비무환과 같은 맥락의 가르침을 갖고 있다.

 

사헌부는 정종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환관들의 세력이 더 커질 경우 국정이 크게 문란해질 수 있다고 판단하고 미리 그 싹을 자르기 위해 상소를 올렸던 것이다.

 

그러나 정종은 사헌부의 상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상소문은 그 후로도 계속 이어졌지만 정종은 여전히 환관들과 격구를 즐겼다. 환관들은 노골적으로 이권에 개입 국고를 축냈으며 그것은 임시국왕 정종의 정치적 수명을 더 단축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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