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에 일가견이 있었던 조선시대 왕들

주역에 일가견이 있었던 조선시대 왕들

G 미리내 0 3,670 2021.02.13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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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지는 조선시대 관료들 가운데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천재다. 수학과 천문학에 특히 뛰어나 세종시대 때 역술 편찬 작업을 주도했고, 문장도 뛰어나 훈민정음 해례본의 서문을 쓰기도 했다.

 

다방면에 뛰어났던 세종도 정인지에게 한 수 배울 정도였다. 관운도 타고나 태조 때부터 성종 때까지 9대에 걸쳐 벼슬을 했다. 과거시험에서 태종이 직접 장원으로 선발해 중용하기 시작했으며 세조 때에는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하지만 단종의 척살을 주장하는 등 비정한 선비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으며, 엄청난 치부로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두주불사의 애주가였으며 그 때문이었는지 술로 인한 실수담이 많이 전해진다. 특히 술에 취해 세조를 ‘너’라고 불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정인지는 주역에도 뛰어났다. 세조 때 행해졌던 주역구결(周易口訣, 주역에 한자 토를 다는 작업)을 주도했으며, 주역을 강하는 경연에서는 다른 신하들을 압도했다. 1457년(세조3년) 4월 9일의 조선왕조실록 기사에는 정인지가 주역을 모르는 신하들에게 술로써 벌을 내려야 한다고 발언하는 대목이 나온다.


임금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받고 정사를 보고는, 이내 술자리를 베풀었다. 임금이 술에 취하여 영의정(領議政) 정인지(鄭麟趾)에게 명하여 일어나 춤을 추게 하고, 대사헌(大司憲) 김순(金淳)에게 명하여 마주 서서 춤추게 하였다.

 

이내 병조참판(兵曹參判) 구치관(具致寬)에게 전교(傳敎)하기를, "내가 군정(軍政)에 생각을 두어 밤에도 편안히 잠자지 못하니, 비록 술이 취함에 이르러도 또한 잊지 못한다." 하였다.

 

정인지가 인하여 《주역(周易)》의 이치를 논하면서 김순(金淳)과 어효첨(魚孝瞻)을 돌아보고 물으니,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정인지가 아뢰기를, "문신(文臣)이 되어가지고 주역(周易)을 알지 못하니, 마땅히 술로써 이를 벌주어야겠습니다."


조선시대 임금들은 정사를 끝낸 후 편전이나 사정전에 술자리를 마련해 신하들의 노고를 위로하곤 했다. 이날의 술자리도 그런 취지에서 마련되었는데 임금이 영의정과 대사헌에게 춤을 추라고 할 정도로 술판이 크게 벌어졌다.

 

세조와 신하들 모두 크게 취했다. 기사의 말미에는 정인지가 부축을 받고 귀가했다는 대목도 나온다. 세조는 병조참판에게 ‘술에 취해도 군정(軍政)에 대한 걱정을 잊지 못하겠다.’며 병무에 관한 일을 철저히 챙기라고 지시한다.

 

세조의 이 말을 받아 영의정 정인지가 주역을 인용해 몇 마디 덧붙였던 모양인데 구체적인 내용이 기술되어 있지 않아 주역의 어느 대목을 인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그 뒤의 장면이다.

 

정인지는 자리를 함께 한 김순, 어효첨 등에게 주역을 아느냐고 물었고 이들이 모른다고 답하자 ‘문신이 되어 주역을 모르다니 술로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일갈한다. 취중에 농담조로 한 말이겠지만 다분히 뼈가 있는 말이었다.


 

세조도 주역에 일가견이 있었다.

실록의 기록으로 볼 때 조선시대 군주들 가운데 세조만큼 주역에 밝은 사람도 드물었다.

 

세조는 신하들에게 업무를 지시하면서 주역의 괘를 상황에 맞게 정확하게 인용하는가 하면 주역의 괘를 주제로 시를 짓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주역의 괘사를 취해 세자의 자를 직접 짓기도 했으며 강연을 주관하는 시강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역(易)》과 같은 서책은 지극히 정미(精微)하여 상경(上經)·하경(下經)은 깨치기 쉬우나 도설(圖說)·계사(繫辭)는 더욱 정미(精微)하니, 이 책에 밝으면, 이른바 ‘바닷가에서 물을 본 자는 물의 깊음을 말하기 어렵다.’고 한 것처럼 많은 서책을 다스리지 않더라도 스스로 밝아질 것이다.”(1456년 3월 18일 자 세조실록) 말년에는 주역 수뢰둔(水雷屯)괘의 효사를 인용해 자신의 과거 업보에 대한 회한의 감정과 함께 과도한 행정집행에 대한 우려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내가 잠저(潛邸)로부터 일어나 창업(創業)의 임금이 되어 사람을 죽이고 형벌한 것이 많이 있었으니, 어찌 한 가지 일이라도 원망을 취함이 없었겠느냐?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소정(小貞)은 길(吉)하고 대정(大貞)은 흉(凶)하다.’ 하였는데, 이제 사거(徙居)·군적(軍籍)·호패(號牌) 등의 대사(大事)를 한꺼번에 아울러 거행하니, 비록 국가에는 매우 이(利)롭다 하더라도 어찌 대정(大貞)인데 원망함이 없겠느냐?" (1468년 5월 28일 자 세조실록)

 

주역을 모르는 신하들에게 술로 벌을 줘야 마땅하다고 한 정인지의 말은 주역 공부를 기피하는 신진 선비들의 세태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인지의 연배가 세종과 엇비슷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세조의 입장에서 볼 때 정인지의 말은 연하의 젊은 군주인 세조 자신을 향한 질책으로 들릴 수도 있었다.


아무리 취중이라 해도 왕으로서는 감정이 상했을 법한 발언이었다.

그래서 세조는 한나라 개국 공신이었던 한신과 팽월의 사례를 들면서 정인지에게 경고 메시지를 날린다.

 

한신과 팽월은 한나라 개국 후 모반을 시도하다가 유방에게 척살 당한 인물이다. 정인지가 비록 계유정란의 1등 공신으로 책봉돼 벼슬이 영의정에까지 올랐지만 지나치게 나대면 한신이나 팽월처럼 될 수도 있다는 경고였다.


정인지는 한나라 개국 초기에는 한신이나 팽월에 대한 유방의 대접에 일말의 소홀함도 없었다며 큰 웃음으로 답한다.

세조의 의중을 슬쩍 비트는 노회한 방식으로 국면을 벗어나려 한 것이다.

 

세조도 웃음으로 답하고 상황을 마무리한다. 정인지의 언행이 다소 과한 측면이 있지만 자신의 취약한 정통성을 보완해주는 뛰어난 테크노크라트를 함부로 쳐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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