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윤회, 그리고 업보

죽음, 윤회, 그리고 업보

G 버들 0 4,406 2021.01.14 03:21


인간은 윤회를 하며 생명을 부여받는다는 사실을 굳게 믿을 때 우리 인생은 결코 백 년의 짧은 세월에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 이 생이 끝나면 다음 생이 시작되고 태어나면 죽고, 죽으면 다시 태어 나고, 이렇게 끊이지 않고 생이 계속되므로 희망이 무한합니다. 

나무를 태울 때 나무 한 토막이 다 타고 나면 다시 한 토막을 얹고 이렇게 한 토막 한 토막 얹다 보면 비록 나무는 각각 다르지만 계속 타들어 감으로써 불길은 영원히 타오르는 것처럼 우리는 육도 속을, 때로는 평범한 사람으로 또 때로는 천상 사람으로 형태를 바꾸며 윤회하지만, 그러나 생명의 불길은 꺼지지 않고 타오르며 지혜의 등 또한 영원히 타오르고 있습니다. 

윤회는 우리의 생명을 우주와 하나가 되게 하고 과거와 현재를 상존케 하며, 만겁이 지나도 우리의 생명을 더욱 새롭게 합니다. 

사람들은 만인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고 말하지만, 법망은 넓고 성글어 때때로 빠져나갈 구멍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교는 모든 사람은 오직 인과와 윤회 앞에서만이 평등을 누릴 수 있다고 봅니다. 고관대작이나 귀족 평민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은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두목(杜牧)은 그의 시에서 '이 세상에서 공평한 것은 오직 흰 머리카락, 귀인의 머리라고 해서 결코 너그럽지 않다' 했으니 시간과 세월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판사이며 생로병사는 아무도 차별하지 않는 재판관입니다. 

인과와 윤회는 결코 염라대왕이나 귀신에 의해서 조종받는 것이 아니며, 하느님이나 조물주라고 해서 지배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각자의 뒤바뀐 행위가 가지가지 업식을 불러일으키고, 그 업식이 천차만별의 고락의 과보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느 여섯 살 난 신동(神童)의 수학적 재능을 대학교수들조차 따라갈 수 없는 사례가 있는데 그의 천부적 재능은 결코 금생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과거 생부터 누적되어 온 것입니다. 이를 두고 일반 사람들은 전생부터 닦아 온 지혜라고 하지만 사실은 윤회입니다. 

윤회는 신의 지배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하지만 그 윤회를 지배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업력입니다. 모든 화나 복은 바로 우리 자신이 짓고 받는 것으로 윤회의 관점에서 보면 유정중생(有情衆生)은 완전한 자유평등의 개체로서 스스로 즐겁고 행복한 인생을 창조하기도 하고 비참하고 불행한 인생으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귀신은 하늘을 속일 수도 없고 우리의 죄업을 은폐시켜줄 수도 없으며, 또한 우리가 이미 소유한 공덕과 행복을 박탈할 수도 없으니, 인과란 윤회 앞에 투기라든지 요행이라는 말은 있을 수없고 오로지 자기자신만이 조물주가 될 뿐입니다. 

더러는 과거와 미래를 알 수가 없는데 현실 생활 가운데서 어떻게 윤회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합니까? 하고 반문합니다. 자 그러면 이런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어떤 사람이 남의 수박밭에 들어가 주인의 허락도 없이 수박을 따먹었습니다. 

주인은 이 광경을 보고,"네가 감히 내 수박을 따먹다니!" 

주인은 화가 나서 그를 꽉 붙잡고 야단을 쳤습니다. 그러나 수박을 훔친 사람은 태연했습니다. 

"나는 당신의 수박을 훔치지 않았소." 

"뭐라고 이 수박은 내가 심은 것이야. 지금 내 수박을 따서 먹고 있으면서도 발뺌을 하려고 해!" 주인은 화를 냈습니다. 

"허! 당신은 수박을 땅에 심은 것이 아니고 수박씨를 땅에 심은 것 아니오. 내가 먹은 수박은 수박줄기에 매달린 수박인데 당신이 심은 씨앗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오?"이 사람은 당당하게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수박넝쿨에 달린 수박은 땅속의 수박씨가 자란 것으로 서로 윤회관계에 있듯이 우리의 생명 또한 수박이 자라는 것처럼 끊임없이 태어나고 이어지면서 유전(流轉)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윤회사상은 무아(無我)사상과는 서로 모순되는 관계가 아닌가? 의심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근본교의는 제법무아(諸法無我)입니다. 온갖 것이 고정 불변의 자성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제법이 무아라면 어찌 윤회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결코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무아라는 말은 생명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몸이 오온(五蘊)과 사대인연(四大因緣)의 화합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중 어느 것 하나라도 없으면 안 되는데 그것은 바로 인연에 의해서 생겼기 때문입니다. 

본래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에 무아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아와 윤회는 결코 모순되지 않으며, 마치 한 덩어리의 황금으로 여러 형태의 악세 사리를 만들더라도 황금의 본질이 변하지 않듯이 우리의 생명 또한 어느 순간에 이것이 되는가 하면 어느새 저것이 되고, 나귀와 말이 되는가 하면 인간과 천상계를 오락가락하며 끊임없이 윤회를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윤회하는 것은 우리 몸이 아니라 몸 안에 있는 주인공입니다. 

그러면 그 윤회의 주체는 무엇인가? 윤회의 주체가 우리의 몸 안에 있는 주인공이라면, 이 주인공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불교에서는 아뢰야식이 윤회의 주체라고 합니다. 아뢰야식은 생명 이 생을 받는 근본식(根本識)으로서 갖가지 경계를 접촉하고, 갖가지 행동을 만들어 냅니다. 

중생은 날마다 신구의 삼업으로 끊임없이 업을 짓는데 때로는 선업을 짓기도 하고 때로는 악업을 짓기도 합니다. 이러한 업의 인연은 두 가지 힘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줄다리기 시합처럼 만약 선업의 힘이 크면 중생은 천(天) 인(人) 아수라의 삼선도에 태어나게 되고 악업의 힘이 크면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에 떨어져 고통을 받습니다. 

이처럼 업력의 선악에 의해 우리의 미래생명 방향이 결정되므로 어떻게 선을 쌓고 악을 제거하는가 하는 것이 미래의 행복을 보장하는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가 윤회의 존재, 즉 사후의 세계를 인정하고 있는데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요? 도교는 불로장생(不老長生)에 있다하고, 기독교와 천주교 이슬람교는 천당에 가 하느님과 함께 살면서 영생을 얻는 데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불로장생이나 영생이나 불사(不死)역시 윤회의 고통 속에 있으므로, 오직 태어남이 없을 때 생명은 가혹한 고통을 벗어나 상락아정(常樂我 )한 세계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윤회를 벗어나는 길앞에서 우리 윤회의 진상에 대해서 어느 정도 파악했습니다. 이제 어떻게 윤회를 극복할 수 있는가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윤회의 진상을 아는 것은 하나의 방법이고 과정이며 수단이요, 윤회를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최종의 목적이며 희망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윤회를 벗어날 수 있을까요? 

「출요경(出曜經) 」에 말하기를 '나무를 베되 뿌리를 베지 않으면 나무는 다시 자란다. 집착·애착·애정의 나무를 베더라도 그 뿌리를 뽑지 않으면 집착 애정은 다시 자란다. 마치 우리가 만든 화살이 우리 자신을 해치듯 집착 애정이라는 화살은 우리 중생을 다치게 한다'고 했습니다. 

갈애(渴愛)와 탐욕의 화살은 우리를 끊임없는 육도생사 속에서 유전케 하니 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자! 그러면 어떻게 하면 끊임없이 타오르는 애욕의 불길을 잠재워 윤회의 고통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지혜의 빛으로 업장과 무명을 비추어 밝히는 것입니다. 지혜의 날카로운 칼로 윤회의 쇠사슬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번이 내가 인간세계에 마지막으로 몸을 받는 때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열어 보이신 팔만사천법문은 우리가 더 이상 생을 받지 않고 윤회를 벗어나며 아무 걸림 없는 경계를 증득하게 하는 등불입니다. 

윤회를 타파하고 윤회를 벗어나며 나아가 윤회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비록 윤회의 소용돌이 속에 머물더라도 결코 오염되지 않습니다. 범부는 업력에 의해 윤회하고 이승(二乘)은 속히 윤회 를 벗어나자고 하지만 보살은 대원력으로 윤회환생하기를 발원합니다. 

티벳의 라마는 입적 후에는 반드시 인간세계에 환생하도록 되어 있는데 달라이라마나 판첸라마 같은 분이 그런 경우로 그분들에 대한 환생의 고증은 지금도 뚜렷이 남아 있습니다. 이들 성현들은 보살의 대원력으로 다만 중생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할 뿐 결코 자기의 안락을 구하지 않으며 기꺼이 고해의 자비로운 배가 되고자 하십니다. 

부처님의 본생담에 의하면 부처님은 때로는 천신으로 때로는 축생으로, 사문으로, 왕족으로 끊임없이 윤회하면서 육도만행의 보살도를 닦으시고 중생교화에 힘쓰시다가 마침내 보리를 성취하셨다고 합니다. 

위앙종의 조사 위산 영우선사가 열반에 드시려하자 제자들이 몹시 서운해서 물었습니다. 

"스님! 스님께서는 수지하신 수행으로 열반하신 후 어디에 왕생하시게 됩니까?" 

"이 노승은 산밑에 있는 한 농가로 가서 암소로 태어날 걸세." 
"네? 스님처럼 수행이 높으신 분이 축생으로 환생하실 리가 있습니까?" 

제자들이 깜짝 놀라서 물었습니다. 

"내 말을 못 믿겠나? 그러면 암소의 옆구리에 '위산영우승'이라 쓴 다섯 글자를 찾아보게나. 바로 나 일걸세." 

제자들은 스님의 다비식을 치르고, 그 후 산 밑 농가에 갓 태어난 암소가 있다기에 찾아가 암소 의 옆구리를 보니 과연 거기에는 스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생사의 바다 한가운데 도량을 짓고 윤회의 성안에서 안락자재한 높은 행을 닦으니 영우선사야말로 윤회를 요달하고 윤회를 초월한 참으로 위대한 보살이 아닙니까? 

불자여러분! 

지금까지 여러분께 윤회에 대한 불교의 견해를 말씀드렸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의 생명은 결코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셔서 미래생명에 대해 희망을 가지시는 일입니다. 
죽음은 집이 무너져 내려서 더 튼튼하고 좋은 집으로 이사가는 것이요, 옷이 헤져서 고운 새옷 으로 갈아입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무시이래(無始以來)로 계속되어 온 생명의 유전 속에서 여러분 모두 하루속히 자신의 장엄한 전당을 짓고 화려한 법의(法衣)를 지어 윤회를 벗어나 보리혜명을 성취하시길 기원드립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전에 한 부자가 있었는데 만년에 아들을 얻자 하객들이 줄지어 찾아와 득남을 축하하였습니다. 
그중 스님 한 분이 찾아와서는 축하는커녕 오히려 큰소리로 통곡을 했습니다. 주인이 몹시 의아해서 물었습니다. 


"선사님! 무슨 괴로운 일이 있으신 건 아니십니까? 무엇 때문에 이렇게 슬퍼하십니까?" 

그러자 비통한 얼굴로 선사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슬퍼하는 것은 당신 집에 죽을 사람이 한 명 더 늘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깨달은 사람의 눈으로 보면 삶은 죽음의 연속이고 죽음은 삶의 전환일 뿐입니다. 
일찍이 태어나지도 않았고 또한 죽지도 않아 생사가 일여(一如)한데 무얼 그리 슬퍼하고 기뻐한단 말입니까?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죽음이라고 하면 칼산에 오른다거나 기름 솥에 뛰어들어 갖가지 악형을 받는 것을 상상합니다. 그러나 죽음의 진상(眞相)을 알고 나면 죽음이란 마치 관광여권을 발급 받아서 온 세계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리더스다이제스트'에 죽음의 관문에서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렸는데, 그 책에는 죽음에 임했을 때의 느낌과 사후의 세계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차를 몰고 가다가 부주의로 사고를 내는 바람에 차가 박살이 났습니다. 구급차와 의사, 경찰과 가족들이 현장으로 달려와 사고를 수습하고 있을 때, 이 사람의 신식(身識)은 몸 을 벗어나 허공을 떠돌아다니다가 시끌시끌한 사람들 소리가 들려서 보니 한 떼의 사람들이 사고 원인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정확한 사고원인을 밝혀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가 경찰관에게 다가가 '제가 눈으로 직접 사고가 발생한 것을 보았는데' 하면서 말을 했지만 경찰관이 들은 체를 하지 않으므로 옆사람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보는 척도 않았으며, 주위사람 모두가 그의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때서야 그는 자신이 실질적인 몸이 없는 다만 혼만 빠져 나온 정신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몸 밖에서 있는 방관자임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정신은 공중을 떠다니면서 길고 어둡고 답답한 터널을 굉장히 빠른 속도로 지나가고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또 머리에 부상을 당해 죽음의 언저리에서 다시 살아난 어떤 사람은 자신이 죽었을 때의 경험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맨 처음 머리에 '꽝' 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따뜻하고 쾌적하고 편안한 느낌이 왔습니다." 

육신을 벗어나면 신식(身識)과 영혼은 더 이상 어떤 장애도 받지 않고 부담도 없어져서 일찍이 느껴본 적이 없는 쾌적감을 느끼게 됩니다. 

또 다른 사람이 말하길 "죽는 순간 나는 몹시 행복하고 위대하고 평화로우며 평온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나는 자신이 기러기털만큼 가벼워져서 눈에 펼쳐진 광명의 세계를 향해 날 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이들의 경험으로 볼 때 죽음이란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음산하고 두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경전에 의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을 때는 마치 거북이 단단한 껍질을 등에 짊어지고 있는 것처럼 무겁고 행동거지가 둔하지만 죽으면 육신의 껍질을 벗어나 자유롭게 된다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죽음에 임해서 세간의 욕망과 정(情)에 지나치게 연연해하고,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기 때문에 거북이 허물을 벗듯 찍히고 베어지고 고통을 당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사람은 죽으면 무거운 육신의 껍질을 벗어버리게 되어 비할 수 없이 홀가분함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걷는 것도 헝겊 자루요, 앉는 것도 헝겊 자루, 헝겊 자루 벗어 버리니 이 얼마나 자재로우냐!' 이처럼 가볍고 장애가 없으며 유유자적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경에는 죽음의 종류에 네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수명이 다하여 죽는 죽음'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죽음을 말하는데 수명이 대해 죽는 것은 비유하자면 기름이 다 타고나면 등의 불이 자연히 꺼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호흡기관에 달려 있는 사람의 목숨은 한계가 있어서 언젠가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있습니다. 

'아침에 태어나 저녁에 죽는 것이 있는가 하면 여름에 태어나 가을 겨울에 죽는 것이 있고, 십년 백년 천년을 살다 죽는 것이 있다. 비록 빠르고 늦는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 모두 언젠가는 죽게 되어 있을 것일지니' 지금 말하고 있는 이 사람의 수명 역시 유한하여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둘째는 '복이 다하여 죽는 죽음'입니다. 

경에 이르시기를 '세간 사람들은 생사를 모르고 육안으로는 죄와 복을 모른다'고 했는데 일체중 생의 목숨은 마치 물거품이 기(氣)가 다하면 소멸되듯, 자신이 지닌 복의 과보가 다하면 죽게 됩니다. 이는 많은 재산을 흥청망청 다 써버린 부자가 거지로 전락하여 끝내 굶어 죽거나 얼어 
죽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세 번째의 유형은 '뜻밖의 죽음'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횡사(橫死)인데, 원래는 죽지 않아야 할 사람이 갑자기 죽게 되는 경우로 전사(戰死)라든가, 교통사고라든가, 화재로 죽는다 든가, 타살이라든가, 호랑이나 늑대 같은 짐승들에게 물려 죽는다든가 사전에 미리 알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네 번째는 '자유자재한 죽음'입니다. 

앞의 세 가지 죽음은 모두 예측할 수도 없고 또 자기 마음대로 할 수도 없지만 자유자재한 죽음은 사전에 알 수도 있고, 또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으로 불가에서는 이런 죽음을 '생사자여 (生死自如) 혹은 생사일여(生死一如)한 경계'라 합니다. 

수행이 깊은 고승들께서는 생사가 자유로워 태어나고 싶으면 태어나고 죽고 싶으면 죽었습니다. 그들은 인연의 이합집산과 원만한 도법(道法)으로 생사를 삼았으므로 조금도 생사의 구속 을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동진(東晋)의 도안대사(道安大師)같은 분은 죽음을 마음대로 다루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는 건원(建元) 20년 2월8일 장안 오종사(五種寺)에서 모든 대중을 모아놓고 예불과 독경을 마친 후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 떠나야겠네. 자네들은 예전과 다름없이 염부제 중생들을 위해 불법을 전하고 어리석고 미혹에 빠진 중생들을 위해 신명을 바쳐야만 하네." 청천벽력 같은 스승의 소리에 제자들은 깜짝 놀라 스님을 만류하며 말했습니다. 

"스님! 이처럼 건강하시면 마땅히 세간에 상주하시면서 불타의 혜명을 이어 가셔야지 어찌서 둘러 떠나가려 하십니까? 지금 막 공양이 준비되었으니 어서 공양을 드십시오." 

"그래! 그럼 내 좀 먹겠네." 

공양을 드신 후 평상시대로 방장실로 가 휴식을 취하더니 그대로 입적하셨습니다. 도안대사의 이와 같은 죽음은 아무 고통도 없는 자유자재한 죽음입니다. 우리 나라 근대의 큰스님 가운데도 이와 같은 죽음을 맞이한 분이 많습니다. 우리 역시 불법을 배우고 열심히 정진한다면 생사의 불길을 벗어나 정각을 이루어 열반의 세계에 들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처럼 죽음을 한 관광여행쯤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부지런히 정진하여 생사자재의 대도인이 됩시다. 나무석가모니불. 사후에는 어디로 가는가? 


죽음이란 끝나는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이 멈추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경계의 시작입니다. 그동안 살아온 육신을 빠져 나온 영혼은 수십 년간 자라온 인간세계를 떠나 또 다른 생명의 전개를 위해 출구를 찾기 시작합니다. 

죽어서 다시 몸을 받아 세상에 나오는 기간을 불교에서는 '중음신(中陰身)'이라고 하는데, 중음 
신은 전생의 업력에 따라 다시 몸을 받아 태어날 인연을 찾아다니다가 인연이 구족되면 몸을받아 세상에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에 나온 후에는 곧 과거생의 기억을 잊어버리게 되는 데 이것을 '격음지미(隔陰之迷)'라 하며 이와 같이 전생의 일을 잊어버리는 현상이 있기 때문에 금생에 과거생의 모든 고통을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과거생을 알던 모르던, 또 미래생을 알던 모르던 이런 것들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는 결코 죽을 수 없는 존재이며 죽는다는 것은 단지 이 사대 (四大→육신)가 거짓으로 합해진 이 몸뚱이요, 껍질일 뿐 본 생명은 면면히 이어져 결코 중단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육신이 죽은 다음에는 우리의 생명은 어떻게 되는가? 경에는 사후의 행방과 다시 태어날 곳 그리고 육도오취(六道五趣)속을 윤회하는 상황을 미리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이런 게송이 있었습니다. 

'정성안승천 인심아귀복 방생슬개리 지옥족저출(頂聖眼昇天, 人心餓鬼腹, 傍生膝蓋離, 地獄足底出)'이라는 게송입니다. 

게송의 뜻을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죽은 후 신체 중에서 최후에 냉각되는 부위로써 그가 어느 곳에 왕생하는지를 알 수 있는데, 죽은 사람은 발바닥부터 머리로 식어 올라가는데 머리 꼭대기가 여전히 따뜻하다면 성인 의 과(果)를 이룬 것이요, 몸의 모든 부위가 식었는데도 눈이 아직 따뜻하다면 영혼이 눈으로 빠져나간 것으로 그는 틀림없이 승천(昇天)할 것입니다. 

온 몸이 식어 뻣뻣한데 심장이 계속 따뜻한 사람은 다시 사람 몸을 받아 태어날 것이며, 몸의 각 부위가 모두 식었는데도 허리 부위가 따뜻한 사람은 아귀도에 떨어질 것이요, 무릎이 따뜻한 사람은 축생도에, 발바닥이 따뜻한 사람은 지옥에 떨어질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죽은 후 각자 서로 다른 업력에 따라 서로 다른 곳에 태어납니다. 천상에 태어나기도 하고 성인이 되기도 하며, 인간으로 태어나기도 하는 것이니 죽은 후 모두 지옥에 떨어지고 아귀로 변한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고 사후 육도오취 가운데 어느 도를 윤회하게 되는지는 전적으로 자신이 과거에 지은 선악의 업보가 어딘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인과경에 '다음 생의 과를 알고자 하거든 금생에 지은 것을 보면 안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음은 사람이 죽은 다음에 다시 생을 받을 때 의지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업력이 무거운 것에 따라 생을 받습니다. 

선근(善根)이 깊은 사람은 선도에 태어나 향락을 누리고 악업을 지은 사람은 악도를 윤회하며 고를 받으니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 즉 '선에는 즐거운 과보가 따르고 악에는 괴로운 과보가 따르는 것'입니다. 

둘째는 습(習)을 따라 생을 받습니다. 

평소에 아미타불을 염송하여 습관이 된 사람은 의외의 사고를 당하여 죽게 되더라도 죽는 그순간 '아미타불'을 염송하게 되면 이때 '아미타불'을 한번 부른 것이 몇십 년 동안 염송한 것보다도 더 효과가 있어 그 공덕으로 서방정토에 왕생하게 됩니다. 

셋째는 뜻을 따라 생을 받습니다. 

죽은 후 어떤 생을 받는가는 평소에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것과 큰 관계가 있습니다. 평소에 온마음으로 간절히 서원하기를 바랐다면 사후에는 이러한 뜻을 쫓아 정토에 왕생할 수 있습니다. 
일심으로 천상에 나기를 바랐다면 죽은 후에 이러한 염원을 따라 천상에 태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평소 수행할 때에 어떻게 생각이 끊이지 않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업력으로 생을 받든지 대부분 사람들은 사후에 길고도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터널을 지나면 누군가가 앞으로 와서 그를 맞이하는데 어떤 사람은 한 척의 배에 의해 인도되어 생사의 바다를 건너 피안에 이르고 또 어떤 사람은 소의 머리와 말의 얼굴을 한 귀졸(鬼卒)에게 이끌려 지옥으로 가 고통을 받습니다. 

염불을 한 사람은 아미타불과 부처님의 화신과 보살님 등 성인의 무리들이 와서 그를 맞이하여 서방극락정토에 왕생케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불자들은 평소에 마음을 거두어 정념을 지키 고 선을 행하며 악을 제거함으로써 심판을 두려워하거나 죽음을 겁내지 않습니다. 

불자여러분! 

죽음과 사후에 어떤 생을 받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한없이 기나긴 세월을 육도를 윤회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에서처럼 신의 섭리에 의해서 생과 사가 결정된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자신의 행위에 의해서 스스로 지어 서 스스로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불자들은 이 생과 사의 정체를 바로 알고 깨달아 죽은 후에 후회하거나 악도에 떨어져서 자손들에게 천도해주기를 바라는 처량한 신세가 되지 말고 살아 생전에 선업을 많이 짓고, 나아가 자신의 정체를 바로 깨달아 가장 이상적인 삶, 즉 생사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끝으로 천도재를 봉행한 모든 영가들이 혹 아직도 악도에서 신음하고 있다면 불보살님의 가호로 다같이 악도의 고통을 면하고 선도에 태어나기를 불보살님 전에 간절히 기원합니다. 

우란분재와 천도 불가(佛家)에서는 매년 음력 칠월 보름 백중절을 우란분재라고 하여 목련존자의 효심을 기리고 선망부모와 누대조상의 천도를 불보살님 전에 기원해 왔습니다. 

우란분재의 유래는 효성이 지극한 목련존자가 생전의 악업으로 악도에 떨어져 갖은 고통을 받고 있던 어머니 청제부인을 지극한 효성으로 부처님의 가피력을 힘입어 악도에서 구출하여 천상세계에 환생토록 한 눈물겨운 고사에서 비롯된 불교행사입니다. 영가 천도이처럼 삼악도의 중생을 삼선도로 이끌어내는 것을 천도(薦度)라고 하는데 부처님께서 일년 삼백육십오일 가운데 특히 음력 7월 보름에 우란분재를 지내면 그 공덕이 가장 크다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 불자들은 이 날을 기해 천도의식을 봉행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가 죽은 지 사흘만에 되살아나 승천하였다고 하여 부활절이란 이름으로 성대한 행사를 거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관점에서 볼 때 부활은 어느 특정인만의 전유물 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생명의 실상이요, 이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하나의 환생에 불과한 것입니다. 

중생의 삶은 단 1기의 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죽지 않고 단지 윤회환생할 뿐입니다. 이는 마치 누에가 번데기로 변했다가 다시 나방이 되는 것과 같이 삶의 겉모습만 변할 뿐 그 생명자체는 생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생사는 단지 인연집합체인 육신의 생성과 소멸일 뿐그 육체의 주인공인 영혼 자체는 영생불멸, 불생불멸입니다. 

중생(생명을 가진 사람)이 생의 모습을 바꾸어 거듭 태어나는 현상을 환생이라 하고 이처럼 환생하는 삶의 모습을 윤회라고 하는데 중생이 윤회하는 무대는 모두 여섯 가지의 갈래가 있고, 이를 육도(六道)라고 합니다. 

육도는 천상·인간·아수라·아귀·축생·지옥입니다. 이 가운데 천상 인간 아수라는 살아생전의 업이 선(善) 유정(有情)이 윤회하는 곳이므로 삼선도(三善道)라 하고 아귀 축생 지옥은 악한 업을 많이 지은 유정이 윤회하는 곳이므로 삼악도(三惡道)라고 합니다. 

어느 종교에서나 사후세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의 사후세계는 인간의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는 절대신의 절대 위력에 의해 자의적으로 결정된다고 합니다. 

특히 기독교의 경우는 인간의 선악행위는 단지 사후세계의 보조적인 요소일 뿐, 천당과 지옥의 열쇠는 오직 신의 수중에 있다고 합니다. 선악의 기준 역시 신에 대한 순종여부이지 결코 인간적인 기준에서의 선악이 아닙니다. 따라서 인간은 결코 사후의 행방에 주체적인 역할을 할 수없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뜻이나 어느 신의 뜻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 라 오직 자신의 행위의 결과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점입니다. 양자의 차이는 참으로 큽니다. 왜 냐하면 전자는 신(神)의 섭리에 의해 사후세계가 결정되므로 인간 의지는 전혀 개입할 소지가 없지만 후자는 인간 스스로의 능력에 따라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피동적인 삶과 주체적인 삶, 타의에 의한 사후세계와 주체적인 삶과 주체적인 사후세계의 차이는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그러나 불자라고 해서, 불교신앙을 갖는다고 해서 누구나 자기 마음대로 다음 생을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보통사람들은 자신의 업력에 피동적으로 끌리어 다음 생을 받습니다. 그러니 역시 신이나 어떤존재가 주관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편 수행이 높은 사람은 생사를 자재할 수 있으므로 다음에 어떤 형태의 삶을 택하느냐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천도(薦度)는 살아생전의 업력에 의해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된 생명을 보다 안락한 곳으로 이끌어내는 의식입니다. 이는 비록 중생의 삶이 자업자득이어서 스스로의 업력에 의해 현재의 고통을 받고 있지만 불보살의 위신력과 불보살이 세운 중생구제의 대비심에 의존함으로써 가능한 일입니다. 

마치 자신의 실수로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어린아이라도 지나가는 어른들이 이를 가엾게 여기고 물 속에 뛰어들어 구해 주는 이치와 같습니다. 탈선한 자녀를 부모가 용서하고 바른 길로 이끌어 주는 것과도 같습니다. 

한 집안에 탈선한 자녀가 있을 때, 또는 잘못을 저지르고 감옥에 갇혀서 고생을 하고 있는 권속이 있을 때, 그 집안 식구들은 모두 편안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원리로 선망부모나 일가친척 누대 조상 가운데 삼악도에 몸을 받아 한없는 고통을 받고 있는 피붙이가 있다면 그 가족의 마음이 편할 리 없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직접적으로 느끼지 못할지라도 고통받는 망령은 항상 이승의 친척이 구원의 손길로 천도해 주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조상이나 친척을 둔 사람은 악몽을 꾸거나 하는 일에 지장을 받는 등 음양으로 그 영향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악도에서 구해내서 좀더 나은 세상에 환생토록 천도의식을 베풀면 죽은 망자만이 아니라 본인에게도 큰 공덕이 되는 것입니다. 

「지장경 」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살아있을 때 착한 일을 하지 못하고 죄만을 지었더라도 목숨을 마친 후에 대소 권속들이 그를 위하여 복을 닦아주면 그 모든 공덕의 칠분의 일은 망인에게 가고 나머지 칠분의 육은 살아있는 자신에게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니, 이런 까닭으로 미래나 현재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을 잘 듣고 스스로 잘 닦으면 그 모든 공덕을 얻게 되는 것이니라." 불자 여러분! 

우리 다같이 지극한 정성으로 선망부모와 일가친척들의 천도환생을 기원하고, 우리 스스로는 항상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슬기로운 삶을 살아, 불행하게 악도에 윤회하여 자손들에게 누가 되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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