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카르마는 선악을 구분하지 않는다
카르마는 단순한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다.
행위(원인) -> 결과(반작용) 이 원리가 작용할 뿐이며,
그 과정에서 "선과 악"이라는 인간적인 개념이 개입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밥을 먹으면 똥을 싸는 것이 업(業)이다.
이를 두고 "선업인가? 악업인가?"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무엇을 먹느냐(원인)에 따라 어떤 똥이 나오느냐(결과)가 다를 뿐이다.
선한 행위를 하면 선한 결과가 오고, 나쁜 행위를 하면 나쁜 결과가 온다.
그러나 이 "선과 악"조차도 인간이 만든 주관적 개념일 뿐,
본질적으로는 단순한 인과의 흐름이다.
하지만 카르마에 선악이 없다는 말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모든 행위에는 결과가 따르며, 그 결과를 감당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다.
카르마의 법칙을 이해했다면, "어떤 행위를 할 것인가?"에 대한 책임 또한 따라온다.
2. 카르마는 결과론이 아니다
카르마는 단순히 결과만을 따지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원인과 과정, 그리고 결과까지 포함하는 인과의 흐름이다.
예를 들어,
외국인 노동자를 돕는 선한 행동을 했는데,
그가 나중에 테러를 저질렀다면?
이때 "너는 악업을 쌓았다"라고 단순하게 결론 내릴 수 있을까?
너의 행동은 분명 선의(善意)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 행동이 결과적으로 나쁜 영향을 초래했다면,
그 파장은 결국 네게도 돌아올 수 있다.
카르마는 단순한 결과가 아니라, 전체적인 인과관계 속에서 작용한다.
"좋은 의도로 했으니 무조건 선업이다"라고 볼 수 없으며,
"결과가 나빴으니 무조건 악업이다"라고도 볼 수 없다.
결국, 인과의 흐름은
"의도 + 행위 + 과정 + 결과"
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3. 하는 바 없이 행하는 것은 카르마가 되지 않는다
카르마는 탐욕(貪), 분노(瞋), 어리석음(癡) 같은
자아적 욕망에서 비롯된 행위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집착 없이 행하면 그것은 카르마가 되지 않는다.
깨달은 자(부처나 고승)가 '하는 바 없이' 행하면,
그것은 인과의 사슬에서 벗어난다.
달마대사가 양무제에게
"아무 공덕도 없다"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양무제는 부처를 위해 수많은 사찰을 세웠지만,
그것을 자신의 업적(ego, 자아)으로 여기는 순간,
그 행위는 카르마가 된다.
집착하는 순간 그것은 업이 되고,
집착이 없으면 업이 되지 않는다.
하는 바 없이 행하는 것은
카르마의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다만, 깨달은 자가 살인을 해도 그것이 카르마가 되지 않는다는
불교적 해석이 있지만,
일반인은 이 경지에 도달할 수 없으므로 쉽게 남용해서는 안 된다.
4. 선업과 악업은 상쇄되지 않는다
선업을 많이 쌓았다고 해서 과거의 악업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과거에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나중에 많은 선행을 했다고 해서
그가 지은 살인의 업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선업은 선업대로 작용하고,
악업은 악업대로 작용한다.
다만, 미래에 닥쳐올 악업의 강도를 완화하는 효과는 있을 수 있다.
즉, 카르마를 통해 인과의 흐름을 조정할 수는 있지만,
기존의 업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업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깨달음(해탈)뿐이다.
개체의식(ego)이 사라지고 자아가 해체될 때,
더 이상 업의 영향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5. 카르마는 결국 인과의 흐름이다
카르마에는 선악이 없다. 오직 인과가 있을 뿐이다.
카르마는 단순한 결과론이 아니라,
전체적인 인과의 흐름 속에서 작용한다.
집착 없이 행하면 업이 되지 않으며,
선업과 악업은 따로 작용한다.
궁극적으로 업의 영향을 초월하는 길은 깨달음뿐이다.
카르마를 이해하는 것은 곧
인과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