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은 추상적으로는 의지가 되고, 현실적으로는 몸이 된다.
간단하게만 생각하더라도 몸을 움직이지 않고 의지를 발휘하기가 쉽지 않다.
여기서 의지는 꼭 꿈을 이룬다는 느낌보다는 막연한 생존 본능에 가깝다.
비겁이 다른 요소들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의지가 향하는 목표와 방법이 달라진다.
인간이란 말 이전에 몸을 움직이는 존재다.
몸은 가장 원천적인 삶의 수단이 된다.
해외에 나가 언어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바디 랭귀지로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다.
팔자에 식상이 없는데 지지에서 비겁이 식상을 품고 있다면? 말할 때 신체적인 제스츄어를 많이 섞을 것이라는 점도 생각해볼 수 있다.
육친의 생극제화 관계에서 인성은 비겁을 생한다.
인성은 공부인데 공부하면 몸에 근육이 붙나? 보통은 아이는 엄마가 옆에 있으면 좀더 당당해진다는 식으로 표현을 하고 이해를 하게 된다.
인성은 비겁이 세상을 이해하는 통로가 된다.
누군가의 말을 이해할 때 사람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냥 듣는 것과 이해하면서 듣는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이다.
고개를 끄덕인다는 것은 이해 하고 있다는 뉘앙스로 몸을 움직여주는 것이다.
누군가의 노래 소리가 귀에 들리면 자연스럽게 몸이 좌우로 흔들리게 된다.
여기까지가 인성이 비겁을 생하는 단계가 된다.
이해가 되면 되는 대로 고개를 끄덕이고, 안되면 안되는 대로 팔짱을 끼고, 외부세계에 대하여 사람은 항시 반응하여 몸을 움직이면서 자신의 의지를 가늠한다.
그 움직임은 무심코의 움직임일 수도 있고 특정한 의도를 담으려는 것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외부세계의 이해를 전제로 해야 비겁의 의지는 안정감을 가질 수 있다.
인성은 공부이자 문서가 된다.
외부세계에 열려 있고 이해가 좋은 사람들이 공부도 잘 하고 자격증도 잘 딴다.
그리고 이런 것이 있으면 확실히 세상살기에 편해진다.
어딘가로 이동할 때 그냥 몸만 움직이는 것과 자동차의 이해를 통해 자격증을 따서 움직이는 것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인성은 인정이자 허락이 된다.
이해를 잘 하면 그걸 인정해주고 그 분야에 대해서 움직여도 된다고 허락을 얻어낼 수 있다.
사람이 어떤 의지를 가졌을 때 엄마의 허락이 떨어져야 마음 편히 자신의 의지를 실행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지하철을 타고 싶다는 의지를 가진다 하더라도 허락이 떨어지지 않으면 지하철을 탈 수 없다.
그러한 허락이 승차권이 된다.
인성은 문서. 그리고 기본적으로 표를 사냐 마냐를 떠나서 지하철을 타려면 지하철이라는 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사람은 본시 몸을 움직여야 의지가 발현되고 몸을 움직여서 살아간다.
비겁이 인성과 관계가 좋아 생을 잘 받는다는 건 뭘하든 좀더 편하게 움직일 수 있다는 느낌이 된다.
생각 없이 사고만 치고 다닌다고 욕 안 먹는 안전막을 쳐주게 된다.
나는 인성이 비겁을 생한다는 것을 이와 같이 이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