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강망에 보면 토는 사행에 의지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고 한다.
토는 정체성이 없어서, 화가 많으면 화를 따라가고, 금이 많으면 금을 따라간다는 얘기다.
어떤 술사는 토일간을 보면 주도 세력을 중심으로 통변하는 것을 보았다.
예를 들어 토 일간이 목을 주도 세력으로 하고 있을 때, 목을 일간으로 잡고 통변을 하더라.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그의 관법이 전혀 틀리지는 않는 것 같다.
나는 토일간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첨예한 주제에 대해서 판단을 요구받을 경우 굉장히 난처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예를 들어, 박정희 시대에 대해 판단을 내릴 경우, 누구는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든 군사독재는 안된다며 고개를 절레 젓고, 누구는 대한민국 근대화를 이끈 인물이라며 훌륭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나는 이 사람 말을 들으면 그게 맞는 것 같고 저 사람 말을 들으면 또 그게 맞는 것 같다.
내가 내리는 판단은 항상 이곳저곳에서 그럴 듯한 부분을 취합하는 형식이다.
군사독재는 안되지만, 그래도 평가를 박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견은 어찌 보면 좀 두루뭉술한 판단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어쩌나, 나는 항상 O 도 아니고 X 도 아닌 판단을 내려왔던 것 같다.
그래서 O 냐 X 냐 단도직입적으로 판단을 요구 받을 경우 난 참으로 난처해진다.
대신 이렇게 대답한다.
어떻게 세상을 일도양단 할 수 있단 말이냐?
오행의 세계에서는 토는 커다란 원의 중앙을 차지하고 각기 개성이 분명한 음양의 세계의 오행들이 싸우지 않게끔 중재하는 역할을 한다.
이것이 십간과 십이지의 세계로 오면, 좀더 디테일해진다.
십간을 보면 무기토는 갑을병정의 양의 세계에서 경신임계의 음의 세계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지지로 오면, 토는 지장간을 파헤쳐보면 거의 모든 지지에 위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계절과 계절 사이를 갈무리하고 연결시켜주는 역할도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토는 이런 것 같다.
음이라 하기에도 껄쩍지근하고 양이라 하기에도 껄쩍지근.
진월을 보면, 봄이라 하기에도 껄쩍지근 하고 여름이라 하기에도 껄쩍지근.
오행의 중앙, 십간의 중간 과정, 간섭 안하는 척하면서도 지지의 구석구석에 위치하여 은근히 간섭 안하는 구석이 없는 오묘한 녀석.
음적인 판단은 분명하고, 양적인 판단도 분명하다.
여기에 대해서 토는 음적인 판단을 중심으로 하는 친구에게 양적인 요소도 한 번 생각해보라고 하고, 직접적으로 간섭하지는 않지만 한 번쯤 브레이크를 밟도록 의문점을 던져준다.
주관이 없는 주관이라 할 수 있는 이 이상한 오행에게 그렇다면 네 진짜 의견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러나 결국 토는 자신의 세계에서 주도세력을 펴고 있는 녀석에게 슬며시 딸려갈 수밖에 없다.
토는 사행에 기생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다른 오행을 따라간다고 해도 토는 그 세계에서의 두루뭉술을 고집한다.
비록 정체성 없는 정체성을 가졌다고 하지만, 토는 다른 사행에게 각별한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오행 가운데 수는 만물의 근원으로 베푸는 게 주요 특징이다.
그러나 토는 베품에 있어 수가 가지는 특징을 넘어서는 보다 근원적인 성질을 갖고 있다.
목은 토가 없으면 뿌리를 뻗지 못하고, 저 홀로 화려하여 개성이 강한 화는 토가 없으면 금으로 넘어가지를 못하고, 토가 없으면 금은 화를 품지 못하여 제대로 된 금이 되지를 못하고, 수에게는 물길이 흐를 수 있는 제방이 되어준다.
십이지지 가운데 가장 개성이 강한 자오묘유, 그 가운데 오화의 지장간에는 토가 들어 있다.
나는 오중 기토의 의미를 위와 같은 관점에서 이해한다.
양의 극단에 치우친 녀석을 어떻게 떠안아서 금으로 넘겨줄 것인가 그러한 의미에서 오중 기토가 하는 역할이 크다고 생각한다.
난강망의 토에 대한 주된 시각은 이러하다.
그러나 토는 정체성이 없다고 하면서도 각론을 보면, 토를 주로 갑을목의 관계와 그 연장선상에서 논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왜 그럴까?
보통 사람은 월주를 지나면서 사춘기를 겪는다.
그러나 내게 있어 월주는 보다 각별했다.
내가 월주 시점을 살아가면서 목을 바라보는 시점이 되자 나는 나의 정체성에 대해서 미친 듯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는 뭐하는 사람인가.
토에 있어 관은 목이 된다.
관이란 나는 뭐하는 사람이요, 하고 내세울 수 있는 공적인 상징을 만들어준다.
자니 윤이 나는 사람을 웃기는 사람입니다, 라고 분명하게 밝힐 수 있을 때 그는 식상이 발달한 것 같지만 사실은 관 또한 분명하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다.
토는 개성이 없다.
개성이 없는 토에게 목은 너의 개성은 무엇이니? 하고 계속해서 묻는 역할을 한다.
하여 자칫하면 회색분자가 될 수 있는 그의 개성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한다.
물론 토 일간에게 다른 사행 가운데 하나가 분명하다면 그의 개성은 분명해진다.
그러나 토에게 있어 목은 보다 직접적이다. 이리하여 토에게 목이 갖는 의미가 다른 사행 가운데 앞선다.
토에게 식상은 금이 된다.
토가 만약 금을 주도세력으로 갖지 않으면서 어설프게 목을 띄운 경우. 이 때에는 화의 입장에서 수가 많지도 않은데 토를 본 것과 같은 작용을 하게 된다.
즉, 스스로 자신의 귀를 깎아내는 역할을 한다.
토는 식상을 잘 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토에게 식상이, 목금수에게 식상이 주는 의미와 같이, 1선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해보인다.
오히려 화에게 토가 주는 의미와 비슷하다.
사주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게 이름이 가진 힘, 즉 성명학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