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의 속삭임

계급의 속삭임

G 설화 1 1,800 02.13 18:25

사주를 놓고 출신 대학을 찍는다?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지만 명리를 공부한다면 한 번쯤 도전해볼만한 가치가 있다.

이게 가능하려면 사주의 급수를 우리나라의 대학 레벨과 등치시키는 과정이 필요한데, 특A는 서울대, A는 연고대, B+는 서강대 성균관대 한양대 이화여대, B는 중앙대 경희대 외대 서울시립대, B-는 삼국대 이런 식으로 놓고 찍는다.

사주는 중국에서 만들어졌다. 중국은 영웅과 인물의 나라다.
삼국지는 몰라도 유비 관우 장비는 알고, 초한지는 몰라도 항우와 유방은 안다.

 

인물은 하늘이 낸다, 라는 사고는 지금도 중국 문화의 면면을 흐르고 있고 그러다보니 사주를 놓고 고저를 나누는 게 주된 일과가 되어 있는 것 같다.

하늘이 낸 사람이냐 아니냐. 그러니까 책을 펴보면 거의 한다는 얘기가 매양 계급을 어떻게 나누는가와 연관된다.
따라서 사주 공부 하다보면 어느새 인생과 사회에 대하여 굉장히 보수적인 사고 관념을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된다.

 

하격이니 귀격이니, 파격이니 성격이니. 그러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어떤 인간에 대해서는 낮추어보거나 혐오하거나 혹은 어떤 인간에 대해서는 몸을 낮추고 비굴해지거나 하는 이상한 근성이 이식되기도 한다.

물론, 우리는 동일한 시간을 공유하면서 각자의 공간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 중에서는 이상한 사람도 있고 고급스런 사람도 있다. 절로 욕이 나오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절로 존경심이 우러나오는 사람도 있다.

매우 이상한 일이고 인정하기에는 뭔가 꺼림칙한 구석도 있지만, 똑같은 사람으로 우리는 살아가면서도 또 한편 사람에게는 계급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계급적인 사회가 있기에 사주를 통해서 계급을 나눌 수 있는 것이지, 사주 안에 이미 계급이 내장되어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어떠한 사회 체제이든 사회를 이끌어가는데 있어서 지향하고자 하는 신념과 가치가 있다.

그것은 그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희망을 주고 행복을 보장하며 살아가는 양식을 제공하는데 이러한 신념과 가치에 얼마나 부응하는 인간에 따라 계급이 주어지고 분할하게 된다.

예컨대, 원시 사회에서는 생존이라는 신념과 가치 아래 얼마나 사냥을 잘하는가가 계급을 나누는 주요 기준이 되는 셈이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사회에서 중요한 계급을 차지하는 인간류가 있다.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미래나 중요한 계급적인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생존이라는 가치에 봉사했다면 현재는 돈 잘 버는 직업이라는 데에 방점을 찍는다.

어차피 벗겨놓으면 똑같은 본능과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지만, 그래서 여전히 알몸 시위라는 것은 계급적인 한계를 벗어던지는 중요한 도구가 되고 있지만, 계급 없는 사회를 상상하기는 힘들다.

 

계급 없는 사회란 특정의 가치에 일방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사회인데, 모두가 부처가 되기를 희망하며 해탈을 위하여 도 닦는 세상이 아닌 다음에야 현실 세계에서는 이룩되기 힘들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무리 가치를 집어던지더라도 인간에게는 생존이라는 가치는 영원히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니까.

또 하나는 특정한 신념이 없게 되면 인간은 그 사회 안에서 뭘 해야 할지를 모르게 된다.
영원히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그리고 자신의 세계에 대하여 멍 때리고 있는 상황. 어찌보면 재밌을 것 같기도 하고.

지금 우리는 숫자가 중심이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매년 정부는 경제 성장률 몇 퍼센트라는 목표치를 부여하고 우리는 이를 향해 달려가고, 목표치를 초과하지 못하면 아쉬워하고 다음에는 잘 해야지 마음을 다 잡으며, 수출 흑자라는 뉴스에 공연히 마음이 설레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이 현재적인 계급을 만들고 분할시키고 있다.

 

인간이 계급사회를 벗어던지지 못하는 한 사주로 대학을 찍고 고저를 나누는 일은 영원히 가능할 수밖에 없어진다.
다만, 점쟁이에게 남은 일은 해당 사회의 신념과 가치에 대한 응시를 놓치지 않는 것 뿐이다.

지금 대한민국 사회는 성공이라는 것에 여전히 몸이 달아 있다.
우리 시대 멘토의 면면을 꼽아보면 다분히 그러하다.

 

멘토란 특정한 인생론을 바탕으로 인생의 귀감이 되어주는 스승을 말함이다.
단순히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멘토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성공은 중요한 가치이긴 하지만 그러나 자신의 성공을 위하여 타인을 상처주거나 희생시키진 말아야 겠다는 관념이 유행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이삽십대 청년층에서 그러하다.

세상엔 네 가지 종류의 인간이 있다.

 

자신의 일신의 안위를 위하여 타인을 기꺼이 희생시키는 사람, 타인을 희생시키지 않고 양심을 지키면서 자신의 안위를 돌보려는 사람, 자신의 안위보다는 자신과 타인을 동일시 하고 함께 공동체를 꾸려가려는 사람. 마지막으로 머리 깎고 산으로 탈속한 부류.

이것은 정치적인 경향성에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전자의 두 가지 유형을 보수적인 유형이라 하고 후자를 진보적인 유형이라 할 수 있는데, 현재로서는 두 번째 유형만 하더라도 진보적이라 여겨지는 추세이다.

워낙에 이상한 사람들이 많으니까 말이다.

한 때는 공적인 지위가 중요한 시대가 있었고 우리는 돈이 중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때문에 돈이 많으면 물론 계급이 높다라고 할 수 있지만, 이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아실현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아실현이라는 것이 새삼스럽지는 않지만, 돈 만큼이나 중요한 계급의 지표가 되고 있다.
이것은 개인의 행복과도 직결된다.

그렇다면 자아실현이라는 잣대를 놓고 이 사람이 성공하느냐 마느냐를 사주 안에서 볼 수 있을까.
물론 가능하다.

사주를 보는 방법이 깃털처럼 많듯이 사주가 품고 있는 가능성 또한 깃털처럼 많기 때문이다.

사주라는 공간 안에서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사회적인 정체성을 부여받는다.
이것이 월이 된다.

월을 어떻게 다룰 것이냐 이것을 놓고 찬찬히 성공이라는 것에 대하여 속삭여보려는 심산이다.

Comments

사주에 시사를 더하니 참 맛깔나네요
정말 좋은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