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는 단순한 글자가 아니다.
초·중·본기로 이루어진 하나의 작은 세계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요소는 단순히 나열된 것이 아니다.
각각 초기는 과거, 중기는 미래, 본기는 현재를 뜻한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왜 시간의 흐름을 과거 → 현재 → 미래가 아니라 과거 → 미래 → 현재로 보았을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시간 개념은 직선적이다.
과거에서 현재로 흘러가고, 현재에서 미래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대 역학자들은 이 흐름을 정반대로 보았다.
시간의 흐름은 과거 → 미래 → 현재다.
왜 그럴까?
과거는 단순한 지나간 시간이 아니다.
과거는 '업(業)', 즉 자신의 경험과 선택이 축적된 결과물이다.
이 업이 쌓여 미래를 구성한다.
그리고 미래는 단순히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미래는 이미 머릿속에 구상되어 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무엇인가?
그 구상된 미래를 이루기 위해, 현재에서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지가 결정되는 것이다.
결국, 업(과거)을 알면 현재를 이해할 수 있고, 현재를 보면 미래를 알 수 있다.
운명을 읽는다는 것
많은 사람들이 점쟁이에게 미래를 묻는다.
진정한 점쟁이라면, 미래를 단순히 맞히는 것이 아니라, 바꿀 수 있는지를 알려줘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대부분의 점쟁이들은 미래를 바꿀 수도, 예측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세상에 완벽한 팔자는 없기 때문이다.
점쟁이들조차도 운명의 굴레 속에 있다.
그들의 사주에도 허점이 존재하며, 그 허점이 바로 그들이 미래를 정확히 보지 못하는 이유다.
무인성(無印星) 점쟁이는 과거를 묻지 않는다.
→ 인성이 없으니, 사람의 업을 이해하지 못한다.
무재성(無財星) 점쟁이는 현재 상황을 모른다.
→ 재물이 없으니, 현실적 흐름을 읽어내지 못한다.
무관성(無官星) 점쟁이는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 권위가 없으니, 아무리 정확한 말을 해도 신뢰를 얻지 못한다.
무식상(無食傷) 점쟁이는 바꾸려는 마음이 없다.
→ 식상이 없으니, 변화를 이끌 능력이 없다.
운명을 읽는다는 것, 그리고 바꾼다는 것
운명을 읽는 것은 어렵지 않다.
과거의 업을 보고, 현재의 태도를 보면 자연히 미래는 보인다.
그러나 운명을 바꾸는 것은 다른 문제다.
과거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미래를 두려워하거나,
현재의 선택을 피하면,
운명은 그대로 흘러갈 뿐이다.
운명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다.
흐름을 읽지 못하면, 결국 주어진 길을 그대로 걸어갈 수밖에 없다.
지장간은 과거, 미래, 현재를 읽는 열쇠다.
그리고 그 흐름을 이해하는 사람만이, 운명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사주를 정해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만, 사실은 과거의 선택이 미래를 만들고, 현재의 행동이 다시 그 흐름을 바꾼다는 거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