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관은 관성을 극복하거나 거부하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관성이 규율과 질서를 의미한다면, 상관은 이를 깨뜨리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죠.
그래서 상관이 강한 사람들은 전통적인 규범이나 사회적 관습에 얽매이는 걸 싫어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길 원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상관이 관을 무너뜨리려는 과정에서 관에 의존하게 됩니다.
마치 어떤 종교나 체제를 싫어한다고 하면서도 그 체제를 연구하고 그 틀 안에서 비판하는 사람이 그 체제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말이죠.
예를 들어, 기독교가 싫어서 신학을 연구하고 성경의 약점을 찾아내는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그 사람은 기독교의 가치를 부정하려고 하지만, 동시에 기독교라는 체제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셈입니다.
상관은 규율과 질서를 깨기 위해 존재하지만, 이 과정에서 관이라는 틀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관이 없으면 상관이 작동할 이유 자체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죠.
관이란 상관이 뛰어넘고자 하는 장벽이자 목표물이기 때문입니다.
관과 상관은 서로를 의식하며 작동하는 관계라서 상관이 관을 필요로 한다는 역설이 생기는 겁니다.
자유를 추구하는 상관이 관에 집착하는 이유는 관의 존재가 상관의 정체성을 정의하기 때문입니다.
상관은 관이라는 질서와 규율이 존재해야만 그것을 깨뜨리려는 동기를 가질 수 있거든요.
그래서 상관은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그 자유를 완전히 이루기 위해선 관이라는 존재가 필요하다는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자유로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상관과 관의 관계를 넘어서려면 관성 자체가 없는 상태로 가야 합니다.
관이 없다면 상관은 굳이 뭔가를 깨뜨리거나 반항할 필요도 없어지고, 스스로의 에너지를 다른 방향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단순히 반항하는 에너지가 아니라 창조적이고 독립적인 에너지로 변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상관은 관이 없는 상태에서는 더 이상 외부의 규율이나 질서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이때 상관은 내면의 자유를 추구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을 창조할 수 있는 진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관성이 없다면 관념적 틀에서 벗어나 삶을 더 유연하게 살아갈 수 있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데 집중할 수 있죠.
하지만 현실에서는 상관이 완전히 관에서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회는 기본적으로 관성, 즉 질서와 규율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