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이란 것에 대해 육친을 구분 지어본다면, 그 구분이 쉽지 않다.
어떻게 보면 재성도 손님이고 관살도 손님이다.
재성도 고객이고 관살도 고객이다.
재성으로 돈을 버는 경우도 있고 관살로 돈을 버는 경우도 있다는 셈인데, 포인트는 주체를 어떻게 잡을 것인가에 있다.
아니, 관살은 보통 자신을 통제하는 상사라고 보는데 어떻게 관살이 손님이 되는가?
마트에 가면 고객 만족 센터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 가면 고객이 와서 이리저리 부탁을 많이 한다.
그러면 그곳의 직원은 네, 알겠습니다 하면서 고객의 부탁을 들어준다.
가만히 앉아서 그 직원을 바라보건데 참으로 피곤하고 귀찮고 힘든 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별의별 문의를 하는 고객들이 많은데, 그 중에는 황당한 문의를 하는 고객도 물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알겠습니다 꾸벅 숙여준다.
이럴 때 고객은 꾸벅 숙여야 할 대상이 되니 관살이 된다.
관살과 비겁의 관계에서 관살이 제극하는 대상이 비겁이 된다.
관살의 입장에서 재성이 비겁이 되는 셈이다.
관살이 쓰는 돈이 비겁이 된다.
내가 관살의 부탁을 들어주는 조건으로 관살은 나에게 돈을 쓰는 셈이다.
직장에 들어간다는 것도 비슷한 형태가 된다.
직장에 들어가서 명령을 따르고 시키는 일을 한다는 조건 아래 직장은 나에게 돈을 쓰는 셈이다.
그리고 마트에서 고객의 부탁을 들어주는 일 또한 직장에서 시키는 일을 한다는 관점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그러나 관살로 돈을 번다는 건 어떻게 생각하면 자신을 희생하고 소모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자유를 억압 당하고, 짜증이 나더라도 네, 하고 따라야 한다.
재성으로 돈을 번다는 건, 자신이 주체가 되어 손님을 맞이하는 것을 뜻한다.
관살이 고객이라면 재성은 손님이 된다.
뭐 고객이나 손님이나 어감상 별로 차이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재성은 비겁이 극하는 것이니 내가 후려쳐서 돈을 버는 스타일에 해당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관살로 버는 돈이란 내가 후려침을 당해서 버는 돈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내가 후려쳐서 버는 돈이라 하더라도 대저 돈을 번다는 게 쉽지 않아서 자신을 소모시키는 일은 관살이나 재성이나 마찬가지다.
재성이 보다 자유도가 높다고 할까.
그러나 관살의 안정감에는 미치지 못하여 어지간히 잘 후려치는 스타일이 아닌 이상 말하기는 프리랜서지만 잘못하면 백수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현상도 발생한다.
팔자에서 관살이 중심이 된다면 후려침을 당해서 힘들긴 하지만 재성이 받쳐주고 있으면 그래도 자신의 영역이 생기게 된다.
재성이 중심이 된다면 잘 후려쳐서 돈을 번다고 하나 관살이 받쳐주지 않으면 공적인 쓰임과 관계가 없어 돈은 잘 버는데 딱히 사회적으로는 분명하지 못한 음지에 속하는 직업성을 갖게 된다.
해서 돈을 버는 방법은 두 가지다.
나 죽었소 하고 누군가의 밑으로 들어가서 후려침을 견뎌내든가, 백수와 차이를 만들어내도록 잘 후려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