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최악의 신분제 사회 노비 정리

조선시대 최악의 신분제 사회 노비 정리

G 하이에나 1 136 11.06 22:30


노비는 중국과 한반도의 전근대 사회에서, 예속민 계층을 뜻한다. 천민과도 여러부분 겹치는 점이 많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천민은 곧 노비이다. 다만 실제로는 여러 변수가 있어 완전히 천민=노비는 아니었지만 법대로 천민=노비로 이글에서는 칭하겠다.


최하층 신분 중 대다수를 차지했다. 사람으로 인정받는 계급이었으나 사회적 인식은 전혀 좋지 않았고, 법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주인에게 속해 있었으며 물건처럼 거래가 가능했다. 간혹 먹고 살기에는 노비가 더 나아서 노비가 되는 것을 그리 꺼리지 않거나 좋아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사실 먹고 살 수만 있으면 당연히 다들 노비 탈출을 하려고 했어. 


사람이 아니었기 떄문에 부려먹는것 또한 엄청났음. 농사일부터 시작해서 집안의 잡다한 일들, 심부름 등을 죽기 전까지 무보수로 일해야 했으며 노비가 마음에 안 들 경우 주인이 마음대로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대우 또한 최악이었음.. 그래서 국가 공권력이 노비를 잡으려는 추노를 단행함에도 혹독한 형벌을 각오하고 도망치는 노비들도 많았으며, 심지어 잡힐 경우에는 그 주인을 몰래 죽이고 파묻어버리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노비들은 잡히다 걸리면 죽음은 각오해야 했다.


한반도의 전근대 사회에서 신분제는 크게 귀족>양인>천민으로 나뉘었는데, 여기서 천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노비는 사내종인 노(奴)와 계집종인 비(婢)를 함께 일컫는 말이어서 여자들도 노비가 많았어.


조선이 경제 전체를 노비의 노동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노예제 사회는 아니었다. 그러나 동시기 타국과 비교했을 때, 인구 구조상 노비(노예)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았으며, 경제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적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외거노비의 예를 들면서 조선의 노비제는 고대 로마의 노예제와 전혀 다르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고대 로마의 경우에도 주인의 집 밖에 따로 살면서 노동에 종사하는 경우는 무수히 많았다. 실제로 James B. Palais(제임스 팔레) 같은 미국인 역사학자는 조선시대에 노비가 전체 인구에서 최소 30%~40%를 차지한 점을 들어 조선사회가 노비제 사회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제임스 팔레


조선 시대에는 고려 시대와 달리 공노비의 비중이 축소되고 양반 계층에 예속된 사노비의 비중이 크다. 노비가 조선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컸다. 납공노비의 신공은 국가 재정의 중요한 재원이었으며 14~17세기까지 대부분의 양반들은 소작보다는 노비를 이용해 농사를 지었다. 18세기 지주들의 전호제가 일반화되면서 노비를 이용한 농장경영이 쇠퇴할 때까지 노비는 조선경제의 가장 중요한 축이었음.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양민과 노비를 가르는 가장 큰 기준 중 하나가 왕권에 의해 부여되는 여러 의무에 있었는데, 주로 양민들은 신분적으로는 자유로웠으나 국가에 대한 여러 의무가 부과되었고 지역에 따라서는 양반들에 의한 이중적 불법 착취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정말로 극단적인 상황으로 양민들이 경제적으로 빈곤이 심화되면 스스로를 노비화시키기도 하였으며, 역으로 노비가 된 것이 불리하다고 생각되면 목숨걸고 탈출하기도 했다.


다만 이것이 농민들이 자유롭게 양인과 노비의 신분을 선택하고 소득을 극대화하였다는 것은 아니다. 노비가 된다는 것은 국가의 보호에서 벗어나 유력자의 소유물이 된다는 것이며 도망친다고 해도 노비주의 추쇄(추노)를 걱정해야만 했다. 또한 투탁(자기 몸을 파는 것)은 어디까지나 불법이었고 왕권이 강하였을 때는 스스로 몸을 팔기도 힘들었다. 


상대적으로 왕권이 약했을 때는 투탁과 자매가 쉬웠다. 그런데 웃긴건 양반들 스스로가 양민의 노비화를 꾸준하게 유도하였기 때문에 노비 인구는 왕권과 양반의 권력 이동에 따라 그 숫자가 크게 변화했다고 함... .



조선 초기에는 중앙정부가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또 양인과 천민의 결혼의 폐단을 줄이고 양인을 늘리고자 노비종부법(천한 사람과 일반인과의 결혼을 막는 것)이라는 것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태종 때. 당시 양인과 천민의 결혼에서는 양인 남성과 여성 노비의 혼인이 절대적이었어. 법적으로는 일부일처제였으나 남성이 첩을 들일 수 있었기 때문에, 여성 노비를 첩으로 들이는 경우는 매우 잦기도 했고. 심지어 조선이 개창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조선왕조실록 중 태조실록에서부터 벌써 적실과 양첩, 종첩과의 구분과 차별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렇게 되서 양반과 천민의 결혼은 자손이 노비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선택하지 않아야 정상이겠으나 정신이나 신체에 문제가 있는 사람부터 자손이 노예가 되건 말건 신경 끄고 일단 결혼부터 하자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계속 서술하듯 노비가 차라리 유리한 처지인 빈농들도 있었음, 


(홍길동전이 양첩, 종첩 차별의 대표적인 예)


조선 이전 때부터 이어져 온 일천즉천(부모 중 한쪽이 천민이면 자식도 천민이라는 법)과 천자수모법(노비의 자녀는 어머니의 주인에게 예속됨)을 이용해 자기 소유의 노비를 늘리고자 하는 양반들의 의도도 크게 작용했다. 또한 위에서 언급했듯이 여성 노비를 정식 부인로 맞아들이는 게 아니고 첩으로 삼는 경우는 자주 있기도 했다. 


그래서 이런 폐단을 줄이고자 태종대에 이르러 노비종부법을 널리 시행하게 된다. 천한 사람과 일반 양인의 혼인을 막고 노비들의 숫자를 점진적으로 없애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엄청난 후폭풍을 불러일으키게 됨...




자기들의 이익이 걸린 양반들이 이를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어. 자기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양반들은 온갖 방법을 써서 양인의 자발적 노비화를 유도하고 지속적인 압력을 가하자 노비종부법은 지켜지는 일이 없어졌고 다시 종모법으로 사실상 돌아가게 된다.. 일천즉천(부모 중 한쪽이 천민이면 자식도 천민이라는 법)과 천자수모법(노비의 자녀는 어머니의 주인에게 예속됨)이 계속 시행된 거지. 세종 떄 들어서서 양반들의 강력한 반발과 상소로 인해 태종대의 노비종부법은 폐지당하게 되면서 노비들은 국가와 자기들의 주인 양쪽의 수탈에 직면하게 돼. 


그래서 노비들 중에는 돈을 모아 족보를 위조하거나 몰래 양인에게 아이를 맡기는 등 자식만은 신분에서 벗어나게 해주려고 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나왔으나 성종때 가서는 경국대전에 일천즉천이 명시화되면서 노비의 숫자가 갈수록 증가하게 된다.



역사학자들은 단성호적과 숙종실록 등을 바탕으로 17세기 조선시대 전 인구의 30~40% 정도를 노비로 추산하고 있음ㄷㄷㄷ 심지어 울산부, 단성 등 일부 지역에서는 노비의 비율이 인구의 50~60%에 육박하기도 하였는데 일찍이 성현(成俔 1439 ~ 1504)은 우리나라의 사람 중 절반이 노비라고 주장하기도 하였음. 사실 조선 시대의 법과 제도도 그렇고 역사적 사실과 유전학으로 봐서도 절대로 유쾌하지는 않은 것이 사실이다. 몇몇 이견들이 있지만 노비 같은 천민의 비율이 동시기 타국과 비교해서 높았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이를 토대로 조선은 사실상 노예제 국가로 부르기도 해.


노비들의 처우가 시간이 흐를수록 나아졌다고 하지만 본질적으로 노비들은 법적으로 남에게 예속된 사람들이었음. 설령 서당에서 훈장 일을 하는 노비일지라도, 그는 정기적으로 주인을 찾아가 신공(공물)을 납부해야 했고 또 주인의 판단에 따라 매매나 상속의 대상이 되어야 했어. 노비는 겉모습이나 직업이 천하지 않더라도, 법과 제도적으로 심각한 천대를 받았다는 점은 조선 후기 노비제도가 없어지기 전까지 여전했다..



조선의 대학자였던 이익(李瀷)도 “노비라는 이름은 은나라시대부터 나타난 것인데, 기자(箕子)는 그 제도를 본떠서 만든 것이나 은나라시대에도 세전의 규정은 없었다. ……(중략)…… 우리 나라의 노비법은 천하에 없었던 것으로서, 한번 노비가 되면 백세(百世) 괴로움을 받게 된다.”고 하면서 그 부당함을 들어 폐지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어.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공식적으로는 완전히 폐지되면서 형식적으로는 노비도 같이 사라졌으나 모든 노비들이 자유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 당시 노비들은 명칭은 머슴으로 바뀌었으나 이들은 경제적으로 주인에게 예속된 상태였고 마을 자체가 작은 사회여서 주인에게 밉보이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그나마 자립 가능한 노비들만이 독자적으로 살 수 있었지만 이들이 대다수였으면 노비제가 그렇게 오래갈리가 없다. 따라서 대부분이 적은 보수를 받았을 뿐, 현재판 노예들처럼 착취당하는 신세는 여전했다고 함.


조선이 망하고 신분제가 없어졌다고 해도 머슴과 소작이라는 형태로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고 60년대말 박정희 대통령 때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인한 대규모 이촌향도 현상이 일어나면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러나 조선이 망하고 없어질 거 같았던 노비제를 그대로 답습한 나라가 있었으니 그건 북조선이야. 이렇게 500년간 사람들을 옭아매었던 노비제도는 더욱 구체화되어 적대계층으로 탄생함. 현재 북한에서는 사람들을 크게 핵심계층, 동요계층, 적대계층으로 사실상 신분제를 부활시켜 버렸음.


적대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그 당시 종교인, 철학자, 부자, 지주들, 철학자, 출당자, 전쟁시기 미군 협력자들이 대표적으로 속하게 됨,


가족 중 한명이라도 적대계층이면 아무리 나머지 친족 구성원들이 핵심계층으로 도배가 되어있더라도 적대계층이고 단 한명의 적대계층으로 인하여 핵심계층의 자리를 빼앗기게 된다. 이는 일천즉천과 상당히 유사하지. 적대 계층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본인의 능력과 관계없이 차별대우의 대상으로 간주되어 진학을 할 수 없는 것은 물론, 탄광 지구로 강제 이주된다. 동요계층으로 분류된 사람보다도 더한 차별 + 승진 한계가 적용되는 것은 당연해


또한, 군복무에서도 차별이 있어. 과거 사정이 좀 낫던 시절에는 군복무가 불가했음 좋은 게 아닌가 하겠지만, 이는 배급 없음을 의미한다. 사실상 굶어 죽으라는 거지. 그러다가 고난의 행군 이후 정신이상이거나, 불구거나, 신체조건이 월등해서 특수부대로 뽑히는 경우를 제외하면 '건설부대'로 끌려가게 됨


주기적으로 이뤄지는 숙청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으면 적대계층으로 전락시키고 이전과 달리 가족들은 수용소에 넣어 죽이는 대신 그냥 적대계층으로 편입해서 지방으로 추방하는 일이 늘었기 때문에 아예 없는 건 아니고 적대계층에 속한 구성원 수 자체는 꾸준히 유지되고 있다고 하네


3줄요약


1. 조선시대는 노예제 사회라 할 만큼 노비들이 엄청 많았다. 50프로가 노비였을 정도

2. 노비들의 처지는 매우 처참할 수준이었고 물건 수준에 불과했다. 그래서 노비 신분에서 대부분 벗어나려고 했다.

3. 조선시대 노비제도는 북한에서 적대계층으로 다시 부활하게 되어 오늘날까지 명맥을 잇게됨.


쓰는데 몇시간 걸렸는데 봐줘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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